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54)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54)화(54/195)
#48
“…미안하지만 저는 서채윤이 아니기에. 주위를 좀 둘러보세요. 서채윤이 변장한 채 자기 이름이 들려서 귀를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심장 튀어나올 것 같네요. 허억허억.”
수재희가 눈알을 번들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각성자들이 눈을 찌푸리며 광인의 시선을 피했다.
윤서가 흡족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옆에서 권지한이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던전에 두고 온 줄 알았던’이라….”
“…….”
윤서는 움찔했다.
그, 그 정도 추측은 누구나 할 수 있지 않나? 윤서는 차마 뻔뻔하게 회색 눈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
전시 시간을 10여 분 남겨 두었을 때 VVIP 홀이 가득 찼다. 사람이 많아진 만큼 수군거림도 커졌다.
“저 사람들이 석영의 헌터들이라고?”
“응, 이미 석영에서 세 명 왔다고 소문 다 퍼졌어. 간파 스킬 써 봤는데 둘 다 튕겨 내 버리네.”
“그럼 홍의윤은 왜 따로 앉았어? 합병했잖아.”
“다른 데서 티켓을 받았나 보지. 그보다 저 키 큰 남자… 설마….”
“권지한 말하는 거면 아닐걸. 석영의 다른 S급들은 내일 보러 간다고 알렉이 SNS에 올렸어.”
“그렇구나. 그럼 저 키 큰 남자는 그냥 A급 헌터인가. 위압감 장난 아니다.”
“그 옆도 최소 A급은 될 것 같은데, 저 미인은 누굴까. 어, 간파 스킬도 먹히네. 시스템 프로필은 별거 없는데?”
“석영 간부겠지, 뭐.”
“간부치고는 어려 보이는데. …예쁘고.”
“그럼 석영 간부의 애지중지 막내 도련님이겠지. 저 고생이란 모르고 자란 것 같은 피부 좀 봐.”
모인 이들이 일반인이 아니기에 그들의 대화는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이가 들었다.
수재희는 약간은 뻘쭘해하면서도 익숙한 기색이었고, 권지한은 정체는 들키지 않아서인지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 모인 이들 중 가장 심하게 고생한 과거가 있지만, 고생이란 모르고 자란 것 같은 피부를 보유한 윤서는 의자째로 둘에게서 조금 더 거리를 벌리고 떨어졌다.
‘토마스 알프레드’가 스킬 <후드 속의 사내>를 사용합니다.
‘아이라일루’가 스킬 <간파>를 사용합니다.
여러 명의 간파 스킬 알림이 쏟아졌다. 윤서의 프로필이 보잘것없음을 확인한 그들은 비웃음을 던지고는 관심을 거뒀다. 나오는 얘기라고는 외모에 대한 감상뿐이었다.
전시 시간이 되자 나직하게 흐르던 음악이 멈췄다.
전체 조명이 꺼지고 중앙에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쳤다. 홀 왼편 입구에서 주최자인 듯한 중년인이 들어섰다.
“귀빈 여러분. 급한 초청에도 자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그의 뒤로 가드들이 검은 천으로 덮어 놓은 트레이를 끌고 따라왔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검은 천에 향했다. 모두 저것을 보기 위해 모였다. 사실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여기 모인 이들이었다.
윤서는 심장이 쿵, 쿵 뛰는 것을 느끼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가짜일까.
진짜일까.
“제가 평소엔 서두가 긴 편이지만 오늘만큼은 짧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리벤저 서채윤 헌터의 ‘존재하는 넋’입니다.”
중년인이 검은 천을 걷었다. 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투명한 돔 아래에 단검이 있었다.
대략 30cm 길이로 겉보기에는 날이 많이 상해 있었다. 검집은 없었고, 검자루에 박힌 보석은 희미하게 푸른 빛을 내뿜었다. 이 단검은 시골 헛간에서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특별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정도로 특유의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아….”
윤서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가드가 윤서를 경계했지만 윤서는 깨닫지 못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윤서 말고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헌터들이 몇몇 있어서 시선은 그에게 집중되지 않았다.
윤서는 제자리에서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존재하는 넋’이 맞았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윤서와 항상 함께 다녔던 것. 그때보다 검신이 많이 상해 보였고 푸른 빛도 줄어들었지만, 감정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넋이었다. 넋이 홀로 윤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존재하는 넋’이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존재하는 넋’이 당신에게 감응합니다.
지이잉.
윤서의 갈색 눈에 푸른 빛이 감돌았다. 동시에 단검 또한 칼자루의 보석에서 푸른 빛을 내뿜었다.
“어…?”
“왜 갑자기 빛이.”
“뭐야? 무슨 일이야?”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윤서는 얼른 손바닥으로 눈을 덮고 앉았다.
“형?”
수재희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냐는 질문에 윤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최대한 건조하게 대답했다.
‘존재하는 넋’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윤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넋이 저기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뒤로 물러나고만 있다니. 이 상황에서 모른 척해야 한다니.
대체 뭘 위해서 서채윤을 벗어던진 걸까?
넋이 여기 있는데.
정체를 숨기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야.
그냥.
서채윤이라는 걸 밝힐까?
이까짓 정체 따위 밝혀 버리고 넋을 되찾는 거야.
내가 서채윤이라고, 저건 나의 가족이라고….
