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55)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55)화(55/195)
#49
“하회탈 놈이 나오기 전까지는 난 가만히 있을 거야.”
“하지만 민간인이….”
“거기 닥쳐!”
사냥꾼 한명이 일행을 지목했다. 수재희가 사냥꾼을 노려봤다. 그의 눈에 사나운 기운이 일렁였다. 하룻강아지가 범에게 달려드는 꼴인데 그걸 봐주고 있어야 하는 게 싫은 것이다.
“그럼 윤서 형. 형이 실드 스킬로 민간인을 보호하면 제가 <장산범>을….”
“쉿.”
그를 말린 사람은 권지한이었다. 범도 하룻강아지로 만들어 버리는 괴물이 가만히 있으라니 수재희는 입을 다물고 대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일행이 조용해지자 사냥꾼은 그들에게서 흥미를 끊었다.
“나오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끌어내는 수밖에.”
사냥꾼의 리더가 음산하게 읊조렸다. 주최자의 목에 검날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주최자는 히익, 겁에 질린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붉은 피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미친 새끼야! 그 사람은 비각성자야!”
홍의윤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사냥꾼이 그를 발로 찼으나 사냥꾼만 뒤로 밀려났다.
“차라리 내 목을 그어. 왜, 각성자를 붙잡는 건 무섭냐? 비열한데 겁쟁이기까지 한 것들!”
홍의윤이 얻어맞으면서도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든 자기 쪽으로 주의를 돌리려는 것이었다. 윤서는 저 싸가지가 저렇게 정의로웠던가 싶어서 조금 놀랐다. 옆에 있던 수재희도 덩달아 감탄했다.
“용감한 형이네요. 해치가 좋아하겠다.”
홍의윤에게 형이랑 호칭이 붙었다.
홍의윤의 도발이 먹혔는지 사냥꾼 리더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양손에 푸른 불꽃을 휘감았다.
“정말 시끄러운 놈이군. 그렇게 원한다면 네 목부터 불태워 주도록 하지.”
홍의윤은 눈을 감지 않았다. 새빨간 눈으로 사냥꾼을 노려보는 모습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권지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지한’이 스킬 <먹이사슬>을 사용합니다.
당신에게는 효력이 없습니다.
하회탈을 기다리고 있던 권지한이 민간인의 위험을 두고 보지 못하고 결국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여차하면 <보호하는 베일>을 사용할 생각이었던 윤서는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먹이사슬>은 분명 A급 스킬이었는데 <침묵의 함성>으로 A급 이하 스킬이 다 잠긴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쯤 되면 상관없었다.
권지한이니까.
히익, 흐이이익, 흐억….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먹이사슬의 가장 위에 위치한 사람을 발견한 이들은 제대로 숨도 쉬지도 못하고 덜덜 떨었다. 그것은 사냥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푸른 불꽃을 휘감고 있던 리더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스킬은 저절로 사라졌다. 먹이사슬 최상위 맹수 앞에서는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누구도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다.
“서채윤도 끌어내지 못하고, 괴도도 끌어내지 못하고…. 무력한 것들이 시끄럽기만 하네.”
권지한이 나직이 말하며 도적단에게 다가갔다. 그는 무릎 꿇은 홍의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적을 노려보던 홍의윤도 이번만큼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적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온몸이 덜덜 떨렸다.
“고개 들어.”
“……!”
바짝 엎드리고 있던 사냥꾼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서 고개를 든 이는 사냥꾼들과 윤서 말고는 없었다.
‘권지한’이 스킬 <포식자>를 사용합니다.
권지한이 사냥꾼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새어 나오더니 사냥꾼들의 몸을 휘감았다. 겁에 질린 사냥꾼들은 한순간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실 떨어진 인형처럼 투둑, 툭 바닥에 쓰러졌다.
사냥꾼의 리더이자 S급 각성자인 야쿱루마우도 마찬가지였다. S급이라는 등급이 무색할 만큼 허무하게 엎어졌다.
