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60)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60)화(60/195)
#54
“우리 던전 분석 팀의 연구에 따르면 첫 진입 장소가 허공이니 진입하실 때 추락을 주의하셔야겠습니다.”
‘진입 장소까지 알 수 있구나.’
윤서는 던전 브리핑을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형식상인 줄만 알았다. 던전이란 건 들어가기 전에는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어떤 지형일지 전혀 예측 불가능한데 그걸 어떻게 브리핑한다는 것인가. 얼마나 허황된 말을 늘어놓을지 궁금했는데 막상 들어 보니 생각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이었다.
던전 부산물과 인류의 과학 기술로 만든 파동 분석 아이템으로 포탈의 파동을 분석해 진입 지형을 파악하고, 아직 파악이 불가능한 부분은 신들과 소통 가능한 예언자들의 계시로 최대한 알아낸다.
‘10년이 아니라 100년이 지난 것 같네.’
인류가 살겠다고 아등바등 노력해서 이뤄 낸 발전이었다.
“낙하지점에는 용암이 흐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용암의 두께는 5m에 달할 것으로 추측되며, 정확한 면적은 모르나 어쩌면 던전 전체가 용암을 뒤덮여 있을지도 모르니 비행 아이템을 필참하시길 바랍니다.”
입체 영상 속 던전은 보기만 해도 살갗이 타는 것 같은 붉은 용암이 대지 위에 가득해서 발 디딜 곳이 없어 보였다.
“던전 규모가 한반도 크기만 하여 상당히 넓습니다. 땅 위에는 용암이 흐르고 대기는 구성물질의 90%가 이산화탄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산화황, 황화수소 등 유해 혼합물이 가득할 것으로 추측되니 진입하실 때 실드를 3중첩 이상으로 켜 놓으시길 권합니다.”
매니저가 윤서의 뒤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원정대의 실드 담당은 총 세 명으로 1팀의 윤서와 2팀의 A급 헌터 두 명이었다.
“이번 던전의 필수 부산물은 이 광물입니다.”
매니저가 다른 영상을 띄웠다. 붉은색 용암이 그대로 굳은 것 같은 광석이었다.
“용암 지대에 크고 작은 용암석이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클수록 좋으나 주먹만 한 것이라도 한 개가 화력 발전소 하나 이상의 화력을 지녔으니 할 수 있는 한 많은 확보 부탁드립니다. 자연 파괴 없이 에너지를 조달할 수 있어 반드시 획득해야 하는 부산물입니다. 그 외 몬스터 뼈와 가죽, 약초, 희귀 암석 등의 부산물도 많을수록 좋습니다. 길드 아공간 세 번째 탭을 공략 날 전까지 비워 놓겠습니다.”
“부산물 수집 팀도 동반합니까?”
“S급 옐로우인 점을 감안하여 이번에는 동반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예.”
2팀 팀장은 차라리 그게 낫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바깥에서 띠릭,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모인 이들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브리핑 시작 한참이 지나서야 도착한 권지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느릿느릿 들어오다가 윤서를 발견하자 잠에서 깬 듯 생기발랄한 얼굴이 되었다.
권지한이 자리에 앉은 후 매니저가 다시 설명을 이어 갔다. 윤서는 생애 첫 브리핑을 한창 흥미롭게 듣던 중이었는데 권지한이 오고 난 후로는 노골적으로 내다 꽂히는 시선 때문에 전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열렬하고도 뜨거운 시선이었다. 정말 달갑지 않았다.
***
“형, 토요일엔 잘 들어갔어?”
“…….”
“…….”
들려서는 안 되는 호칭에 브리핑이 끝나고 나가려던 사람들이 빙결 스킬에 걸리기라도 한 듯 얼어붙었다.
‘뭐, 뭐라고?’
‘방금 권지한 목소리였잖아?’
‘형? 지금 권지한이 형이라고 했어?’
‘대체 누구한테?’
권지한이 형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사람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알아 온 유준철과 부길드장인 도등수밖에 없는데, 도등수는 자리에 없으며 유준철은 매니저와 함께 회의실을 나서고 있었다. 그렇다면 권지한의 ‘형’은 누구를 향한 것이란 말인가.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권지한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향했다. 검은 머리에 갈색 눈, 어려 보이면서도 곱상한 얼굴. 눈빛에는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냐’라고 쓰여 있었다.
“윤서 형.”
권지한이 빙긋 웃으며 확인 사살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둘의 대치를 봤다. 회의실을 나서던 유준철마저 눈을 휘둥그레 그 자리에 멈춰서 둘을 보고 있었다. 이런 흥미로운 상황에서도 회의실을 나간 이는 요즘 권지한에게서 결투장을 받고 있는 리오 델리와 그의 연인, 그리고 만사가 심란할 화심 셋뿐이었다.
“권지한 헌터. 제가 왜 그쪽 형입니까?”
윤서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물었다.
“날 구해 줬으니까 형이라고 불러야지. 형 아니었으면 지금도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었을 거야.”
“토요일 얘기라면 제가 아니라 서채윤 헌터에게 고마워하시죠. 전 서채윤이 아니라 그 정도의 실드는 펼치지 못합니다.”
“응? 실드 말한 거 아닌데.”
윤서가 정색하자 권지한이 씨익 웃었다. 사나웠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도망가는 게 아니라 내 이름을 열렬히 외치면서 사냥꾼이 자폭 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려 줬잖아.”
“열렬한 적 없었습니다만.”
“완전 열렬하고 절박했어. 들은 사람이 수십 명인데 이제 와서 아닌 척하지 마.”
“들은 사람이 수십 명인데 열렬했던 것처럼 매도하지 마시죠.”
