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53)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53)화(53/195)
#47
모자챙 그늘 아래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듯 올라간 권지한의 입꼬리가 보였다. 아까 윤서가 ‘천해’의 진짜 설명 창을 읽은 후로 내내 저런 표정이었는데 대화를 나누며 더욱 반짝반짝해졌다.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상담은 매해 받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선생님이 항상 내 멘탈 본받고 싶다 그러더라고. 우리 엄마가 정신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는데 내가 그걸 닮았나 봐.”
“예, 아주 좋겠습니다. 축하합니다.”
“너는 상담받고 있어?”
윤서는 상담 같은 건 전혀 받지 않았다. 대던전을 나와서 단 한 번도…. 신경 안정제도 진단서를 위조해서 사고 있었다.
“꾸준히 받고 있습니다.”
“거짓말 같은데.”
“간파 스킬이라도 써 보든가요.”
“너무하네. 너한텐 통하지도 않는 걸 써 보라고 하고.”
윤서는 대답 없이 다시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봤다. 옆에서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
잠시 후 수재희가 돌아오고 셋은 전시회장에 조금 일찍 들어가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시회장으로 향하면서도 수재희는 내내 무기 얘기만 했다.
“다음 주까지 어떻게 기다린담. 저 수련장에서 열매 써 버릴지도 몰라요.”
“새로 생긴 장난감을 얼른 가지고 놀고 싶은데 참아야 한다는 건 힘든 일이지.”
“역시 한이 형도 아네요, 이 기분.”
“아주 잘 알아.”
“헤헤, 한이 형 어른인 줄 알았는데 역시 아직 어리구나.”
수재희는 해맑은데 윤서 혼자 섬뜩한 느낌에 휩싸였다. 권지한이 말한 ‘새로 생긴 장난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시회장은 벌써 인산인해였다. 건물 외벽에 걸린 대형 광고판에서는 서채윤의 무기가 전시되는 VVIP홀 내부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재희가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영상이라도 보겠다고 몰려든 거네요. 역시 서채윤 님 인기 엄청 나. 전 세계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사람 아닐까요?”
“우리도 줄 서야 합니까?”
“입장권이 있어서 괜찮은데 입구까지는 뚫고 들어가야 해요.”
“…….”
윤서는 입구에 몰려든 사람 떼를 보며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등급 높은 각성자들이 얼마나 많이 온 것인지 다들 떡대가 있었다. 체구가 크지 않은 저로서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야 할 것 같았다. 물론 S급 힘으로 저 사람들에게 밀리지는 않겠지만, 밀리지 않으면 수상해 보일 테니 치이고 치여야만 했다.
“다른 문은 없습니까? 아니면 저 벽 타기도 잘해요.”
“문을 놔두고 왜 벽을 타요. 가뜩이나 오늘 가드 삼엄할 텐데 나란히 잡혀갈 일 있어요?”
수재희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권지한에게 말했다.
“윤서 형을 가운데에 둘까요. 우리가 형 보호해 주면서 가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 필요 없어.”
권지한이 윤서의 허리를 단단히 휘어 감고는 가볍게 들어 올려 제 품에 안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윤서가 상황을 깨닫기도 전 그는 성큼성큼 인파 안으로 들어갔다. 194cm, 85kg에 슬림해 보이지만 옷 벗겨 놓으면 온몸이 근육인 남자는 인파 사이를 거침없이 헤치고 들어갔다.
“꾸억.”
“끄악.”
“꾸윽.”
윤서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뒹구는 사람들을 봤다. 1분도 안 되어 입구에 도착했고, 권지한이 만든 길을 따라온 수재희가 후다닥 입장권을 내밀었다. 그들은 정문 옆의 VVIP 전용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시원한 에어컨과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로비가 그들을 맞이했다.
윤서는 권지한의 탄탄한 어깨에 손을 살포시 얹은 채 아직도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수재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형들…. 10초 내로 떨어지지 않으면 저 진짜 퍼펙트 탈퇴해 버릴 거예요….”
“…악!”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던 윤서가 수재희의 말에 으허헉 이상한 소리를 내며 바둥거렸다. 권지한이 낮게 웃으며 윤서를 바닥에 내려 줬다. 윤서는 착지하자마자 당장 권지한의 멱살을 잡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잘 들어오게 도와준 거잖아.”
“나 혼자 잘 올 수 있었어!”
“S급 아닌 척하느라 30분은 걸렸겠지. 밖은 덥고 난 빨리 안에 들어오고 싶었어.”
권지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윤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걸 진짜 한 대 쳐? S급이고 크게 다치지도 않을 텐데 주먹질 좀 해? 멱살 잡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을 때 로비 안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뭐 하는 거야? 싸움?”
“몰라. 아까 저 큰 남자가 작은 남자 안고 있던데.”
“연인 간의 싸움인가?”
“저 사람 진짜 미인이다.”
“에이, 재미없어. 빨리 서채윤 님 무기나 보여 주라고 해.”
로비에도 VVIP 홀 생중계 화면이 흘러나오는 TV가 여러 군데 있기에 사람이 많았다.
윤서는 이쪽으로 쏠린 시선과 상대와의 나이 차이를 생각해서 멱살을 놔 줬다.
“앞으론 이런 짓 하지 마십시오.”
“계속 말 까지. 박력 있고 좋은데.”
“재희 헌터, 안에 들어갑시다.”