“윤서.”
순간 들린 낮은 음성에 윤서는 팟, 하고 불이 켜지듯이 의식이 돌아왔다. 눈을 덮고 있던 윤서의 손목을 권지한이 붙잡고 있었다. 힘을 주지 않았는지 아프지는 않았다. 윤서는 심호흡을 하면서 권지한의 손을 뿌리치고 손을 내렸다. 그의 눈은 갈색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반대로 권지한의 회색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너 방금 저 단검이랑 감응을….”
콰아아앙!
그때 귀가 아플 정도의 커다란 폭음과 함께 으아아악, 비명 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스포트라이트마저도 꺼져 버려 장내는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어, 뭐야. 윤서 형, 괜찮아요? 제 옆으로 오세요.”
수재희가 윤서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S급 던전을 수십 번 공략한 그는 이 정도의 일로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윤서가 정말 S급이 아니라면 다칠 수도 있으니 보호해 주려고 했다.
“괴도로군.”
권지한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천장에 조명이 비쳤다. 웃고 있는 얼굴 그림자였다. 그 엠블럼을 알아본 사람들이 소리쳤다.
“괴도다. 하회탈 괴도야!”
“단검을 지켜!”
“서채윤의 무기를 보호하라!”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외쳐 대며 온갖 스킬을 사용했다. 장내에 빛이 돌아왔다. 윤서의 단검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지만 가드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몇몇 헌터들이 가드를 대신해 단검을 보호하듯 섰다.
괴도의 침입에 윤서는 <관측자의 검>을 사용해서 스킬 알림을 받았다. 그는 올라오는 로그들을 빠르게 훑었다.
‘하회탈이 이 사람이었어?’
그중 어떤 메시지를 보고 윤서는 짧게 탄식했다. 권지한이 나직이 말했다.
“서채윤의 무기를 노리는 자가 하회탈만 있는 게 아니야.”
‘야쿱루마우’가 스킬 <침묵의 함성>을 사용합니다.
당신에게는 효력이 없습니다.
권지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시지 알림이 올라오고, 검은 복면을 쓴 사람들이 천장을 부수며 쏟아져 들어왔다.
“하회탈한테 빼앗기면 안 돼! 서채윤의 무기는 우리 것이다!”
“우와아아!”
“전부 엎드려!”
복면인들은 동시 통역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윤서는 복면인들이 입은 옷의 독수리 그림을 보자마자 그들의 정체를 알았다. 희귀 아이템 사냥꾼 조직인 ‘더 헌트’. 아이템을 위해서 살인도 일삼는 악명 높은 국제단체였다.
“미친, A급 스킬이 다 잠겼어요. 저 사람 등급 뭐지.”
수재희가 윤서의 등을 한 팔로 덮으며 엎드렸다.
“‘더 헌트’의 수장인 야쿱루마우라면 S급 헌터입니다.”
“아, 어쩐지.”
헌터 몇 명이 A급 스킬을 사용하며 사냥꾼들에게 달려들었으나 스킬이 발동되지 않아 도리어 제압당했다. <침묵의 함성> 발동 전 실드를 두르고 들어온 사냥꾼들은 전혀 타격받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타격받지 않는 S급 스킬을 보유한 사람도 있었다.
‘홍의윤’이 스킬 <헬파이어>를 사용합니다.
“이 씨발 새끼들이 감히 서채윤 무기를 훔치려고 해?”
홍의윤이 S급 스킬을 사용하면서 온몸에 불을 휘감고 뛰어들었다. 윤서는 저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감히라니? 서채윤을 극도로 싫어했던 것 아니었나.
일단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홍의윤은 강도들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런 멍청한 놈이 있을 줄 알았지. 당장 엎드리지 않으면 이 민간인을 죽이겠다.”
사냥꾼 하나가 주최자 중년인을 결박하고는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댔기 때문이었다.
“비각성자를 건드리다니 그런 비겁한 짓거리를…!”
“너 이제 보니 헬파이어 홍의윤이로군. 스킬을 거두고 몸을 낮춰라. 그러지 않으면 이자는 즉살이다.”
“젠장!”
홍의윤이 침을 퉤 뱉고는 몸을 낮췄다. 불길도 사라졌다. 스킬이 묶인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윤서는 권지한이 사냥꾼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그 또한 의자를 밀어 내고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하회탈, 어디냐. 당장 모습을 드러내고 정정당당하게 결투하자!”
아직 하회탈의 문양이 천장에 비쳐 있으므로 사냥꾼은 서채윤의 단검을 가져가려면 하회탈과 싸워야 했다. 사냥꾼들이 허공에 스킬을 난사하며 하회탈을 찾는 동안 몸을 낮춘 윤서 일행은 속삭이며 상의했다.
“어떡하죠. <장산범>이나 고양이를 소환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칠 거예요. 비각성자들 저 주최자 아저씨 말고도 몇 명 있단 말이에요. 지한이 형, 방법 있어요?”
“난 아직 안 나서.”
“네?”
권지한이 미간을 좁히며 <명왕의 밤>을 사용했다. 이 공간에서 누가 어떤 스킬을 사용하는지 알 수 있는 스킬.
잠시 감지하던 그는 의외라는 눈으로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 표정을 보고 윤서는 그가 하회탈의 정체를 알았음을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