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64)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64)화(64/195)
#58
정말 복에 겨운 고민이 아닌가. 10년 전에는 던전 맵 따위가 없어서 수기로 그려서 다녔다. 여기가 한반도 크기라 했으니 대던전은 아메리카 대륙만 할 것이다. 이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은 곳에서 지도를 그리려 시도하는 헌터들도 몇몇 있었다. 그러나 전문가도 아닌 데다가 미로 지형에 들어서는 지도 제작 따위는 포기하고 막연하게 방황하기만 했다.
윤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다가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약을 두 알 삼키고 다시 약병을 상의 왼쪽 안주머니에 집어넣는 윤서를 박수빈이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윤서 씨는 어쩌다가… 약을 먹게 된 건가요?”
“대격변 때문이죠. 그날 이후로 약 먹는 사람 많잖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윤서 씨는 조금 자주 먹는 것 같아서. 오늘만 벌써 세 번째잖아요. 합하면 벌써 여섯 개인데 괜찮은 거예요?”
“괜찮습니다. 많이 가지고 왔어요. 수빈 씨는 약 안 먹어도 됩니까?”
“네, 저는….”
‘박수빈’이 스킬 <빛의 실드>를 사용합니다.
박수빈은 말을 하다 말고 몬스터에게 공격받는 헌터에게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고는 전투가 끝나면 이어서 대화하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윤서도 전투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화심에게. 아마 그 정의롭고 선한 영웅이신 권지한도 화심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겠지만.
***
‘아우, 씨. 다리는 무겁고, 화상 입은 데는 따갑고, 옷을 벗어도 더워서 미쳐 버리겠네.’
‘엄살떨지 마요, 김형태 씨. 어린애들이 저기서 마력 고갈로 쓰러져 있는데 어디서 불평이야.’
‘끄응. 뭔 말을 못 하게 해.’
대던전의 용암 지대. 그곳의 극악한 환경을 극복할 만한 스킬을 가진 이는 윤서 말고는 없었기에 윤서는 마치 소년 가장처럼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을 홀로 보호해야 했다.
윤서는 용암 지대에서는 마력 고갈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한 채 누워 있기 일쑤였고, 그의 옆에는 항상 그와 똑같이 빈사 상태 몰골의 이도민이 있었다.
윤서와 친구가 그렇게 쓰러져 있으면 리벤저들은 주위의 몬스터를 정리하면서 회복하기를 기다렸다. 이강진을 비롯해 특별히 친했던 이들은 둘의 주위로 둥글게 모여서 수다를 떨기도 했다.
‘우리 세계는 왜 이 모양일까요? 만화나 소설에서는 던전 브레이크 일어나면 막 인벤토리도 생기고, 포션도 생기고 살기 더 편해지던데 이놈의 세상은 그냥 멸망 직전이야.’
‘그러니 지금 시기를 아포칼립스라고 하지. 인벤토리 있고 포션 있는 세계면 그냥 현대 판타지라고 하지 않겠냐.’
‘강진 오빠는 너무 냉정해요.’
‘나는 현실을 직시하는 거야.’
‘그래도 효미 누나 소설 얘기 듣고 있으면 기분 좀 나아지지 않아요? 누나, 좀 더 얘기해 주세요. 인벤토리가 뭐예요?’
눈을 감은 채 치유를 받던 윤서의 친구가 묻자 효미가 깜짝 놀랐다.
‘아니, 무슨 스무 살이 인벤토리도 몰라. 채윤이랑 너는 게임도 안 했어?’
‘저희가 한 게임은 같은 거 세 개 붙여서 터뜨리는 핸드폰 게임뿐이라서.’
‘그럼 공부만 했니?’
‘저희는 미적분 들어갈 때 학업을 포기했어요.’
‘그럼 대체 한 게 뭐야?’
‘그러게요. 뭐 하고 지냈더라. 불과 2년 전인데 기억이 안 나네요.’
씁쓸한 말에 주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다들 2년 전의 평범한 일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제는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는 과거를….
이도민은 자기가 분위기에 물을 끼얹었다면서 효미에게 웹소설 이야기를 부탁했다.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는 효미가 두서없이 웹소설 속의 설정을 읊었다.
인벤토리라는 가상의 가방과 마시면 마력과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포션. 몬스터를 해치우면 경험치를 얻고 그 경험치로 체력이나 마력 수치를 높인다는 설정. 시스템 창으로 편하게 상위 존재의 후원 내용을 확인할 수 있고, 아이템 습득 시 알림이 떠서 어떤 성능인지를 알려 주며, 던전 진입 전 어떤 지형인지 어떤 몬스터가 등장하는지도 파악이 가능하다.
윤서 또한 자는 척하면서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얘기야.’
현실성 없는 공상이다. 너무 환상적이라서 오히려 현실을 절망하게 하는.
‘하지만….’
하지만 정말 이 현실도 그런 식이었다면.
정말 그런 세계였다면 많은 이가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그때 그 대화를 나누던 사람은 윤서를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윤서는 그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당신들이 얘기하던 미래가 정말 현실이 되었다고.
‘언젠간.’
언젠가 만나면 얘기하리라. 던전도 있고, 스킬도 있는 세상에 사후 세계가 없겠는가. 윤서는 남은 유언들을 모두 해치우면 그들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
일행은 전투를 세 차례 더 한 후에야 발을 디딜 수 있는 육지를 발견했다. 아니, 육지가 아니라 섬이었다. 사방이 용암으로 둘러싸인 축구장 크기의 분홍색 땅이었는데, 이미 하늘에서는 해가 진 지 오래라 그들은 이곳에서 밤을 묵기로 했다. 자리 잡고 있던 몬스터들을 깨끗이 처리한 후 힐러들이 유해 성분을 정화했다.
