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52)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52)화(52/195)
#46
‘채윤아, 괜찮아.’
그때 리벤저의 리더 이강진이 저를 안은 채 조곤조곤 말했다.
‘나도 봤어. <가이아의 눈>으로 전부 봤어. 내가 설명할 테니까 너는 좀 쉬어.’
‘하지만-.’
‘다 괜찮을 거야. 이제 좀 쉬어. 나 못 믿어?’
눈앞이 흐릿해서 이강진이 어떤 표정이었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윤서는 어떻게든 깨어 있으려 했으나 더는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일어나 보니 이미 대던전을 나온 후였고, 생존자는 5명에서 4명으로 줄어 있었다.
‘젠장….’
수재희가 ‘그을린 나뭇가지’를 손에 쥔 채 뭐라 뭐라 떠들어 대는데, 윤서는 이명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관측자의 검> 발동으로 옛날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하, 씨.’
윤서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신경 안정제를 꺼내 먹었다. 아이템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약을 먹는 윤서를 보고 수재희와 직원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형, 괜찮아요? 물도 좀 마셔요.”
수재희가 테이블 위의 물컵을 얼른 건넸다. 윤서는 물컵을 건네받고 천천히, 전부 들이켰다.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요. 어디 좀 누워 있을래요? 저기, 여기 휴게실 같은 곳이-.”
“VVIP분들을 위한 휴게 공간 있는데 그곳에 잠깐 누우시겠습니까?”
“정말 괜찮습니다. 잠깐 그랬던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계속 고르죠.”
윤서는 민망해져서 얼른 아이템들 쪽으로 주의를 돌리려 했다. 그러다 권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권지한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애매한 표정이었다. 무언가 관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윤서는 혹시 꾀병이라고 의심하는 건가 싶었다.
쉬게 하려는 수재희와 괜찮다는 윤서의 실랑이가 끝나고 그들은 다시 아이템 고르기에 집중했다.
“저는 역시 검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제가 이 검 차고 다니면 엄청 멋질 것 같지 않아요? 본래 단검보다는 장검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 그을린 색도 마음에 쏙 들어.”
“이 과일은 안 끌립니까?”
“‘천해’라면 당연히 끌리죠. 무려 비행 스킬 부여 아이템인데. 근데 이건 하나밖에 안 남았고 복구도 불가능하잖아요.”
“어차피 다른 것들도 복구되는 속도보다 파괴되는 속도가 빠를 겁니다. 재희 헌터 말대로 한 번 쓰고 말 거라면 비행 부여가 더 좋을 듯한데요. 소환수 중에 비행 가능한 애들 많습니까?”
“으음.”
수재희가 턱을 쓸었다. 그의 소환수 중 비행 가능한 것은 <레메게톤>의 악마들과 <구운몽>의 선녀들인데, <레메게톤> 악마들은 소환되는 종류에 따라 날지 못하는 놈도 있었다.
“소환수 중 가장 강한 애한테 ‘천해’를 먹인다면 그 소환수는 공중전까지 제압하는 세상에서 가장 소환수가 되겠죠. S급 노랑 보스도 껌이겠는데요.”
윤서의 달콤한 유혹에 수재희는 천공을 날아다니는 <상자 속의 고양이>를 떠올렸다. 과연 중력을 벗어난 고양이를 상대할 몬스터가 있기나 할까? S급 던전 보스 중엔 날개를 가진 것들이 대부분이므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고양이에게 날개를 달면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애초에 무기를 고르러 왔으나 비행 아이템까지 선택지에 오르게 되자 수재희는 으아아아 괴상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헝클였다.
“형 말 들으니 또 끌리네요. 이것도 좋아 보이고 저것도 좋아 보이고 미치겠다. 한이 형은요?”
수재희가 권지한에게 도움을 구했다. 권지한은 ‘천해’를 잠깐 보다가 피식 웃었다.
“재미있네.”
“네?”
“이 보잘것없는 과일을 추천한다는 건 윤서, 너도 이걸 봤다는 거지?”
윤서가 눈썹을 꿈틀했다.
<가이아의 눈>을 가진 권지한이 진짜 아이템 설명 창을 못 봤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 설명에는 당연히 ‘마지막 관문’이라는 단어도 언급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걸 봤냐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저는 이 비행 아이템이 정말 좋다고 생각해서 추천하는 겁니다.”
“너 거짓말 존나 못 해.”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억울하네요. 재희 헌터, ‘천해’가 아닌 거 같으면 그냥 장검 사든가 하세요.”
“형들 갑자기 왜 그래요?”
수재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직원들도 혹시 아이템에 저들이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나 해서 다시 감정하고 있었다.
윤서는 입으로는 시치미를 떼면서도 권지한의 눈을 응시했다.
‘내가 아는 걸 너도 알지 않냐. 여기서 신경전 하지 말고 너도 ‘천해’를 추천해라-.’ 하는 시선이었다.
권지한은 시선을 마주하며 등받이에 올렸던 팔을 내렸다. 한쪽 팔로 턱을 괸 그가 가볍게 말했다.
“아무래도 딱 한 번 먹고 말 과일보다는 복구 가능성이 있는 무기가 좋지.”
윤서가 입을 쩍 벌렸다. 반면 수재희는 좋다고 손뼉 쳤다.
