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72)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72)화(72/195)
#65
생명의 신은 마음 착한 신답게 가호하는 각성자도 많았다.
윤서는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덤덤히 약을 꺼내 먹는 그에게 박수빈이 재빨리 생수를 건넸다.
“제발 물이랑 같이 마셔요.”
“고맙습니다.”
윤서가 물을 마시고 병을 돌려주자 박수빈은 그것을 길드 아공간이 아닌 개인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가 윤서가 한번 입 대고 마신 물병을 횡령하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다들 윤서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서 형은 약병도 인벤토리가 아니라 주머니에 넣네요. 완전 아날로그네. 그거 혹시 인벤에 안 들어가요?”
“인벤에도 들어가는 병입니다만 가이아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아서요. 여기 있는 분들은 가이아 시스템에 대해 잘 아십니까?”
“웬만한 건 다 알아요. 뭐 궁금한 거라도 있어요?”
“가호 신들의 메시지는 좀 안 보이게 할 방법 없나요?”
“네?”
“가호 신들이 너무 말이 많아서 좀 꺼 놓고 싶네요.”
“…….”
수재희가 눈을 끔벅였다. 앳된 얼굴이 점차 경악과 충격으로 물들었다.
아까 <테라포밍>을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뭔가 심상치 않은 반응에 윤서는 급격히 불안해졌다.
“이것 봐! 이거 보라고. 윤서 이 새끼 혼자만 존나 특별하잖아. 너 씨발 대체 정체가 뭐야?”
홍의윤이 당장에 왁왁하며 달려들었다. 알렉과 박수빈도 놀란 눈으로 윤서를 쳐다봤다. 윤서에게 신경 쓰고 있던 길드원들도 저마다 하던 일들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큭큭,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는데, 그 웃음의 주인은 권지한이었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아 가만히 듣던 권지한은 재미있는 연극이라도 본 듯 웃고 있었다. 윤서는 의아했다.
“왜 그런… 반응들을…?”
윤서가 내가 뭘 실수한 건가 당황스러워하자 박수빈이 조용히 말했다.
“윤서 씨, 저 던전에 삼백 번 정도 다녔는데 그동안 가호 신들 메시지는 딱 다섯 번 받았어요….”
“…….”
“나는 12년간 일곱 번 받았네.”
“저는 세 번이 끝이었어요.”
“나는 두 번.”
왜? 왜?
생명의 신이 크게 웃습니다.
죽음의 신이 당신의 곤란함을 즐깁니다.
젠장, 잘 숨기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들키다니.
윤서는 말을 주워 담고 싶었으나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낭패감에 젖었다.
10년 전에는 이렇게 메시지 받는 일은 꿈도 못 꿨는데, 가이아 시스템이 업그레이드된 점이 너무 많아서 이 많은 메시지도 그러려니 넘겨버렸다. 지금도 예언자라는 특성이 따로 있을 정도로 가호 신들과의 소통이 안 안 되는 시대인데…. 이 말 많은 신들한테 의사 표현도 하고 나름 소통을 한다는 게 정상이 아니란 걸 알았어야 했는데.
‘깜빡했어. 어떻게 수습한다.’
윤서가 난감해하는데 구원의 손길은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다.
“생명의 신이 말이 좀 많긴 하지.”
권지한의 목소리가 유난히 잘생기게 들렸다.
윤서는 권지한의 프로필을 기억해 냈다. 그는 가호 신이 셋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생명의 신이었다.
권지한은 여유로운 어조로 말했다.
“나랑 윤서 형이랑 같은 신에게서 가호를 받고 있더라고. 생명의 신인데 말이 너무 많아서 가끔은 메시지를 꺼 놓고 싶어. 신은 착한데 좀 바보 같아.”
“그렇죠? 저는 수다의 신인 줄 알았습니다.”
생명의 신이 상처받습니다.
생명의 신이 구슬픈 눈물을 흘립니다.
생명의 신이 토라졌습니다.
죽음의 신이 조용해졌습니다.
“아니, 그래도 얼마나 말이 많다고 그렇게까지…?”
박수빈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윤서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고 권지한에게 대답을 양보했다.
“하나하나 세지도 못할 정도야. 지금도 구슬픈 눈물을 흘린다는데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 닦아 줄 수도 없고. 형도 그렇지?”
“네, 상처받았다며 울고 있군요.”
권지한이 해맑게 미소 지었다. 정답이라는 듯한 표정에 윤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찝찝해졌다.