주최자는 피가 방울방울 맺힌 목을 손바닥으로 감싸고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장내의 비각성자들은 이제 호흡이 가빠 오고 있었다. 권지한은 잠시 천장의 하회탈 그림자를 올려다보다가 마뜩잖다는 얼굴로 스킬을 거뒀다.
“하아….”
“흐어억.”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몰아쉬었다. 수재희도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가 윤서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얼굴을 했다.
“형, 어떻게 얼굴을 들고 있었어요?”
“아닙니다. 방금 들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어떻게 땀 하나 안 흘리고 안색도 변함없이….”
팟, 그 순간 그때까지도 천장에 있던 하회탈 그림자가 사라지고 장내가 다시 어두워졌다. 윤서는 하회탈이 스킬 <동지섣달>을 사용했다는 알림과 당신에게는 효력이 없다는 알림을 받았다.
“이건 또 뭔데….”
놀란 얼굴의 수재희에게 윤서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라니요. 각성 등급이 5분이나 한 단계 낮아졌다잖아요. 하회탈 놈, 사냥꾼 해치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겁하게.”
S급은 A급, A급은 B급이 되었다는 소리였다. 윤서가 <인류 도감>으로 권지한의 프로필을 읽어 보니 정말로 A급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재미없게도 ‘이번만큼은 권지한도 방어하지 못한 모양이군’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다시 S급으로 회복되었다.
서채윤의 단검을 등 뒤로한 채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은 권지한의 앞에 드디어 괴도가 나타났다.
하얀 저고리와 바지 위에 기장이 긴 검은색 답호를 걸치고, 웃는 모양의 하회탈을 쓴 남자였다. 답호와 하회탈, 허리끈, 허리끈에 매달린 술 전부 아이템이었다.
저 독특한 차림새 탓에 처음엔 애국 괴도라고 불리다가 나중엔 하회탈 괴도로 이름 붙은 그는 사냥꾼들처럼 아이템을 훔치고, 그 아이템을 암시장에 판매한 뒤 수익금을 불우이웃에게 나눠 주는 정의로운 도둑이었다.
권지한은 여전히 먹이사슬의 가장 위에 있는 포식자처럼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의 단검을 훔쳐다가 어떤 나쁜 놈한테 팔아 버리려고?”
“…….”
“아니면 네 것이라 가져가려는 건가….”
권지한이 진심은 전혀 섞이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하회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윤서는 괴도가 S급 실드를 두르고 있음을 알았다. 물론 권지한의 눈에도 보였을 터였다.
“난 이 사냥꾼들 같은 나쁜 놈들이 아니면 나보다 약한 것들하고는 싸우고 싶지 않아. 단검은 포기하고 이만 돌아가지 그래?”
배려한다기에는 참으로 오만한 발언이었다.
하회탈이 허공에서 기다란 검을 꺼냈다. 검신 전체가 은은하게 빛나고 검자루에는 금색 문양이 박힌 아름다운 검이었다. 검을 든 하회탈이 다리를 벌리고 몸을 낮추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권지한은 시큰둥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하회탈이 먼저 공격해 들어갔다. 권지한은 검을 가볍게 피하고 발로 하회탈의 손목을 차려 했는데, 하회탈이 몸을 뒤로 물렸다. 곧바로 하회탈은 또 다른 스킬을 사용했다. 날카로운 바람이 권지한의 몸을 휘감자 권지한은 <타락한 영웅의 날개>로 떨쳐 냈다. 그 틈을 타 하회탈이 민첩하게 검을 뻗었고 권지한은 높게 도약해서 검을 피한 뒤 하회탈의 등 뒤로 착지하면서 그의 등을 발로 세게 찼다.
그동안 권지한은 내내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난 안 나쁘고 약한 사람이랑은 안 싸운다니까.”
수십 명의 시선을 받는 와중에도 권지한은 그 말을 반복했다. 그의 발밑에서는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모를 약자들의 몸뚱이들이 굴러다녔다.
