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6)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6)화(6/195)
#05
석영 길드는 12년 전 아포칼립스 시기에 ‘이석영’이라는 대한민국 각성자가 세운 세계 최초의 길드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의 무기가 통하지 않는 괴물이 쏟아져 나왔고, 사람들의 눈앞에는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이 반투명한 창은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가이아 시스템’
지금이야 ‘가이아 시스템’이란 게 스킬, 아이템, 스탯 등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관리하는 하나의 거대한 체계, 혹은 관리자라는 걸 알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런 걸 파악할 여력이 없었다.
도시고 자연이고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파괴된 세상, 생존이 급선무가 된 세계에서 석영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범한 길드는 앞장서서 괴물을 처치했고, 민간인을 보호했으며, 시스템 창 활용법을 정리해 세상과 공유했다.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능력자를 ‘각성자’라고 명명한 이도 석영 초대 길드장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갈 때, 대한민국이 비교적 빠르게 안전한 사회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전적으로 석영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대격변 초기부터 자리 잡은 석영 길드는 현재 누구나 세계 1위로 꼽는 대형 길드가 되었다. 한국에 본사가 있고, 미국에 지부 두 곳, 유럽에 한 곳, 러시아 동부에 한 곳을 두고 있으며, 소속 각성자만 전 세계에 천 명이 넘었다.
사실상 경쟁 상대 없이 12년간 1위를 독점하고 있는 석영은 명실상부 세상 모든 각성자가 입사하고 싶어 하는 곳으로, 아시아 쪽에 두 글자 길드명이 10년째 유행하는 것도 석영의 영향이었다. 낙엽 길드장 기상혁도 석영을 동경해서 ‘낙엽’이라는 두 글자로 이름 지은 것이었다.
“석영이라니, 세상에…. 하회탈 괴도한테 불우한 우리 길드 좀 도와 달라고 빌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게 됐네요.”
“크하하, 우린 이제 부자야. 괴도가 우리 거 빼앗을 판이 됐어.”
“유예 기간은 왜 있는지 모르겠어요. 우린 마음의 준비 다 했는데.”
“저쪽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어? 우리 같은 약소 길드와 합병한다고 하니 얼마나 기분이 안 좋겠냐.”
“하긴 그런가. 석영에는 S급도 다섯 명이나 있다고 했죠?”
“응, 한국인 두 명에 외국인 세 명.”
특히 석영의 특별한 점은 S급 헌터를 다섯 명이나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S급 헌터는 전 세계를 통틀어 열일곱 명 남짓밖에 없고, 이 중 전투 불가능한 생존 리벤저 라 비지나와 잠적 중인 서채윤을 제외하면 열다섯 명에 불과하다. 게다가 보통 S급은 지시받는 걸 싫어해서 자신만의 길드를 만들어 떠나는 자가 많기 때문에 둘 이상을 보유한 곳도 흔치 않은데, 석영은 어떤 수를 쓴 건지 다섯 명을 길드에 잡아 둔 것이다. 어지간한 유혹에는 넘어가지 않을 S급 헌터를 어떻게 다섯이나 영입했는지는 윤서도 꽤 궁금했다.
“돈을 엄청나게 줬겠죠? 막 연봉이 백억이라거나.”
“희원 씨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네. S급 정도면 백억이 아니라 천억은 될걸.”
“개오바예요. 천억이라니.”
고희원이 코웃음을 쳤다. 워낙 현실감 없는 액수에 농담이라고 여긴 것이다.
“진짜야. S급 헌터는 부르는 게 값이래. 어떤 액수든 우리와 계약만 해 주십쇼, 하고 백지 내민다잖아.”
“그렇기야 하겠지만 천억은 오버라고요. 우리 길드 연 매출액이 이십억밖에 안 되는데.”
“우리 길드랑 비교하지 마. 맘 아프잖아.”
“참 신기해요. 어떻게 우리 같은 약소 길드, 그것도 자원봉사나 하고 다닌다고 비웃음만 당하는 곳과 합병할 생각을 했지. 석영으로 치면 그냥 기부나 다름없잖아요.”
고희원의 표현은 신랄했지만 사실이었다. 유난히 사람 좋은 각성자들만 모인 낙엽 길드는 헐값에 던전 공략 의뢰를 받거나, 빈민가에 실드 트랩을 기부한다거나, 복지 단체에 던전 부산물을 저렴하게 넘기는 등 남들이 호구라고 부를 만한 일을 많이 했다. 그 때문에 레인보우 같은 민간인 등골 빼먹으며 부를 부풀리는 길드의 길드원들은 마주칠 때마다 비웃음을 던지고는 했다.
