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5)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5)화(5/195)
#04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윤서 앞에서는 더욱 친절하고, 더욱 잘 웃는 박수빈은 저쪽 잡담보다는 윤서에게 더 흥미가 있는 듯했다.
“던전에는 한 번도 안 가봤습니다.”
“정말요? 보통 적성에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 번은 가잖아요.”
“가 보나 마나 뻔해서. 제가 겁이 많습니다.”
“윤서 씨 스킬이 보호 계열이었죠? 나름 전투계인데 아깝네요. 공격계는 하나도 없어요?”
“없습니다. 수빈 씨는요?”
“저도 치유와 방어 스킬뿐이에요. 순수한 힐러죠.”
“힐러면 오라는 데 많을 텐데 왜 이런 데 들어와서 고생입니까?”
윤서의 말에 박수빈이 푸훗, 웃었다.
“힐러 나름이죠. C급 힐러는 그렇게 인기 많지 않아요.”
박수빈은 웃으며 말하고는 윤서의 잔에 술을 따랐다. 윤서 또한 박수빈의 잔을 채우면서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인류 도감>을 사용합니다.
상대의 시스템 프로필을 열람합니다.
곧 윤서에게만 보이는 반투명한 창이 떴다.
인류 도감 : 박수빈, 30세, 남성
등급 : A급
(아이템 ‘가면무도회’ 사용으로 C급 가장 중입니다)
특성 : 치유사
(빛의 신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사랑의 신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스킬 : <빛의 세례> S. <빛의 실드> B, <빛의 손길> A
고유 스킬 : <나아가는 자> A, <박테리아> A
∗ 그 외 스테이터스는 던전에서만 열람 가능합니다.
작년 박수빈이 영입되었을 때 보았던 것과 똑같은 상태 창이었다. ‘가면무도회’는 A급 아이템으로, 등급, 특성, 스킬 등 시스템 프로필의 한 카테고리를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데, 윤서의 <인류 도감>에는 통하지 않았다. 그 덕에 윤서는 그 어떤 거짓도 없는 프로필을 봤다.
사실 처음 봤을 때는 표정 관리 하느라 힘들었다. A급 헌터는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전 세계에 1천여 명밖에 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런 상급 헌터 중 하나가 C급으로 가장하여 존재감이 없다시피 한 약소 길드에 들어온 것이다. 슬쩍 떠봤는데 길드장도 박수빈을 C급으로 알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소개해 줬어. 5년 전에 각성한 C급 치유사란다. 우리 마침 힐러도 필요했고, 인성도 좋은 사람이라 바로 데리고 왔지.’
길드장에게서 그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 듣고 윤서 나름대로 알아봤는데, 그 아는 사람도 아는 사람에게서 소개받고, 그 사람도 다른 이에게서 소개받고, 그런 식으로 너무 가지가 길게 뻗어 가서 더 조사할 수 없었다.
‘가호 신을 둘이나 둔 각성자도 흔하지 않은데 스킬 하나는 S급이야.’
그런 자가 이런 약소 길드에 C급으로 가장해서 들어왔다는 건 꿍꿍이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왜? A급 헌터가 이런 재미없는 곳에 잠입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처음엔 호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호기심 때문이라면 1년이나 머무르며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윤서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유를 전혀 추측할 수 없었다.
“윤서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박수빈이 윤서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윤서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그보다 어제는 수고했습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어제 던전 공략 팀이 클리어한 던전은 충북 산속에 생긴 폭발 타입 B급 네이비 던전이었다.
던전은 타입, 등급, 색상에 따라 분류된다.
우선 타입으로는 폭발 타입과 범람 타입이 있다. 전자는 던전의 시한이 끝나면 던전과 함께 근처 지대가 폭발하는 타입을 말하며, 후자는 붕괴된 댐처럼 던전 안의 몬스터들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타입을 말한다.
그다음 등급은 던전에 출현하는 보스 몬스터의 등급을 뜻하는 것으로 F급에서 S급까지 있다.
