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50)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50)화(50/195)
#44
퍼펙트에 들어가 티켓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쯤 뉴스를 보면서 발을 동동 굴렀을 텐데….
아니, 아니다. 동동 구르진 않았을 것이다. 전시회장에 몰래 잠입해서 넋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했겠지. 그러나 석영 덕분에 티켓을 확보했으니 오늘 저녁에 느긋하게 관람하며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면 된다.
‘가품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가짜라면 실망하겠지만, 진짜여도 마음이 아프고 착잡할 것이다. 그 오랜 시간을 홀로 기다리면서 그 녀석이 날 미워하게 되지는 않았을는지.
윤서는 심경이 복잡하고 입맛이 없어서 아침 식사를 두 그릇으로 끝냈다.
***
세상엔 가이아 시스템의 장단점을 놓고 대립하는 이들이 많았다.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던 가이아 시스템을 극도로 증오하는 반대파와 가이아 시스템으로 인해 인류 문명이 크게 발전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찬성파. 윤서는 중립이었으나 어쩔 때는 찬성파 쪽으로 한없이 기울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밤에 잠을 설친 후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오늘 같은 경우.
“주인님, 일어나세요. 목적지에 도착했어요.”
카 시트를 한껏 젖힌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윤서가 찹쌀이의 말에 눈을 떴다. 이제 세상은 졸음운전으로 인한 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AI가 대신 운전해 주니까. 이럴 때만은 가이아 시스템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서가 시간을 보니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도착한 상태였다. 길이 밀릴 테니 서둘러 나왔는데 너무 서두른 모양이다.
“나 좀 자야겠다.”
“조도를 낮출게요. 좋은 꿈 꾸세요.”
찹쌀이는 윤서를 위해 차내 환경을 취침하기 적절하게끔 조절했다. 윤서는 그 배려에도 불구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눈만 감은 채 여러 생각을 하다가 찹쌀이에게 말을 걸었다.
“찹쌀아, 오늘 새 가족을 데리고 올지도 몰라.”
“절 폐차시키나요?”
“어?”
서글픈 어조에 윤서가 당황했다.
“새 차를 들이면 헌 차는 폐차장 말곤 갈 곳이 없잖아요. 주인님은 AI 자동차를 두 대나 끌 재력이 없으시니까….”
정말 사람 같은 AI였다.
“아니, 그런 거 아니고. 반려동물 같은 거 들인다는 뜻이야.”
“아하, 다행이네요. 고양이? 강아지? 새? 종류가 뭔가요?”
“뭐라도 될 수 있어. 너도 분명 좋아할 거야.”
“기대할게요. 외로운 주인님께 새로운 가족이 생겨서 너무 좋아요.”
윤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 안 외로워.”
“주인님 외로워요. 제가 알아요.”
“네가 어떻게 알아.”
“주인님은 외롭고 고독해요. 저는 다 알아요.”
“그러니까 네가 어떻게 아냐니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에요.”
“이럴 때만 이해 못 하는 척하지, 또.”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에요.”
치사한 AI를 내버려 두고 윤서는 옆좌석의 니트 가방에서 뜨개질거리를 꺼냈다. 고희원에게 줄 니트는 마무리 단계라 집에 두고 왔고, 이건 99장째의 니트이다. 아직 누구에게 줄지는 결정하지 못했는데 일단 대충 성인 남성 사이즈로 뜨고 있었다. 이걸 포함해 2장만 완성하고 나면 이 유언은 끝난다.
그럼 남은 유언은 17개.
죽음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중이었다.
***
약속 시간 10분 전 주차장을 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양평 아이템 시장은 세계 최초의 아이템 시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규모도 크고 항상 방문객들로 북적이는데, 오늘은 유독 더 심했다. 레인보우나 미르, 가온 같은 윤서도 알 만큼 유명한 길드 엠블럼을 단 옷을 입은 사람들도 많았고, TV에 자주 나오는 낯익은 헌터들도 여럿 보였다. 심지어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느낌이었다. 여기저기 촬영 카메라도 많아서 윤서는 모자를 눌러 썼다. 서채윤 무기가 전시된다니 당연히 북적북적할 거라 생각하고 모자와 마스크를 준비해 왔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은 오랜만이네.’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친구들과 노느라 평일이고 주말이고 집에 붙어 있는 때가 드물었는데, 최근엔 그놈의 유언들 때문에 사방팔방 대한민국 전역을 쏘다닌 반동인지 쉴 때는 집에만 있고 싶었다. 안락한 집, 푹신한 소파에서 쿠션을 끌어안고 드라마를 보는 게 바로 휴양이었다.
약속 장소인 광장 시계탑이 가까워졌을 때 윤서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뿔테 안경을 쓴 수재희 옆에 캡 모자를 쓴 키 크고 어깨 넓은 남자가 있던 탓이었다.
“어, 형!”
수재희가 윤서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형, 저예요. 저!”
“수재희 헌터. 권지한은 여기 왜 있어요?”
“오….”
수재희가 눈을 크게 뜨더니 해맑게 웃었다.
“우리가 한 거 나름 S급 인식 방해 아이템인데 가볍게 뚫어 버리네요.”
“…….”
윤서가 뒤늦게 후회했다. 좀 더 생각하고 내뱉었어야 했는데…. 워낙 카메라도 많고 사람도 많은 곳이라 얼굴이 널리 알려진 두 사람은 변장하고 오는 게 당연했다. 잠을 못 자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은 탓이다.
