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61)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61)화(61/195)
#55
“홍의윤 헌터. 윤서 씨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윤서는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박수빈이 오지랖 넓게 물었다. 홍의윤은 괜히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아니, 할 말은 딱히 없고. 흠흠, 야, 윤서. 나는 수련하러 갈 건데 너는 이제 뭐 하게?”
“집에 갈 겁니다.”
“뭐?”
“집에 간다고요.”
“S급 옐로우 던전 공략을 사흘 앞둔 지금 집에서 노닥거리겠다는 거야?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훈련이나 하지? 내 <메테오>를 <보호하는 베일>로 방어해 볼 기회를 줄게. 막아 낼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안 해 봐도 압니다.”
“어?”
“안 해 봐도 안다고 말했습니다.”
“아, 그야 물론 내 걸 네깟 게 어떻게 막겠냐만 그래도 시도라도 해 볼 기회를 준다는 거지.”
홍의윤이 거들먹거렸다. 그래도 권지한 앞이라고 건방짐 수치를 최대한 억누른 게 이 정도였다.
“아뇨, 안 합니다. 전 이제 집에 갈 거라서요.”
“뭐?”
“오늘따라 굉장히 많이 되묻네요. 홍의윤 헌터, 문맥 파악이 어려워지는 저주 스킬에라도 당했습니까?”
“어?”
“…….”
홍의윤이 얼굴이 점차 빨개졌다.
“…아니거든! 멀쩡하거든! 씨발, 무려 내가 같이 훈련해 주겠다는데도 건방지게 굴고 있어. 너랑은 다시는 훈련 안 해. 무릎 꿇고 빌어도 절대 안 해 줄 거야!”
홍의윤이 빽 소리를 지르고는 발소리를 쿵쿵 내면서 회의실을 나갔다. 박수빈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저렇게 보내면 앞으로 더 시비를 걸어 올 텐데 괜찮겠어요, 윤서 씨?”
“오늘 받아 준다고 시비를 안 걸진 않을 테니까요.”
“하긴 그렇지만…. 정말 집에 가려고요?”
“네.”
“드라마 볼 거면 같이 봐요. 2팀 대기실에도 홈 시어터 있거든요.”
윤서가 회의실을 나서려 하자 박수빈이 유혹해 왔다. 윤서의 수많은 취미 중 가장 즐기는 취미가 드라마 보기라는 걸 알기에 할 수 있는 유혹이었다.
“드라마는 무슨 드라마야. 윤서 형, 나 싸우는 거나 구경해. 절대 후회 안 할걸. 피로가 싹 날아가는 속 시원한 장면 보여 줄게.”
권지한이 냉큼 끼어들었다. 박수빈이 권지한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권지한 헌터, 제가 먼저 윤서 씨 유혹하는 중이잖아요.”
“먼저는 내가 먼저였는데?”
“…….”
“형, 잘 생각해 봐. 내가 싸우는 모습 미리 봐 두면 예습도 할 수 있어. 이렇게 건방진 어린놈한테 본때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윤서는 겉으로는 반응하지 않았으나 속으론 코웃음을 쳤다. 퍽이나 예습이 되겠다. 권지한은 레벨 업을 하는 각성자이고 분명 윤서와의 싸움에서는 새로운 스킬을 선보일 게 분명했다.
“드라마도 안 보고, 싸움 구경도 안 해요. 그냥 집에 가서 쉴 겁니다. 그리고 권지한 헌터는 외국 S급과 싸우는 게 극비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게 사방팔방 알리고 다녀도 되는 겁니까?”
“외부에만 안 퍼지면 되니까. 설마 형이 소문 퍼뜨리겠어.”
권지한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윤서는 당장 헌터 커뮤니티에 글을 올릴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정말 구경 안 하려고?”
“안 합니다.”
“형 꼬시기 진짜 어렵다.”
“…….”
“오늘은 왜 그렇게 피곤해해? 크게 마력 소모할 일이라도 있었나 봐.”
권지한의 어투가 의미심장했다. 잿빛 눈은 지금 떠보는 중이라고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윤서는 <가이아의 대지> 사용으로 대량의 마력이 소모된 데다가 마력 회복량의 상당 부분을 햅쌀이에게 주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피곤했다. 총량의 20%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대던전에서 마력 고갈에 시달렸던 경험 때문에 마력 부족에도 내성 비슷한 게 생겨서 티는 안 났다고 생각했는데 권지한에게는 다 드러난 모양이었다.
“그쪽 만날 생각하니까 스트레스받아서 밤에 잠을 설쳤나 봅니다.”
“형, 스트레스랑 설렘을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왜요, 그쪽은 저 만나면 설레나 보죠?”
“응, 얼마나 강한 힘을 숨기고 있을지 너무 설레. 얼른 싸우고 싶다.”
“…….”
윤서가 패배를 인정하며 입을 다물었다.
“형이 진짜로 피곤해하니까 오늘은 이쯤에서 봐줄게. 공략 날은 오늘처럼 피곤해서 다 죽어 가지 말고 푹 자고 와. S급 노랑 던전이니 아무리 형이라도 긴장해야지.”
권지한이 능글맞게 말하고는 손을 흔들며 나갔다.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고 멀어지는 기척도 없었다. 윤서가 문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자 복도에는 회의실을 정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 몇 명만 보일 뿐 권지한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수빈 씨, 미안하지만 전 오늘은 이만 집에 가겠습니다.”
“아, 네. 네. 피곤하다면 가서 쉬어야죠.”
박수빈이 얼른 대답했다. 둘은 함께 회의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박수빈은 지하 수련장이 있는 지하 3층을, 윤서는 1층을 눌렀다.