마지막으로 색상은 던전 발생 시 등장하는 포탈의 색상을 의미한다. 레드, 오렌지, 옐로우, 네이비, 그린 총 다섯 단계가 있는데 이 기준은 던전 지형의 위험도이다.
예를 들어 포탈 색상이 초록색이라면 A급이라도 보스만 처리하는 한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런 던전은 약초나 광석, 몬스터 가죽 같은 던전 부산물을 쉽게 얻어 올 수 있어서 약초 던전이라고도 부른다.
반면 F급이라도 포탈 색상이 선명한 붉은 색이면 보스 몬스터는 커다란 쥐 한 마리인데 지형이 용암 지대이거나 유황 지대인 식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레드 등급의 던전을 매운맛 던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번에 클리어한 폭발 타입 B급 네이비 던전은 낙엽을 포함해 총 세 길드가 합동 공략에 나섰고 클리어까지 하루가 꼬박 걸렸다. 이 정도면 대부분이 C급 헌터인(한 명은 사실 A급이지만) 약소 길드들의 파티치고는 괜찮은 성적이었다. 아마 박수빈이 알게 모르게 도왔으리라.
“저도 이제 1년 차잖아요. 팀워크가 잘 맞은 덕분이죠.”
“다들 좋은 사람들이죠?”
“네, 각성한 뒤로 이런저런 곳 다 다녔는데 이렇게 착한 사람들만 있는 곳은 처음이에요.”
박수빈이 빙긋 미소 지었다. 윤서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확신의 저울>을 사용합니다.
상대의 발언을 판단합니다.
확신 80 : 중도 10 : 의문 10입니다.
‘확신 80%라고?’
윤서는 조금 놀랐다. 만약 박수빈이 스킬 방어 아이템을 가졌다고 해도 <확신의 저울>은 속이지 못한다. 박수빈의 방어 아이템 등급이 어떻든 윤서의 스킬 등급보다는 낮을 것이므로…. 즉 박수빈의 방금 전 말은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윤서 씨도 사람이 좋아서 이곳에 있는 거죠?”
“사람이라기보단 돈입니다. 소형 길드 중에서 이만한 연봉 주는 곳은 드무니까.”
무감정한 대답에 박수빈이 눈매를 휘며 웃었다.
“윤서 씨, 이제 보니 능청맞네요.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돈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하네.”
“저 돈 좋아합니다. 황금만능주의자예요.”
“그럼 더 높은 연봉 제안하는 곳 있으면 갈 거예요?”
“적극 고려해 볼 겁니다. 수빈 씨는 아닌가요?”
“나는 돈보단 사람이 좋아서요.”
제 화제가 계속되면서 부담스러워진 윤서가 박수빈에게 묻자 박수빈은 근사하게 미소 지으며 바로 대답했다. 윤서는 남자의 다갈색 홍채에 어떤 음모가 있진 않나 살폈지만 딱히 보이지 않았다.
“술이나 마시죠.”
윤서가 수빈의 술잔에 잔을 부딪치고 단번에 들이켰다. 깔끔하게 잔을 비운 그는 곧바로 술을 따랐다. 각성자 전용 고깃집이라 들여놓은 술도 각성자용이었다. B급 헌터까지는 알딸딸하게 취할 수 있을 것이다. 1/3가량 채웠을 때 박수빈이 소주병을 가져갔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이제 시작인데 무슨 약한 소립니까.”
“오늘은 자제해요. 길드장이 중요한 공지 있다고 했잖아요.”
“길드장 올 때까지 절대 취할 일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윤서는 술병을 빼앗아 잔을 마저 채웠다. 박수빈이 난감한 듯 눈썹을 기울이는데 마침 고희원이 박수빈에게 말을 걸었다. 던전 내 출몰하는 몬스터에 대한 질문이었다. 고희원 말고도 다른 이들이 눈을 초롱초롱 뜨고 보는 바람에 박수빈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 줘야 했다.
