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49)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49)화(49/195)
#43
이 유언을 남긴 이는 리벤저의 리더 역할을 했던 이강진이었다. 보호 계열이 주인 윤서와는 달리 그는 공격 스킬이 주였다. 함께 팀을 이뤄서 싸우기 좋으므로 붙어 다닐 때가 많았다.
‘우리가 전부 나가든, 누구 혼자 나가든 꼭 좋은 집을 구하는 거야. 안락하고 평화로운 보금자리. 방은 세 개, 욕실은 두 개. 넓은 테라스도 있고, 햇볕이 잘 드는 좋은 집. 반려동물이나 식물을 키우는 건 그때 가서 정하고 일단 나가면 바로 집부터 사자. 약속했어.’
이강진은 그 말을 귀에 딱지 앉도록 했다. 특히 이도민이 죽은 후로는 더욱 심해졌다. 윤서는 그때 이미 대던전을 나가면 죽을 생각이었지만, 이강진이 너무 힘들고 지쳐 보여서 손가락을 걸어 약속해 줬다.
윤서가 대던전을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본 사람도 이강진이었다. 대던전을 나와 안락한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윤서는, 이강진은 던전을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
윤서에게 따로 유언을 남긴 것은 아니나 윤서는 그가 항상 하던 말을 유언이라 생각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안락하고 평화로운 보금자리. 방은 세 개, 욕실은 두 개. 넓은 테라스도 있고, 햇볕이 잘 드는 좋은 집
윤서가 거금을 들여 산 이 집은 딱 그가 얘기한 구조였다. 실드 트랩에 돈을 너무 써서인지 방음은 완벽하지 않아 옆집의 어린애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리고 위에서는 발 망치가 쿵쿵쿵 다니며, 어딘가에선 개 짖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이지만…. 한낮에 햇살 비치는 테라스의 안락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포근한 햇볕을 쬐고 있으면 소음 따위 아무 상관도 없어졌다.
그러나 그 예쁜 테라스를 놔두고 정작 윤서가 가장 자주 있는 곳은 거실 소파였다.
정확히는 TV 앞.
오늘도 윤서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씻은 후 머리도 채 말리지 않은 상태로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권지한과의 대화 때문에 스트레스를 상당히 받은 그는 오늘치 유언들은 뒤로하고 ‘러브 인 한강’ 재탕부터 할 생각이었다. 42부작 드라마인데 이번으로 열 번째 재탕이었다.
TV 볼 때 먹는 용도로 테이블 위에는 항상 주전부리가 널려 있었다. 물컵도 가득 채웠고, 조명도 조절했다. 이제 푹신한 소파에 앉아 편히 드라마를 시청하는 일만 남았다.
“아.”
오늘치 유언은 패스하려 했으나 이건 해야겠다.
윤서는 다리를 굽히고 선 후 양팔은 앞으로 뻗고 허리는 세운 채 다리를 굽혔다. 그 상태로 유지하다가 잠시 후 천천히 다리를 폈다. 그리고 다시 그 동작을 반복했다. 스쿼트였다.
처음엔 힘들어서 이딴 걸 왜 해야 하나 그냥 유언 다 무시하고 죽을까 싶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스쿼트를 하면서도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었다.
“김치찌개에는… 꽁치를 넣어야 해….”
“아니, 김치찌개에는 돼지고기를 넣는 거야. 정신 차려, 제발 좀!”
“꽁치…. 꽁치와 묵은지….”
“묵은지 먹자. 대신 꽁치 말고 돼지고기를 넣을게. 응?”
“꽁치가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1화 초반, 꽁치파와 고기파 조연 커플의 갈등을 보던 중 테이블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지잉- 짧게 세 번 진동했다.
윤서는 차분히 스쿼트를 5회 더 한 후 소파에 털썩 앉아 메시지를 확인했다.
수재희
형! 혹시 지금 통화돼요?
수재희
윤서 형 머 해요
형형~~~~
윤서 형 안 읽씹하는 거 아니져? 오늘 지한이 형과의 일 때문이 아니니까 전화 좀 해여
간신히 잊고 있던 권지한과의 만남이 떠오른 윤서가 미간을 좁혔다. 빨리 해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는 바로 수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재희는 호들갑 떨면서 인사한 후 바로 본론을 얘기했다.
– 아까 너무 놀라서 깜빡하고 말 못 했는데 내일 주말이니까 같이 템 시장 갈래요? 길드장 형이 윤서 헌터가 아직 무기가 없으니 꼭 장만해 주라고 해서요.
“양평 아이템 시장 말이에요?”
– 네, 길드장 형이 형 살 때 보태라고 20% 할인 쿠폰도 줬어요. 석영 A급 이상만 받는 쿠폰이에요.
“필요 없습니다. 석영 아이템 제작 부서에서 적당히 고를게요.”
소중한 주말을 그런 걸로 낭비할 수는 없다. 윤서는 아주 바쁜 사람이었다. 등산도 가야 하고, 낚시도 해야 하고,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피아노 연주에, 쿠키도 구워야 한다.
– 아, 형. 왜요오오.
윤서가 거절하자 수재희는 기다렸다는 듯 아이이잉, 징그러운 애교를 부렸다.
– 길드장 형이 꼭 같이 가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야 저한테도 20% 할인 쿠폰 준다고.
그거였구먼. 윤서가 입꼬리를 삐죽이며 다시 거절하려는 때였다.
– 저 살 것도 있고, 내일 저녁에 서채윤 무기 템이 전시된다고 해서 꼭 가야 한단 말이에요.
“…무슨 무기요?”