“그렇죠, 형? 역시 지한이 형은 내 마음을 잘 알아. 윤서 형은 던전에 딱 한 번밖에 안 가 봐서 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나 봐요. 자꾸 무기 아이템 필요 없다고 하고.”
윤서가 수재희보다는 던전을 적게 갔지만 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만히 대화를 듣던 직원은 아이템 한 개로 거의 결정되어 가는 것을 알고 공손히 물었다.
“‘그을린 나뭇가지’로 하시겠습니까?”
“네, 이걸로 할게요.”
수재희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서는 권지한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우리끼리 신경전할 때야?
너도 ‘선택된 자’고, 마지막 관문이라는 설명을 봤으면 수재희한테 ‘천해’를 사게 해.
얼른 눈 부라림 멈추고 수재희 말리란 말이야.
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계약서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넵.”
담당자가 템 시장 표준 계약서를 가지러 떠났다. 직원들은 선택받지 못한 두 아이템을 보관함에 회수하고 있었다. ‘천해’가 보관함에 들어갔다. 윤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라도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 윤서는 막 입을 열려다가 권지한의 표정을 보고 그만뒀다.
재미있는 영화라도 보는 것 같은 얼굴.
윤서는 권지한이 그저 자신의 반응을 보기 위해 방관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충분히 반응을 관찰했으니 이제 상황을 해결하리란 것도.
“형들… 여기 공공장소예요….”
수재희가 서로에게 강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두 형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설마 그 외국인 염병 천병 커플 말고도 또 다른 염천 커플이 탄생한 건가…. 진지하게 퍼펙트 탈퇴를 고민해야….”
그런 중얼거림도 덧붙였다. 그때 권지한이 먼저 윤서에게서 시선을 뗐다.
“수재희.”
“네?”
재희는 저도 모르게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권지한은 툭 내뱉듯이,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천해’를 사. 저거 무기로도 쓸 수 있어.”
“네에?”
재희가 벌떡 일어났다. 보관함을 닫던 직원들도 처음 듣는 얘기에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 열매를 사용하고 나면 나뭇가지는 검으로 가공할 수 있다는군. 아주 강한 귀속 아이템인가 본데 이걸 놓치면 너무 아깝잖아.”
“어, 어떻게 알아요. 형?”
“나를 속일 수 있는 설명 창은 없어. …정체를 숨긴 S급 헌터의 시스템 프로필 정도가 아니라면.”
“우와아아.”
수재희가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감탄했다. 그는 바로 ‘천해’를 사겠다고 결정했다.
상대가 석영의 권지한, 수재희다. 이제 와 가격을 올리겠다고 할 수도 없으니 직원들은 찜찜한 표정으로 판매하는 수밖에 없었다.
윤서는 옆에서 속만 부글부글 끓였다. 어차피 이럴 거면서 왜 뜸 들이고 애태운다는 말인가? 사람 반응 좀 떠보겠다고 이렇게 애태우다니. 하여튼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아이템을 사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려 했으나 사람이 미어터진 탓에 자리가 없었다. 결국 광장 분수대에 걸터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수재희의 수다를 들었다.
“아, 빨리 던전 들어가고 싶다. ‘천해’ 효과 얼마나 좋을지 얼른 보고 싶어요. 해치 등에 타서 하늘 날아다니면 짱이겠는데요. 게다가 다 쓰면 무기가 된다니 완전 개이득. 나뭇가지 따위보다 훨씬 나아요. 해치가 화염계인데 뭐 하러 중복되는 효과를 가지려고 한 건지 돈만 날릴 뻔했구.”
수재희는 새로운 S급 아이템을 얻고 기분이 좋아진 듯 더 말이 많아졌다. 어린애가 재잘재잘하는 게 귀여워서 윤서도 웃음을 머금었다.
“형들, 저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야 돼요.”
“네.”
“아, 여기 광장이니까 막 … 스킨십이랑 그런 거 하면 안 돼요! 공공장소니까요.”
“…? 압니다. 다녀오세요.”
수재희가 영문 모를 말을 남기고 화장실로 향했다. 윤서는 등 뒤로 양팔을 뻗어 분수대를 짚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파란 하늘에 점점이 박힌 하얀 구름을 보자니 유언 하나가 떠올랐다. 당장 처리할 수 있는 유언이라 유심히 흰 구름을 노려보는데 권지한이 말을 걸었다.
“윤서, 너는 정확히 병명이 뭐야?”
윤서가 권지한을 돌아봤다. 권지한은 푸른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처럼 느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병 없습니다.”
“몸 말고. 정신 말이야. 신경 안정제를 엄청 먹잖아.”
“아, 공황 장애와 외상 후 트라우마, 불면증, 우울증. 뭐 그런 것들입니다. 왜 묻습니까?”
“약을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서.”
“저는 많이 먹는 것도 아니에요. 대격변을 겪은 사람들은 다들 약을 달고 다니죠. 권지한 헌터는 약 안 먹습니까?”
“나는 너무 어렸을 때 세상이 변해서 그런지 괜찮더라고. 대격변의 날이 열 살 때였으니까….”
“열 살이요?”
“응, 나 지금 스물두 살이야.”
열 살이면 어리지만 그렇다고 트라우마가 안 남을 만큼 어린 것도 아니었다.
윤서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불면증 증세 없어요?”
“없어.”
“갑자기 우울해진다거나 다 허무하게 느껴진다거나 몸이 피로하다든가 하는 현상도요?”
“응, 전혀.”
“상담은 제대로 받아 본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