윤서는 사람 좋게 웃고 있는 A급 헌터를 힐끔거렸다.
설마 정말로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싶어서 이곳에 온 걸까.
어쨌건 윤서는 이자가 낙엽 길드에 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
“길드장님 오셨어요!”
“드디어 왔어?”
“이 양반 참 빨리도 온다.”
고기 불판을 테이블마다 세 판씩 갈았을 때쯤 길드장 기상혁이 도착했다. 그답지 않게 정장을 빼입고 온 기상혁은 룸에 들어오자마자 구석의 빈 궤짝들을 보고 질린 얼굴을 했다.
“다들 술을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각성자 전용 술 오랜만이라 그런지 맛있더라고요. 취하지는 않았어요.”
“내가 못 살아. 다 각성자들이다 보니 사람은 열둘인데 회식할 때마다 수백이 깨져.”
“아, 진짜. 늦게 와 놓고서 잔소리할 거예요?”
고희원이 눈을 흘겼다. 기상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희원이 마련한 가운데 자리에 앉은 길드장은 우선 던전 공략 팀원들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어제 클리어하고 돌아왔지? 다들 수고했어. 다친 곳은 잘 치료했고?”
“예, 수빈 씨가 말끔하게 치유해 줬습니다.”
“자네들 덕분에 우리 길드가 이런 비싼 곳에서 회식도 하는 거야. 항상 고마워. 다들 우리 던전 공략 팀에게 박수 한번 치지.”
길드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박수 치며 환호했고, 던전 공략 팀 팀원들은 쑥스러워하면서도 뿌듯한 표정을 했다.
사실 길드장의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보통 길드의 수익 창출원은 던전 사업이 70~80%를 차지하고 트랩 설치 등 나머지 사업이 20~30%인 반면, 낙엽 길드는 던전 공략 팀과 대민 지원 팀이 5.5:4.5 정도로 거의 비슷한 수준의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실드 트랩 설치 비용이 타 길드에 비해 저렴한 데다가 고장률도 현저히 낮다는 사실이 알음알음 입소문 탔기 때문이다. 고장률이 낮은 건 전적으로 윤서의 활약 덕분이다.
그러나 길드장은 길드원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는 언제나 던전 공략 팀을 추켜세우고 그 공로를 칭찬했다. 목숨 걸고 던전에 진입하는 이들이니 그만큼 더 대우해 주는 것이다. 여타 소형 길드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면 시기와 질투가 오가기 마련인데, 낙엽 길드는 유난히 선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누구도 그것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런데 길드장님 오늘 옷차림이 왜 그래요? 따님 남자 친구라도 보고 왔어요?”
“아니지. 길드장님이 따님 남자 친구 볼 거면 이렇게 안 입고 헌터 복장을 하고 갔을걸? 무기 아이템 허리에 차고 상견례장 테이블 부수면서 ‘우리 공주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네 허리가 이 테이블처럼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겠지.”
“안타깝지만 오늘은 우리 공주님 남자 친구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만나고 왔다.”
“송희 남친보다 중요한 사람이라고요?”
다들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기상혁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오늘 내가 중요한 공지가 있다고 했지?”
“네, 그래서 다들 모였잖아요. 무려 윤서 씨까지.”
“알겠다. 혹시 오늘 공지 관련된 중요 인물을 만나고 오신 거예요?”
“그래.”
고희원이 궁금해 죽겠다는 듯 얼른 말하라고 재촉했다. 기상혁은 좌중을 훑었다. 하나같이 호기심 어린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기상혁의 시선은 생글생글 웃고 있는 박수빈을 지나 늘 그렇듯 무심한 얼굴을 한 윤서에게서 멈췄다. 기상혁이 목을 가다듬었다.
“사실 얼마 전… 석영 길드에서 접촉해 왔다.”
“…….”
“석영 길드가 우리 길드와의 합병을 원한다더군. 그리고 난 방금 합병 계약서에 수락 인장을 찍고 온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