“사실 이건 아직 기사로는 안 나온 얘기인데.”
박영범이 근처를 휙휙 둘러봤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쪽방촌이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대민 지원 팀은 낙엽 길드의 주요 활동인 호구 활동을 하기 위해 쪽방촌으로 왔다. 지방 자치 단체의 의뢰를 받아 실드 트랩을 설치하는 일인데, 의뢰비가 터무니없이 적어서 봉사 활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는 것도 윤서의 능력 덕분이었다. 마치 실드 트랩 설치 장인처럼 빠르고 깔끔하게 설치를 해내 가는 윤서 덕분에, 단 세 명만으로도 한 동네의 실드 트랩 설치를 하루 만에 끝낼 수 있었다. 방금 윤서가 작업한 이 구역이 오늘의 마지막이었다.
“석영에서 우리 말고도 여섯 곳에 합병 제안을 했대.”
근처에는 박영범과 고희원, 그리고 윤서 외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네? 여섯 곳이나요?”
“쉿, 조용히.”
“근처에 바퀴벌레 말고는 없어요.”
“헌터가 바퀴벌레로 변한 거면 어떡해.”
“에이, 설마.”
“아무튼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를 포함해 소형 길드들 여섯 곳이랑 한꺼번에 합병한다더라고. 다다음 주 합병식에 모인 인원만 이백 명이 넘을 테니까 마음의 준비 해 놔.”
“이백 명이요? 소형 길드면 인원수가 최대 스무 명일 테고, 총 일곱 길드라면서요.”
“응.”
“팀장님, 곱셈 다시 배우셔야겠네요.”
“왜? 7 곱하기 20…. 210명 맞잖아.”
고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하는 시늉도 하지 않고 수다만 떨던 두 사람 옆에서 성실하게 트랩을 손보던 윤서가 손을 탁, 탁 털었다. 두 사람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앗, 윤서 씨. 다했어?”
“마력만 불어 넣으면 돼요.”
“그건 우리가 할게. 윤서 씨는 이제 쉬어.”
“오빠, 수고했어요. 역시 우리 길드 내근직 에이스.”
“전 이번 주에 길드 사무실 간 적 두 번밖에 없는데 내근직입니까?”
“우리 행성 출퇴근은 내근직, 외계 행성 출퇴근은 외근직이죠. 참고로 외근직 에이스는 수빈 오빠예요.”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 대답에 윤서가 피식 웃었다.
던전 안이 다른 은하라는 사실은 3년 전 밝혀졌다. 대격변 때부터 던전 안의 공간은 평행 우주다, 시뮬레이션 이차원이다, 상위 존재가 꾸며 놓은 놀이터다 등 여러 주장이 있었는데 3년 전 외계 행성이라는 과학적 증거가 나왔다. 그것도 지구와 퍽 가까운 거리에 있는 행성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되기 이전엔 항상 외계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행성으로 언급되던 프록시마 센타우리계의 한 행성, 프록시마 b.
그 사실이 알려지고 외계인과의 조우를 꿈꾸는 이들이 늘어났다. 사실 던전 안의 괴물들도 생명체이니 이미 외계 생명체와는 마주한 셈이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외계 생명체는 그런 몬스터나 가이아 시스템에 존재하는 가호신들 같은 종류가 아니었다. 지적 능력이 있고, 소통이 가능하며, 인류와 비슷한 모습을 한 외계인.
과거에야 외계인과의 조우를 꿈꾼다고 하면 음모론자 취급이나 당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외계인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음모론자 취급을 당했다. 윤서도 외계인과의 만남은 시간 문제라고 여기고 있었다.
두 사람이 수다 떠는 동안 혼자 일한 윤서는 마무리 업무를 둘에게 넘기고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이라 차는 먼 곳에 대 놨고, 마땅히 앉을 곳도 없어서 담벼락이 만들어 낸 작은 그늘에 쭈그려 앉았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헌터 양반, 여기 와서 쉬어.”
돌아보니 녹슨 철문 안쪽에서 러닝셔츠 차림의 할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손짓하고 있었다.
“여기 사는 분이세요?”
“이 집 주인. 뭐 설치하러 온 낙엽인가 나뭇잎인가 하는 길드지?”
“실드 트랩 설치하러 온 낙엽 길드 대민 지원 팀입니다.”