발길질 한 번에 나뒹굴었던 괴도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검을 고쳐 쥐고 다시 달려들었다. 권지한이 정말 전력을 다했다면 그는 전신의 뼈가 부러져 일어나지 못했을 터였다.
‘자기가 해치인가. 선악을 가리게…. 어?’
윤서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헌터 쪽 뉴스에 귀가 밝지 않은 그도 ‘더 헌트’라는 조직을 알고 있었다. 조직의 우두머리는 아프리카계 S급 각성자로, 바로 저기 기절해 버린 남자였다. 범죄를 저지른 전적이 없어서 각성했겠지만, 강한 힘을 얻고 범죄자가 되어 버린 야쿱루마우. 공격보다는 은신과 구속 스킬 특화 S급이기 때문에 권지한에게 제압당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너무 쉬운 감이 있었다.
‘더 헌트’는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사냥꾼 조직이고, 각성자들이 득실득실한 곳에 무려 서채윤의 무기를 훔치겠다고 쳐들어왔는데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을까?
돔 안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 단검, 쓰러진 사냥꾼들, 권지한과 하회탈의 일방적인 대결과 그를 구경하는 이들을 찬찬히 둘러본 윤서가 아이템을 사용했다.
아이템 ‘낡은 양탄자’를 사용합니다.
횟수를 모두 소진해 사라집니다.
아이템 1개를 발견했습니다.
‘야쿱루마우’의 귀속 아이템 ‘킬 스위치’
남은 시간 00:00:08
“뭐?”
윤서는 놀란 나머지 소리를 내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그를 돌아봤다. 수재희가 형? 하고 불렀다.
‘야쿱루마우’의 귀속 아이템 ‘킬 스위치’
남은 시간 00:00:06
“이런, 미친. 권지한!”
‘야쿱루마우’의 귀속 아이템 ‘킬 스위치’
남은 시간 00:00:04
“사냥꾼, 폭탄!”
윤서가 크게 소리쳤다.
지루한 표정으로 결투하던 권지한은 윤서가 처음 ‘뭐?’라고 외쳤을 때 이미 하회탈의 목 뒤를 가격해서 쓰러뜨린 상태였다. 뒤이어 윤서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사냥꾼과 폭탄을 외쳤을 때 쓰러진 사냥꾼 리더에게서 자폭 아이템을 찾아냈으나 그때 시간은 이미 2초밖에 남지 않았다.
“하….”
권지한이 짧게 탄식했다. 윤서는 그 찰나에 권지한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봤다.
권지한은 망설이지 않고 자폭 아이템을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렸다.
‘권지한’이 스킬 <골든 타임>을 사용합니다.
권지한의 몸에 금빛이 감돌았다. 방어력, 회복력을 포함한 능력치가 대폭 향상했으나 그뿐이었다. 그의 품 안에 있는 폭탄이 터지면 죽지는 않더라도 심각한 부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폭탄을 내던지는 게 아니라 품에 끌어안았다. 이 짧은 사이에, 아무 망설임 없이.
‘엄청 의외죠? 저도 처음엔 경악했는데, 이젠 납득해요. 지한이 형 착하거든요. 싸움광인 것만 빼면 좋은 사람이에요.’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지킬 책임이 있어. 강하게 태어났으면 약자를 보호하고 지키며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이끌어야 해. 너무 당연하잖아.’
시간이 1초 남았을 때 윤서는 며칠 전의 말을 떠올리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해치의 눈은 정확하다. 가이아 시스템도 오류는 없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권지한은 선한 사람이 맞다.
윤서는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걸 싫어했다. 그건 정말 지긋지긋했다.
스킬 <세이프존>을 사용합니다.
투명하고 따사로운 빛이 권지한을 감쌌다. 그 빛은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 널리 퍼져 나갔다.
윤서의 갈색 눈에 선명한 푸른 빛이 감돌았다.
내 눈앞에서는 그 어떤 착한 사람도 억울하게 희생하지 못해.
다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