윤서가 튕겨 냈으나 권지한은 느긋하게 웃더니 윤서 뒤쪽의 남자에게 턱짓했다.
“수재희.”
“넵?”
수재희가 허리에 팔을 바짝 붙이며 대답했다.
“윤서 형 존나 열렬하게 내 이름 불렀지?”
“존나 열렬했습니다. 연인인 줄 알았습니다!”
권지한이 그것 보라며 눈썹을 으쓱했다. 윤서는 어이가 없어졌고 한편으로는 지금 이 순간부터 수재희를 적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그런데 형, S급인 나도 폭탄의 존재를 몰랐었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누구처럼 사냥꾼을 만만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입니다. 헌터가 널린 곳에 쳐들어올 정도면 당연히 비장의 수가 있을 거라 생각했죠.”
“형한테 S급 아이템 감지 스킬이 있는 거라면 S급 이상일 테고. 아, 스킬이 아니라 감지 아이템일 수도 있겠네. 형은 알려지지 않은 아이템도 갖고 있으니까.”
“단지 추리였을 뿐인데 높이 평가해 줘서 고맙네요. 그리고 형이라고 하지 마시죠.”
“언제는 왜 말 낮추느냐더니, 이젠 또 형이라고 하는 게 싫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해.”
“그냥 절 부르지 않았으면 합니다.”
“서운하게 이러지 마. 나도 은원을 아는 사람이야. 목숨을 구해 준 사람한테는 형이라고 하면서 깍듯하고 정중하게 대한다고. 한 번 더 날 구해 주면 다음번엔 존댓말도 써 줄 의향 있어.”
권지한이 ‘세상에서 가장 시건방진 표정으로’라는 지문을 받은 연기자처럼 시건방지게 입꼬리를 올렸다.
“브리핑도 끝났는데 형은 이제 뭐 할 거야? 할 일 없으면 나랑 같이 갈래? 오늘 외국 S급이랑 비밀리에 하기로 했거든.”
비밀리에 대련하기로 했다지만 아직도 이 회의실에는 스무 명 넘는 인원이 그들의 대화를 경청 중이었다.
“형이 원하면 나랑 S급이 하는 거 옆에서 직관하게 해 줄게.”
내가 뭐하러 남들 대련하는 걸 봐야 한단 말인가.
윤서가 아니꼽게 인상을 찌푸리는데 옆에서 흐읍, 하고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출처는 수재희였다. 수재희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권지한을 쳐다봤다. 왜인지 배신감에 젖은 표정이었다.
“관심 없습니다. 곧장 집에 갈 겁니다.”
“왜? 혹시 질투하는 거라면 난 셋이서 해도 상관없어.”
히익.
“셋이든 넷이든 그쪽 하는 거 보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하네. 나는 형이 여러 명이랑 하는 거 엄청 보고 싶은데.”
허억.
“변태입니까? 그게 왜 보고 싶어요.”
“변태라니. 불구경이랑 그거 구경은 사람의 본능인 거 몰라? 아, 그러고 보니까 어차피 며칠 있으면 나도 보게 되겠구나. 형이 아무리 피해도 던전 들어가면 몬스터들이랑 하게 되겠지.”
흐익.
“왜 절 끌어들입니까? 신나서 몬스터들과 나뒹구는 건 그쪽이겠죠.”
“괜히 빼지 말고 같이 하자. 막상 하다 보면 형도 신날걸?”
흐엑.
“…….”
“…….”
권지한과 윤서가 동시에 수재희를 쳐다봤다. 옆에서 자꾸 이상한 추임새를 넣어 대화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새파래진 얼굴의 수재희는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다.
“어… 어른들은… 더러워!”
배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외친 그가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
윤서는 황당하고 어이도 없어서 눈을 깜박였다. 어이없는 게 그만이 아니었던지 주위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재희가 왜 저러지?”
“몰라요. 사춘기인가.”
순수한 어른들은 수재희가 어떤 오해를 했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권지한은 아는지 모르는지 낮게 쿡쿡, 하며 웃을 뿐이었다.
둘의 대화가 멈춘 그 틈을 타 알렉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렸다.
“화심한테 건 내 돈의 절반을 윤서 헌터로 바꾸고 싶소만. 권지한에게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 당돌함을 칭찬해 주고 싶네.”
“앗, 나도요.”
“저도요. 용맹한 모습이 서채윤 님 후보에 오를 만하네요. 솔직히 서채윤스럽지는 않지만 칭찬의 의미에서 제 돈도 걸래요.”
윤서는 어이가 없었다. 칭찬해 주고 싶으면 본인한테 직접 돈을 줄 것이지….
“초반부가 지났으니 다시 판돈을 조율할 때가 됐지. 다들 모여 봐요. 재분배합시다.”
유준철이 서채윤 내기 참여자들을 이끌고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자 이제 회의실에는 권지한과 윤서, 박수빈, 홍의윤이 남았다.
“흥, 나도 수련이나 하러 가야겠다.”
홍의윤이 새침하게 말하며 주섬주섬 필기도구를 챙겼다. 헌터들 중 유일하게 노트와 펜을 챙겨 온 그는 브리핑을 듣는 동안 열심히 필기했다. 오늘 브리핑 자료는 U패드로 고스란히 전송되었는데도…. 말투만 험악하지 참으로 모범적인 헌터였다.
“아, 훈련해야지, 훈련. 훈련을 해야.”
홍의윤은 몇 번이나 거듭해서 말하더니 윤서의 앞에서 꾸물거렸다. 윤서에게 뭔가 할 말이 많은데 권지한과 대화 중이었던 터라 섣불리 끼어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