윤서는 이제 간이 텐트를 설치하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러 명이 아공간에서 캠핑카를 꺼냈다.
길드 아공간 사용 : -1,000,000
현재 길드 경험치 10,028,199,000
“S급 던전이라고 어마어마하게 삥 뜯어 가는구만. 가이아 진짜 치사해요.”
죽음의 신이 ‘수재희’의 발언에 동의합니다.
캠핑카 한 대당 백만 경험치로 총 여섯 대를 꺼내자 육백만 경험치가 사라졌다. 수재희가 툴툴거리자 죽음의 신이 얼른 동의했다.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캠핑카라니.’
윤서는 다소 허탈한 마음으로 캠핑카를 구경했다. 내부가 넓고 깔끔했으며 샤워실도 있었다. 심지어 온도 조절까지 가능해 안에 에어컨을 틀 수도 있었다.
입 안쪽 살을 깨문 채로 가만히 구경하던 윤서에게 권지한이 다가왔다.
“형은 나랑 같이 써.”
윤서가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싫은데요.”
“나랑 쓰는 게 더 편할걸? 나랑 쓰면 2인 캠핑카고 다른 사람이랑 쓰면 6인승 캠핑카야. 내 전용인데, 봐 봐. 엄청 크지.”
권지한이 가리키는 곳엔 6인승 캠핑카보다도 더 큰 고급형 캠핑카가 있었다. 캠핑카 외관을 쭉 둘러본 윤서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렇게 원한다면 사용해 주겠습니다.”
“응.”
권지한이 피식 웃었다. 윤서는 권지한 전용이라는 2인 캠핑카로 다가갔다. 내부는 거의 호텔 방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내부를 구경하는 동안 권지한은 계속 웃고 있었는데, 피식 하는 웃음소리까지 새어 나오자 윤서는 신경 쓰였다.
“왜 그렇게 웃어요? 절 비웃는 겁니까?”
“내가 형을 왜 비웃어.”
“그럼 왜 웃어요?”
“형, 정의로운 거 싫어한다더니 그것도 아닌가 봐.”
“뭐요?”
“자폭 폭탄 사건 이후로 벽이 확 낮아진 것 같아서. 내가 좋은 사람이다 싶으니까 이렇게 바로 마음의 문을 열어 버리네.”
“다시 벽 확 높여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아주 하늘 높이까지 벽을 쌓아 버릴 테다. 윤서는 쿵쿵 소리를 내며 욕실로 향했다.
“먼저 씻겠습니다.”
“그래.”
권지한이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서는 샤워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들어왔다.
사실 권지한의 말이 맞았다. 권지한에 대한 제 감정이 달라진 건 윤서 본인도 느끼고 있었다.
제 안의 권지한에게 ‘선한 사람’이라는 개념이 박혀 버린 게 짜증 났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인데. 그리고 윤서는 선인을 싫어할 만큼 인성이 못되어 처먹은 인간은 아니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멋있었다.
주저 없이 폭탄을 감싸고 엎드리는 모습은.
오랜만이라 그런지 신발 끈과 홀스터 벨트를 푸는 데만 1분이 걸렸다. 무거운 가죽 탄창 조끼를 벗어 던지고 두 겹의 상의까지 벗고 나자 근육이 고루 잡힌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그 상체는 흉터투성이여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치유 내성 때문에 채 없애지 못한 대던전의 흔적이었다.
물을 틀자 따뜻하다 못해 뜨거울 정도의 물이 콸콸 흘러나왔다.
‘던전이 아니라 캠핑 온 것 같네.’
윤서는 오늘만 몇 번째일지 한숨을 내뱉었다.
“형.”
“으악!”
벌컥 문 여는 소리와 함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윤서는 저도 모르게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염력>을 사용합니다.
타앙, 탕. 소리를 내며 샴푸 통과 린스 통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와, 씨. 죽을 뻔했네.”
간발의 차이로 욕실 문짝을 뜯어내서 저에게 날아간 샴푸 통과 린스 통을 방어한 권지한이 문짝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나야, 형. 진정해. 스킬 사용하지 마.”
“진정이고 뭐고 당장 안 나가요?”
“같이 씻자. 몬스터 피 끼얹어서 찝찝하단 말이야.”
“그럼 권지한 씨 먼저 씻으시죠. 제가 나가겠습니다.”
“같은 남자끼리 왜 내외해? 그냥 같이 씻어.”
권지한은 문짝을 내려놓고 피 묻은 옷을 훌러덩 벗어 던졌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 손가락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복근 등은 같은 남자라도 눈길을 빼앗을 만큼 완벽했으나 윤서는 질겁을 하면서 시선을 뗐다.
“진짜 나가게?”
윤서가 주섬주섬 벗어 뒀던 옷을 주워들자 권지한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사실 샤워실 내부가 넓어서 성인 남성 두 명쯤은 씻을 공간은 충분했으나 윤서는 이 인간과 나체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빨리 씻고 나오세요.”
그새 하의까지 벗으려 하는 권지한을 뒤로하고 욕실을 나오는데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형, 저번에 안았을 때도 느끼긴 했는데 운동 열심히 하나 봐. 몸이 되게 좋네. 군살 없이 탄탄하고…. 그 흉터는 다 대격변 때 입은 건가? 되게 섹시하다.”
윤서는 욕실 문을 닫으려다가 뜯겨 나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걸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