“그런데 너 엉덩이 되게 탱탱하다. 엄청 탄력 있고. 군살도 없고 되게 탄탄하던데 혹시 몸매 관리해?”
“…….”
윤서는 로비 천장의 샹들리에를 올려다보며 긴 숨을 내뱉었다.
참자…. 저거 지금 나랑 싸우고 싶어서 시비 거는 거다….
“지한이 형, 어, 어떻게 그런 말을…! 남 앞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윤서 형, 저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진짜예요. 형 엉덩이 탱탱하고 탄력 있는 거 저 몰라요.”
수재희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손을 휘저으며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커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윤서는 수재희도 싸우고 싶어서 저러는 건가 진심으로 고민했다.
***
VVIP 홀은 가운데에 진열대가 놓여 있고, 그 주위를 의자가 빙 둘러싼 구조였는데 밖에 사람이 바글바글한 밖과는 달리 아직 빈자리가 많았다. 수재희가 앞줄에 앉자고 했지만 권지한이 너무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는 멀리 있는 게 감정하기 좋다고 해서 셋은 적당히 중간 줄에 나란히 앉았다.
‘생각보다 관람객 수가 적은걸.’
윤서는 의자 개수를 헤아렸다. 정확히 52개. 생각보다 훨씬 적은 수였기 때문에 이 극소수 인원 중 하나가 된 게 조금 찝찝해졌다.
‘길드장 형이 꼭 같이 가라고 했단 말이에요.’
분명 수재희는 그렇게 말했다.
유준철이 날 의심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나 혼자 의심이 많은 건가.
언젠가 유준철을 만나게 되면 <확신의 저울>을 사용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가드들이 다 각성자이긴 한데 내실은 부족하네요. A급만 돼도 이 정도는 뚫겠어요.”
수재희가 혀를 찼다. 목소리가 꽤 컸기 때문에 부산하게 전시를 준비 중이던 주최진이 움찔했다.
사실 전시회 주최 측은 며칠 전 석영 길드로부터 서채윤의 무기를 전시하라는 의뢰를 받고 급하게 이벤트를 마련했다.
보통 전시회장에 올라가는 아이템들은 신기하고 특별한 아이템, 소유자를 잃은 특별한 귀속 아이템, 설명창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대격변의 시기에 세상을 구해 주고 쓰임을 다한 아이템들이다. 감정에서 전시까지 반년은 걸리는 게 보통인데 이번에 그들에게 주어진 준비 기간은 단 나흘이었다.
서채윤이 사용한 무기 아이템이라는 사실 하나가 그동안의 전철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존재하는 넋’은 서채윤이 언급한 적도 있었고, 당시 몇 없는 무기 아이템 중 하나였기에 많은 이가 존재를 알고 있었다. 역사적인 무기였다. 그 무기의 전시라니, 석영이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주최진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들은 석영에 이런 유일무이한 전시품은 적어도 반년 전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호소도 해 봤고, 가뜩이나 아이템 도둑들이 들끓는 양평 템시장에 전시를 하면서 준비 기간을 단 나흘밖에 주지 않는다는 건 제발 도둑질해 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는 협박도 해 봤다. 하지만 석영 길드는 그에 대한 방비는 제대로 해 놓을 테니 반드시 전시해 달라고 당부했다.
석영으로서는 대재앙이 얼마 남지 않아 서채윤을 끌어내기 위해 시일을 재촉한 것이지만 그것까지는 전시회 측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급하게 마련한 전시라서 가드는 당연히 허술할 수밖에 없다는 걸 전시회 관람객들은 모르기 때문에 전시회 측 험담을 하는 것이다.
“여기 상위 헌터들이 얼마나 많은데 누가 간 큰 도둑질을 하겠냐는 생각일까요? 너무 태만하네.”
“누가 훔쳐 가려고 하면 재희 헌터가 지키면 되잖아요.”
윤서가 말하자 수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형들이 저한테서 단검을 지켜야 할걸요. 서채윤 님의 무기를 직접 보면 저도 제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회까닥 눈이 뒤집힐지도.”
“무서운 얘기 하지 마세요.”
“진짠데. 아마 내일 우리 팀원들 오면 난리가…. 어, 저기.”
수재희가 얘기하다 말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윤서가 손가락 끝을 따라가자 막 전시실에 들어서고 있는 빨간 머리칼의 남자가 보였다. 변장 아이템도 착용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홍의윤이었다.
홍의윤도 이쪽을 발견하고는 잠깐 놀란 눈을 했다. 그는 권지한에게만 인사를 까딱하고는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힐끔 이쪽을 쳐다보는데 시선은 윤서에게 머물러 있었다.
“저 사람 임시 팀 홍의윤 맞죠? 무기 보러 왔나 봐요. 티켓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A급 헌터가 어떻게 구했지….”
수재희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윤서는 홍의윤의 건방진 얼굴을 보는 순간 서채윤 후보 중 여기 온 게 저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좋은 생각이 들어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냉큼 말했다.
“서채윤이라서 온 게 아닐까요? 던전에 두고 온 줄 알았던 자기 무기가 전시된다는 걸 알면 얼마나 궁금하겠습니까.”
“헉, 그런 생각은 못 했는데!”
수재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진짜 그런 거면 어쩌죠. 아, 홍의윤이 서채윤인 건 싫단 말이에요. 그냥 윤서 형이 서채윤이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