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75)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75)화(75/195)
#68
“스킬이 안 통해요.”
“뭐?”
“제 스킬이 효과가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
“상대가….”
박수빈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읽었다.
상대의 ‘치유 스킬 내성’으로 인해 <빛의 세례>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치유 스킬 내성?”
“치유 내성이라고?”
“그게 뭐야?”
모두가 그 용어를 처음 들었다. 권지한도, 알렉도 처음 듣는 용어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의미를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치유’, ‘내성’의 의미를 조합하면 간단하니까.
윤서는 치유 스킬 내성이 있다. 그에게는 치유 스킬이 들지 않는 것이다.
“이, 이럴 수가. 그럼 그동안 잠적했던 이유가 바로…!”
“얼른 던전부터 나가야 해요!”
태평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번데기도 문제였지만 당장 동굴이 무너질 것이다. 다들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알렉이 윤서를 흔들었다.
“윤서 군, 일어나게. 지금 잘 때가 아니네.”
“짜증 나게 하고 있어….”
“짜증 나게 해서 미안하네만 정말 실드가 10분 남았나? 아니, 이젠 7분 되었겠군…. 7분 후에 동굴이 무너지는 건가?”
“당연히 무너지지…. 내가 지탱 중인데 내가 이제 마력이 다하잖아요. 바보예요? 아…. 진짜 바보라면 죄송해요….”
“그럼 우린 다 죽겠구만.”
권지한에게 구속당한 채 꿈틀꿈틀 저항하던 윤서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응?”
윤서의 갈색 눈에 노기가 차올라 있었다. 알렉은 윤서의 기세에 눌려서 조금 뒤로 물러났다. 내가 못 할 말 했나? 하지만 저는 안 죽어도 2팀 길드원들은 동굴이 무너지면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아무도 죽는단 소리 지껄이지 마. 내 앞에선 아무도 못 죽어.”
서늘한 저음으로 선언한 윤서가 권지한에게 팔을 풀라고 말했다. 권지한의 힘이 느슨해지자 윤서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한 손으로 권지한의 허벅지를 짚었다가 흠칫 놀라서 손을 뗐다. 윤서는 반대쪽 허벅지를 짚고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권지한이 상체를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는 걸 도왔다.
마력 고갈은 정신력의 문제였다. 윤서는 지금 알렉 스위치의 다 죽는다는 말에 정신이 반짝하고 돌아왔다.
“일단… 전부 동굴 밖으로 꺼지세요.”
“다 꺼지라니?”
“나랑 권지한만 빼고 꺼지라고요. 혹시 모르니 비행하고 있어요.”
그 말에 일순 침묵이 내려앉았다. 둘만 빼고 도망치라는 소리가 아닌가.
얼굴이 새파래진 채 입술만 깨물고 있던 홍의윤이 가장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너, 너 치유 내성이라면서 여기 남아서 뭘 하려고! 너도 같이 도망쳐야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윤서는 머리가 아파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윤서를 부축하고 있던 권지한이 수재희에게 눈짓했다.
“…아, 의윤이 형. 일단 지금은 형들 말 듣자.”
수재희 또한 홍의윤과 같은 생각이었으나 권지한에게 뭔가 방법이 있구나 싶어서 홍의윤의 입을 틀어막았다.
“알겠어요, 형들. 형들만 믿고 우리는 나갈게요.”
수재희가 읍읍, 거리며 난리 치는 홍의윤을 끌고서 앞장섰다. S급 헌터가 선두로 빠져나가자 다른 이들도 윤서와 권지한의 눈치를 보면서 뒤를 따랐다. 제일 빠르게 도망가는 사람이 바로 화심이었다.
2팀 팀장까지 자리를 떠났는데 박수빈은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제 남은 이는 알렉과 박수빈뿐이었다.
“윤서 씨, 힐러 한 명 정도는 필요할 거예요. 저 버프도 가능하니까 권지한 헌터에게 버프도 사용해 줄 수 있고….”