“그려, 나뭇잎. 얼른 들어와. 시원한 물도 줄게. 어려 보이는데 고생하네.”
“감사합니다.”
윤서가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옆에 앉아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윤서를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가까이서 보니 잘생긴 청년이었구만. 아직 학생처럼 보이는데 신입이야?”
“신입 아닙니다.”
“신입 맞잖아. 저치들이 일은 다 그쪽한테 떠넘기고 노가리 까는 거 다 봤어. 하여튼 텃세 부리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어.”
노인이 혀를 찼다. 엄밀히 말하자면 박영범과 고희원이 윤서에게 떠넘겼다기보다는, 윤서가 하는 게 가장 정밀해서 믿고 맡긴 것이었지만 윤서는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식사라도 하고 갈 텨? 저치들은 놔두고.”
“마음만 받겠습니다.”
“오늘은 고마우이. 돈도 안 되는데 땡볕에서 일하느라 수고했어.”
“돈 많이 받았어요.”
“에잉, 얼마나 줬을지 뻔하지. 사실 여기 방어막인가 보호막인가 설치하는 일로 몇 년 전부터 골머리 썩었어. 우리는 낼 돈이 없지, 지역구에서도 우리한테 돈을 많이 쓰기는 싫은데 정부 명령으로 설치는 해야겠고. 여기저기 길드에 연락 넣어 봤는데 단가가 안 맞아서 어영부영 이때까지 왔지. 그러다가 작년에… 레인보우 알지?”
“네, 레인보우 길드요.”
“레인보우에서 온 동네에 해 줬단 말여. 저쪽 도로 하나 건너서 있는 높은 빌딩들 해 주면서 우리도 해 준 거지. 레인보우, 얼마나 유명한 곳이야. 다들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절하고 난리 부르스를 췄는데. 한 달 전 폭발 사건 때 방어막이 홀라당 깨져 버린 거여. 분명 B급 방어 수준으로 계약했는데 고작 C급 던전 폭발에 온 동네가 쑥대밭이 돼 버렸어. 아주 대충 해 놓고 간 거지, 씨부럴. 그 탓에 셋이나 죽었어. 레인보우에서 복구 스킬 헌터를 보내서 건물 복원은 했지만 그럼 뭘 혀. 사람은 죽고 없는데. 어떤 아줌마 한 명은 오십둘로 이제 돈 모아서 쪽방촌 떠난다고 했었는데. 지붕에 깔려서 죽어 버렸어.”
노인은 아직도 열불 터진다면서 가슴을 두들겼다. 윤서는 짐작이 갔다. 비각성자는 실드 트랩 등급이 어느 정도인지 알 길이 없으며, 설령 트랩 등급을 알더라도 정말로 강도가 계약된 수준일지는 활성화가 되어야만 안다. 이 부분 때문에 실드 트랩으로 사기 치는 길드가 한둘이 아니었다. 실드 트랩을 최초로 구상했던 사람도 우려했던 상황이지만 해결법이 없었다.
“대격변에도 살아남았는데 이 평화로운 시대에 어이없이 죽어 버렸어. 장례도 못 치렀어. 우리가 치를 돈이 있겠냐고. 그 씨부럴 것들은 복원해 줬다는 핑계 대면서 보상금도 안 주고….”
“보상금을 주면 자기네들이 실드 트랩을 허술하게 설치했다는 걸 인정하는 게 되니까 절대 안 주겠죠. 살펴보러 오기는 했습니까?”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윤서는 이제 냉수가 필요한 이는 노인인 것 같아서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건넸다. 노인은 고개를 젓고는 축 처진 눈꺼풀을 한껏 들어 올리며 윤서를 노려봤다.
“나뭇잎 길드는 그딴 짓 안 할 거라 믿겠어.”
“낙엽 길드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죽는 건 상관없어. 살 만큼 살았으니까. 하지만 그 아줌마처럼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이 죽는 건 안 돼. 그건 너무 억울하잖어. 이제 드디어 쪽방촌 떠난다고 부풀어 있었는데 너무 허무하게 죽었어. 나는 괜찮아. 이런 늙은이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 아줌마는 죽으면 안 됐던 거야.”
노인의 한탄이 허공에 흩어졌다. 윤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을 바라봤다.
“아니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죽으면 안 돼요.”
부드러움과 단호함이 공존하는 말투였다. 윤서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세상에 살 만큼 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어도 되는 나이는 없어요. 그게 몇 살이라 하더라도.”
“…….”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서는 물 잘 마셨다고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