“정말 믿기지 않는군. 수다스러운 가호 신이라니…. 허허, 이 나이 먹고 아직도 놀랄 일이 남았을 줄은 몰랐구만.”
“생명의 신이라면 뭔가 대단히 특별해 보이는데요. 특별한 신이라서 계시를 보낼 권능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걸까요?”
“그게 뭔 뜻이야. 내 가호 신들도 특별한 분들이거든?”
“아니, 시비 거는 건 아니었어요.”
홍의윤이 버럭하자 박수빈은 얼른 백기를 들었다.
“생명의 신이 특별해서가 아니야.”
권지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나만 신들의 메시지를 자주 받는 게 이상해서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가이아’의 가호를 받는 각성자는 가이아 시스템과의 공명도가 보통 각성자의 열 배 이상이라서 신들의 메시지를 받는 게 쉬워진다더라고. 생명의 신이 유독 말이 많긴 하지만, 다른 신들도-.”
“자, 잠깐. 잠깐만요.”
박수빈이 그의 말을 잘랐다.
“누구의 가호를 받는다고요?”
“가이아.”
“가이아의 가호…?”
박수빈은 더 커질 수가 없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이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권지한이 세상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이아의 가호를 받는 사람은 신들의 메시지를 더 자주 받는댔어. 난 지금까지 가이아를 가호 신으로 둔 사람이 나 말곤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 윤서 형도 있었네. 만나서 반가워.”
그답지 않은 친절한 말투의 설명이 이어졌다.
“…….”
“…….”
모두의 시선이 윤서에게 쏠렸다.
죽음의 신이 ‘권지한’에게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생명의 신은 토라져 있습니다.
관측자가 오랜만에 웃습니다.
관측자가 오랜만에 등장했지만 윤서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윤서는 당장 <거짓 기억>을 쓰고 사라지고 싶었다.
역시 권지한은 정의롭지 않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리고 형…. 아까는 내가 말이 심했어. 미안.”
그때 연이어 들려온 말에 윤서가 눈을 크게 떴다. 권지한이 약간은 곤란한 미소를 띤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윤서가 넋이 나간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자 권지한이 이어서 말했다.
“약한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을 때마다 도와주자는 건 절대 아니야. 나도 내가 필요 없을 때는 그냥 방관하고 그래. 그렇지만 강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에는 도와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그랬어.”
그는 그렇게 자신의 가치관을 피력하고는 윤서에게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이었다.
“솔직히 내가 방관하는 S급한테 그런 말 처음 한 것도 아니거든. 미국 S급 사냥꾼 새끼랑 같이 던전 간 적 있는데 전투는 안 하고 보물상자만 찾길래 그때도 한소리 했단 말이지. 미움받을 거 알고 내뱉은 말이라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런데, 형한테는 사과하고 싶어서….”
“…….”
“미안.”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윤서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선뜻 사과를 해온다고?
사과할 일도 아니고, 마땅히 해야 할 발언을 해놓고 사과를 한단 말이야……?
S급의 오만함은? 자존심은?
윤서는 허탈하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했다. 더불어 정말로… 정의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진지하게 사과를 해오니 윤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과할 거 없습니다. 날 자극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거잖아요. 그런 것쯤은 구분합니다. 딱히 심한 말도 아니었고요.”
“심한 말 아니었다면 다행인데… 심한 말이었을 확률이 높은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형도 그런 말 들으면 화를 좀 내.”
“내 쪽에서 화낼 발언이 아니었다니까요.”
“그랬다가 화낼 발언 맞았으면 나 진짜 형 앞에서 고개 못 든다.”
“그러니까 뭔 소리냐니까요?”
윤서가 답답하게 굴자 권지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 아닌가?’ 하는 혼잣말이 들렸다.
물론 윤서는 권지한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S급인 건 확신하지만 서채윤이라는 건 아직 확신하지 못하나 보군.’
그렇다면 답은 끝까지 우기는 것밖에 없다. 윤서의 다짐이 굳건해졌다.
***
권지한과 윤서의 대화가 끝나자 다시 홍의윤이 시비 비슷한 말을 걸어왔다. 언제 각성했냐, 어떤 스킬과 아이템을 가지고 있냐, 가호 신은 가이아 말고 또 누가 있느냐 등등.
위기에 빠진 윤서를 구한 건 <보스 알람>이었다. 이곳은 던전이고 아무리 지구화되었지만 다들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이다. 윤서의 정체를 캐는 것보다는 공략이 우선이었다.
그들은 장갑차에 올라 이동하면서 이미 짜 놓은 작전을 재확인했다.