“뚫은 건 아닙니다. 다른 사람 얼굴로 보이는데 여기서 내 이름을 부르고 달려올 사람은 재희 헌터밖에 없으니까. 저 남자는 체격이 권지한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서 그냥 추리한 거죠.”
“형, 아직도 등급 속이는 거 포기 안 했어요?”
“속이는 게 아니라 진짜예요.”
“이제 그만 좀 해요. 만약 형이 소설 주인공이면 독자들이 고구마라고 욕함요.”
윤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여전히 시계탑 밑에서 팔짱 낀 채 이쪽을 보는 권지한을 노려봤다. 눈매는 조금 사납지만 잘생긴 외모에 몸이 탄탄하고 자세가 곧아서인지 모델로도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권지한이 느슨하게 미소 짓고는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래서 저놈은 여기 왜 있습니까?”
“제가 불렀어요. 형이랑 같이 간다고 하니까 지한이 형도 오고 싶다고 해서. 두 분 사이가… 특별하잖아요.”
수재희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묘하게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혈투를 앞둔 사이라는 걸 왜 저렇게 수줍게 표현하지? 윤서는 권지한과의 혈전이 끝나면 수재희에게도 결투장을 내밀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사이 가까이 온 권지한이 윤서에게 말을 걸었다.
“왜, 윤서. 내가 와서 반가워?”
모자챙 아래에서 회색 눈이 빙그레 웃었다. 윤서는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겁니까. S급 레드 던전에서 만난 보스가 더 반가울 것 같은데.’라는 표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권지한은 짧게 웃고는 말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길드장이 서채윤 무기 좀 감정하고 오라고 시켜서 온 거니까. 서채윤 무기 입수한 곳이 유럽에 있는 C급 길드거든. 약초 던전만 전전하던 약소 길드가 서채윤 무기를 손에 넣었다는 게 이상하잖아. 나보고 아이템 감정을 하라는 거지.”
“유럽에서…?”
“그래. 수상하지?”
스킬 <확신의 저울>을 사용합니다.
상대의 발언을 판단합니다.
상대가 판단을 거부했습니다.
습관적으로 스킬을 사용했으나 역시 권지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저 먼 유럽 길드에서 넋을 손에 넣었다는 게 수상하긴 했다. 윤서는 생각에 잠겼다.
넋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대던전에서 열세 번째 보스 몬스터를 물리쳤을 때였다. 단검으로 보스 몹의 목 뒤를 깊게 찔렀고 그대로 아래로 쭉 내리그었다. 그러고 나서는….
‘정말 죽은 게 맞아?’
‘확실히 죽었어요. 채윤이가 몸을 열두 동강 냈다고요.’
‘그럼 왜, 왜 출구 포탈이 안 생기는 거지?’
‘설마 이 보스가 마지막이 아닌 건….’
‘포탈이, 포탈이 왜 안 생기는 거야. 빌어먹을!’
‘젠장! 이럴 줄 알았어. 다 끝났어. 우리는 여기서 평생 나가지 못할 거야. 평생 여기서….’
열세 번째 보스를 죽인 후의 상황은 긴박하고 혼란했다. 당시 윤서는 이미 치유 내성에 걸린 상태였고, 심한 부상을 입어서 정신도 가물가물했다. 쌔액쌔액 가쁜 숨만 내뱉으며 이강진의 품에 안겨 있다가 출구 포탈이 열리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극도의 두려움에 질렸던 기억이 있다.
혼란에 빠진 그들의 눈앞에 포탈이 생성된 건 보스를 처치하고 몇 분이 흐른 후였다. 처음엔 드디어 출구인가 하여 기뻐했으나 포탈의 색을 본 일행의 얼굴은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포탈의 색이 칠흑 같은 검은색이었으니까.
“윤서 형?”
수재희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윤서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뭡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하나 해서. 서채윤 무기가 가짜일까 봐 그래요?”
“네, 여태 가짜가 등장한 적이 몇 번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전시까지 된 적은 드물잖아요. 전 엄청 기대하고 있어요. 또 서채윤 님도 자기 무기가 등장했다는 말에 직접 와 보지 않을까요? 우연히 마주치면 좋겠다.”
서채윤을 눈앞에 두고도 모르고 있는 수재희가 꿈꾸듯 말했다. 덩치도 큰 놈이 동심을 버리지 못한 모습에 윤서는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 형. 또 약 먹어요?”
윤서가 약병을 꺼내자 수재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윤서는 두 알을 꿀꺽 삼키고 다시 약병 뚜껑을 잘 닫아 주머니에 넣었다.
“그거 신경 안정제라고 했죠. 혹시 공황 장애 같은 거 앓아요?”
“비슷합니다.”
“헉, 그럼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은 좀 위험하잖아요!”
“던전도 들어가는데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출발하죠.”
윤서가 무덤덤하게 말했으나 수재희는 거듭 괜찮은 거 맞냐고 물었다. 윤서는 과거의 일을 떠올랐을 때 숨이 가빠 오고 정신 못 차릴 때가 많아서 조금이라도 기미가 있다 싶으면 바로 약을 꺼내 먹었다. 대격변 이후 PTSD 때문에 약을 먹는 이들이 워낙 많았고, 낙엽에서도 늘 그랬기에 처음엔 놀라서 걱정하던 이들도 나중엔 익숙해졌다. 아마 수재희도 곧 익숙해질 것이다.
그 정의롭다는 권지한은 한 걸음 떨어져서 윤서의 표정만 살필 뿐이었는데, 윤서는 오히려 이쪽이 더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