“전 윤서 씨가 피곤한 줄 전혀 몰랐어요. 1년 넘게 지켜봤는데도 평상시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권지한 헌터는 바로 아네요….”
“1년 넘게 스토킹했다고 이제 대놓고 말하는 거예요?”
“제 눈치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뭐가 문제일까요…. 피곤하다는 얘기 듣고 봐도 윤서 씨는 평상시처럼 무심하고, 귀엽고, 심드렁하게만 보인단 말이죠.”
“중간에 무서운 말이 껴 있는데요.”
“윤서 씨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는 경각심이 드네요. 공략 날에 볼 때는 달라진 절 볼 수 있을 거예요. 기대하세요.”
“아, 네….”
박수빈도 공략 날, 달라진 윤서를 보게 될 터였다. 방금 박수빈을 더 피해야겠다는 경각심이 들었으니까.
***
권지한의 말이 맞다. 다른 곳도 아니고 S급 노랑 던전 공략을 앞두고 있으니 마력 소모는 최대한 줄이는 게 타당하다.
윤서는 브리핑 이후로 ‘존재하는 넋’의 마력 주입을 멈췄고, 던전 진입 날에는 90%까지 회복했다. 그러나 마력은 불어 넣지 않더라도 계속 안고는 있었다. ‘존재하는 넋’을 성장시키는 데에는 마력 주입이 가장 효과적이나, 마력을 주입하지 않고 품에 안고 있기만 해도 제 주인의 마력에 감응해서 아주 조금씩 성장하기 때문에 계속 인벤토리에서 꺼내 놓은 것이다.
‘던전에 들어가면 어떻게 품어야 하나….’
다른 이들이야 <거짓 기억>으로 만든 ‘왕 큰 새 알’의 상태 창을 보게 되겠지만 <가이아의 눈> 소유자는 까만 네모 박스가 적힌 상태 창을 볼 것이다.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태 창이니 일단 그 녀석의 앞에선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찹쌀아, 나 던전 갔다 올게. 이번엔 좀 오래 걸려.”
“얼마나 걸리세요?”
“최대 2주, 짧으면 일주일.”
“그럼 절전 모드는 안 할게요. 무사히 다녀오세요.”
“응, 햅쌀이한테도 인사해.”
“햅쌀아, 무사히 돌아와.”
AI가 꽤나 부드러운 목소리를 흉내 내며 인사했다. 찹쌀이는 다행히 햅쌀이에게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햅쌀이였다. 윤서에 대한 독점욕이 있는 녀석이라 알에서 깨어나면 찹쌀이에게 텃세를 부릴까 봐 걱정되었다. 시트를 발톱으로 긁거나 뜯어 놓으면 찹쌀이가 화를 낼 것이다.
던전 진입 시간은 저녁 8시고, 지금은 7시 50분. 윤서는 본래 정시 도착을 미덕으로 삼지만, 그간 몇 번의 경험으로 늦게 도착하면 이목이 집중된다는 걸 깨달았기에 이쯤 나가야 할 듯했다.
“잘 자고 있어.”
그는 햅쌀이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토닥여 준 뒤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번 던전은 퍼펙트의 첫 공식 레이드로, 외부에 대대적으로 알렸기 때문에 기자들이 많이 와 있었다. 윤서는 미리 준비해 둔 전파 방해 장치를 켜고, 눈만 겨우 내보이는 마스크도 착용했다. 차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석영 길드원이 얼른 다가와 길을 안내했다. 가는 길 양옆으로 늘어선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 냈다.
“퍼펙트 1팀 헌터이십니까?”
“헌터 네임과 등급을 말씀해 주십시오!”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아니, 늦었다니? 아직 10분이나 남았는데…. 윤서는 억울했지만 꾹 참았다.
촬영이 허용된 라인을 지나고 주위에 카메라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전파 방해 장치를 껐다. 마스크는 계속 낀 채였다.
이번 포탈도 역시나 산에 있었는데, 호명산보다는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야 했다.
포탈 근처에서는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산하게 준비 중이었다. 사망자가 더러 발생하는 S급 옐로우 던전인 만큼 레이드 헌터들와 가족들 외에도 석영 고위 관계자들, 협회와 정부 인사들도 여럿 보였다. 입구 근처의 나무들은 미리 베어 놓았는지 이 부근만 공터였고, 막사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다.
S급 정도 되는 던전은 보통 이렇게 입구에 베이스캠프를 만들어 놓는다. 소속 길드 의료진과 매니저, 헌터 협회 직원들과 기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헌터들이 클리어하고 나오면 먼저 의료진에게서 진찰을 받은 뒤 소속 길드와 협회 측에 던전 정보와 습득 부산물을 보고하고, 그다음엔 팀 매니저가 기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한다. 진입 날과 예상 클리어 날짜에만 사람이 바글바글한 공간이었다.
“늦으셨네요, 윤서 헌터.”
U패드를 보고 있던 매니저가 윤서를 발견하곤 달려왔다. 매니저의 손에는 뭔가가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렌즈 카메라입니까?”
“바디 캠을 목깃에 달 겁니다. 그 복장으로 들어가실 건가요?”
“네.”
윤서는 저번과 같은 옷을 입고 왔다.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보던 매니저가 윤서의 목깃에 카메라를 달았다.
“바로 출발해야 하니 아이템과 무기, 포션 점검하세요.”
“네.”
매니저가 떠나고 기다렸다는 듯이 홍의윤이 다가왔다. 오자마자 시비 거는 건가 했는데 근처에 권지한이 있어서인지 큰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빨리도 온다. 네가 제일 늦었어.”
“화심 헌터는요?”
“저기 와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