브리핑 때 들은 정보로는 보스 몬스터는 비행형이고, 화염과 빙결 특성을 지녔다. 1페이즈에서는 시간마다 A급 몬스터들을 소환하는데, 2, 3페이즈에서는 어떤 행동을 보일지 알 수 없다. 그들은 우선 1팀과 홍의윤이 보스 몬스터를 공격하고 2팀은 소환된 몬스터들을 맡는다는 것까지 작전을 짜 놓았다. 보통 S급 보스 몬스터 레이드에는 며칠이 걸리지만 그들은 <테라포밍>이 끝나기 전 해치워야 했으므로 전투 멤버에 한 명을 더 추가하기로 했다.
“화심 헌터는 화염 스킬이 있다고 했죠?”
“없다.”
“화심 헌터도 보스를 맡아 주세요.”
“…알겠다.”
그렇게 자기는 평범하다, 등급 낮다 했지만 엄청난 스킬을 연이어 선보인 데다가 가이아의 가호까지 받고 있는, 뭔가 엄청나다는 게 밝혀진 윤서 때문에 화심까지 특별 취급을 받고 있었다. 성격이 원래 그런 건지 화심이 크게 부정하지도 않는 바람에 이제 사람들은 화심을 정체를 숨긴 S급이다 단정 짓고 있는 듯했다.
단, 화심은 이제 서채윤 후보에서는 제거됐다. 홍의윤도 마찬가지였다.
<테라포밍> 이후로 부쩍 윤서를 어색하게 대하고 내내 힐끔거리는 게 서채윤의 정체는 거의 윤서 쪽으로 몰린 분위기였다.
‘몰라. 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알 게 뭐야.’
윤서는 좋을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후방에서 1팀의 실드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래서 화심도 1팀과 함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다행이었다. 시야에 두고 확실하게 지킬 수 있으니까.
보스가 있는 곳은 그들이 있던 장소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곳의 지하 동굴이었다.
“와, 미쳤다. 동굴이 용암 밑에 있었나 보네. <테라포밍> 아니었으면 이거 처리 못 했겠는데요. 용암을 헤엄쳐 들어가야 했던 거잖아. 아무리 실드 빵빵하게 두르고 가도 유지 시간 짧았을 거고, 용암 속에서 어떻게 S급 몬스터랑 싸워요.”
“자칫하면 공략 실패했겠는데.”
“실패는 안 했을 거야. 권지한 헌터가 있으니까 클리어는 하겠지만 우리는 다 죽었겠지. S급들 빼고는….”
“서채… 윤서 씨의 <테라포밍> 없으면 권지한 헌터라도 어렵지 않았을까요?”
“으음, 하긴 그럴지도.”
2팀 길드원들은 속삭이며 대화했지만 윤서는 서채윤서라고 한 거 다 들었다.
그냥 무작정 아니라고 우길 것이다. 윤서는 다짐하며 뒤따라갔다.
동굴 입구에 <보스 알람>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드론이 보스 몬스터의 성질을 돋운 모양이었다.
일행은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마그마가 가득했을 곳은 이제는 깊은 산 속의 동굴처럼 이끼와 풀이 자라 있었다. 바위를 부숴 가며 곧장 가장 깊은 안쪽으로 향했다. 동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박쥐나 벌레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얼음과 열기가 공존하는 기이한 광경이 많아졌다. 천장에는 고드름이 매달려 있고, 아래에는 수증기가 솟구치는 지역. 고드름이 머리 위로 떨어지거나 발밑에서 화염이 솟을 수 있어서 실드를 유지한 채 들어갔다.
‘아…. 예언자가 틀리기도 하는구나.’
한참을 들어갔을 때, 윤서는 보스 몬스터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땅 밑에서 쉬이익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는 이것은 날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알렉이 <창작>으로 미리 준비한 날개 포획 아이템이나 그 외 비행형 몬스터에 대비한 작전들이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어차피 힘이 조금 까발려진 거, 아직 눈치채지 못한 이들에게 말하기 위해 입을 여는 그때였다.
“다들 멈춰.”
권지한이 손을 들어 모두를 멈춰 세웠다. 앞서가던 알렉이 긴장한 눈초리로 뒤를 돌아봤다.
“뭐가 있는가?”
“이상한데. 비행형이 아니야.”
권지한은 조용히 말하곤 검을 들어 땅바닥에 그대로 내리꽂았다.
쉬이이익!
“뱀?”
“거대 뱀이다. 다들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