– 서채윤 무기 템이요. 뉴스는 아직 안 떴는데, 실제 서채윤이 사용했던 단검을 이번 주말 딱 이틀만 공개한대요. 아무리 주말에 움직이기 귀찮아도 이건 보러 가야죠!
윤서는 핸드폰을 든 채 얼어붙었다. 서채윤이 사용하던 단검이라면 단 하나뿐이었다….
“‘존재하는 넋’….”
– 네, 네. 맞아요. 역시 형도 아네요.
윤서가 무심코 중얼거리자 수재희가 반색했다. 윤서는 머리가 어지러워서 시끄러운 핸드폰을 조금 떨어뜨리고 이마를 짚었다. 신경 안정제를 먹을까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던전에 두고 나온 줄 알았다.
영원히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어딘가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건 어딘가에 전시될 물건 같은 게 아니었다.
‘구해 줘야 해.’
윤서는 ‘존재하는 넋’을 책임져야만 했다. 그건 윤서에게 귀속되어 있으므로…. 벌써 10년이나 지났으니 현재 어떤 상태일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어쩌면 넋이 이미 떠나 버렸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윤서는 그것을 되찾고, 책임져야 했다.
– 찐찐 VVIP들만 초대해서 토요일에는 30분, 일요일에는 1시간 공개한다고 했거든요. 석영에서도 티켓 고작 열 장밖에 못 얻었다는데 그중에 다섯 장을 우리 퍼펙트 1팀한테 준 거예요. 우리가 다 서채윤 그루피들인 거 길드장 형도 아니까. 표 안 줬으면 힘으로 빼앗았을 거라 그냥 준 거죠. 알렉 아저씨랑 커플 형 누나는 일요일에 보러 가기로 했다는데 전 그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너무 정신 사납고, 움직이지도 않는 무기 1시간이나 보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내일 가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내일 만나죠.”
– 오, 역시 형도 끌리는 거죠? 서채윤 앞에선 모두가 한 맘이라니까.
윤서는 수재희와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드라마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다가 결국 신경 안정제를 한 움큼 털어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고서 꾼 꿈은 당연한 듯 악몽이었기에 곧 소스라치며 일어나야 했고… 윤서는 늘 상비해 두는 수면제를 평소보다 더 많이 먹은 뒤에야 잠이 들 수 있었다.
***
삐유. 삐윳삐윳.
작달막한 푸른 새가 아침부터 내내 윤서의 주위를 날아다니며 귀찮게 했다. 처음엔 그래, 그래 하던 윤서가 나중엔 반응해 주지 않자 윤서의 까만 머리칼을 부리로 잡아당기며 떼를 쓰기도 했다.
‘채윤아. 얘 좀 달래 줘. 울다가 실신하겠어.’
결국 보다 못한 이도민이 말하자 새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삐융삐융 더욱 서럽게 울어 왔다.
‘서채윤의 새 때문에 우리 고막도 파인다. 얼른 달래야 한다.’
‘서채윤은 작은 새를 학대하는 나쁜 사람이다.’
‘채윤아, 뭔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고 쪼그만 거랑 신경전을 하고 그러냐.’
친구의 말을 시작으로 다른 이들까지 잔소리를 퍼부었다. 외국 헌터들까지 한국말로 한마디씩 하자 순식간에 수백 마디가 되었다. 윤서는 결국 넋의 이름을 부르며 손바닥을 들었다.
삐이. 삐유우!
새가 포르르 날아와 손바닥에 안착하고선 토라진 듯 조그만 얼굴을 홱 돌렸다.
넋이 이러는 이유는 어제 윤서가 잠깐 다른 헌터의 단검으로 몬스터를 상대했기 때문이다. 너무 긴박한 상황이어서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검으로 몬스터를 해치우고 나니, 작은 새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네가 어떻게 나 말고 다른 무기를 사용할 수 있어?’라는 얼굴로 보고 있었다.
‘어젠 어쩔 수 없었던 거 알잖아. 집히는 게 그거밖에 없었어.’
삐유!
‘알았어. 앞으론 안 그럴게. 그냥 내가 좀 다치지, 뭐.’
삐이. 삐융.
‘대체 어떻게 하길 원하는 거야….’
윤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른 쪽 손가락으로 새의 등을 쓰다듬었다.
삐융.
새가 윤서의 손가락을 부리로 살짝 건드리고는 동그란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아주 작은 것의 친애가 담긴 행동에 윤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새는 신난 듯 날개를 파닥거렸다. 잘 삐지는데, 달래 주면 또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옆에서 윤서의 친구가 웃었다. 다른 헌터들도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1,203명으로 시작해서 597명이 남았을 때의 일이었다.
***
윤서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잠에서 깼다. 뭘 했다고 온몸이 얻어맞은 듯 쑤셨다. 아마 간밤의 꿈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았다. 눈뜨자마자 약부터 먹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친 후 TV를 켜 놓은 채로 주방에 들어갔는데, 뉴스에서 앵커가 흥분한 목소리로 서채윤 무기가 템 시장에서 주말 이틀간만 전시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새벽에 기사가 뜬 모양이었다.
“특정한 소수만 관람하는 건 불공평하다는 얘기가 많자 전시회 측에서는 보안 관계상 관람 시간 연장은 불가능하나 대신 영상 관람을 허용하며, 인원 추가에 대해서는 서채윤 무기 소유권자와 조율 중이라는 입장을 전했습니다.”
윤서는 퀭한 얼굴로 찌개를 끓이고 반찬을 꺼냈다. 그는 아침밥을 먹을 때도 흑미 밥에 나물 반찬 3종, 고기반찬 1종, 찌개나 국까지 끓여서 든든하게 먹었다. 물론 유언 때문이었다.
‘퍼펙트에 들어간 게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그는 반찬을 그릇에 담으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