“필요 없어. 길게 설명할 시간 없으니 다들 얼른 꺼져요.”
“윤서 씨.”
“설마 유언을 남기고 죽을 생각이에요?”
“네?”
“유언 남기기만 해 봐. 죽여 버릴 테니까.”
지금 서글퍼야 할 사람은 거부당한 박수빈인데 횡설수설하는 윤서가 더욱 서글퍼 보였다.
박수빈은 윤서가 이런 말을 하는 연유도 모르면서 괜히 윤서가 안타까웠다. 권지한이 보란 듯이 윤서를 더욱 강하게 부축했다.
“시간 없어. 형 말대로 다 죽을 생각 아니면 얼른 나가.”
“박수빈 헌터, 권지한과 서채윤서의 말이 맞네. 우리는 이제 떠나지.”
알렉이 박수빈의 어깨를 붙잡았다. 박수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방해물이었다. 오히려 시간만 소모시키며 상황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 이제 정말 몇 분 남지 않았다.
“…나가서 봐요, 윤서 씨.”
박수빈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일어났다. 알렉도 윤서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으나 <창작>으로 실드만 하나 만들어 주고 떠났다.
권지한은 모두 동굴 밖으로 빠져나가는 걸 기척으로 확인했다.
“다 나갔어.”
“다 안전해?”
권지한이 낮게 웃었다.
“지금은 안전해. 우리가 보스를 처리하지 못하고 <테라포밍>이 끝나면 다 죽… 안전하지 못하게 되겠지만.”
윤서가 고개를 들어 권지한을 올려다봤다.
“정의로운 권지한….”
“…응, 형.”
“너는 S급 오렌지 던전도 혼자 돌파하잖아. 버프 안 받아도 S+급 위력을 낼 스킬 정도는 갖고 있을 텐데요.”
“쉽지 않아. 그 스킬들은 동료를 배려하지 않는 것들이라…. 나 때문에 사람들 다친 것 봤잖아. 네 실드도 버티지 못할 거야.”
“하아…. 3분 남았어.”
윤서가 상의를 더듬었다. 권지한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는 윤서의 주머니가 많이 달린 상의 주머니에서 단번에 약병을 꺼내 줬다. 윤서가 알약을 와르르 쏟아서 그대로 입에 집어넣으려는 걸 권지한이 가로막고는 딱 두 알만 삼키게 했다.
약을 먹고 조금 정신 차린 윤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킬 <관측자의 검>을 사용합니다.
허공에서 검은 기운을 휘감은 검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윤서는 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마력 고갈인데도 또다시 스킬을 사용하자 권지한조차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검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하지. 나도 많은데.”
“닥쳐요.”
마력이 0.12%가 되었습니다.
이제 곧 정신을 잃으니 대비하세요.
스킬 <수호의 궤>가 흔들립니다.
동굴이 쿠구궁 흔들렸다. 권지한은 쩌저적 금이 가는 천장을 한 번 올려다봤다가 다시 윤서를 내려다봤다. 권지한의 표정은 평안했다. 실드에 대한 어떤 의심도 없는 듯이.
윤서는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다음에 올라올 메시지를 기다렸다.
생명의 신이 당신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신의 가호로 마력이 회복됩니다.
죽음의 신이 당신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신의 가호로 마력이 회복됩니다.
죽음의 신이 당신의 작전에 놀아났다고 화냅니다.
윤서의 예상대로 신들이 축복을 내렸다. 대던전에서도 생명의 신과 죽음의 신은 아주 가끔 기절 직전에 이런 축복을 내리고는 했다.
다시 마력 총량이 2%가 되었고, <관측자의 검>과 <수호의 궤>도 유지 가능해졌다.
“권지한 헌터, 그쪽이 가진 스킬 중 가장 강한 스킬을 이 검에 사용하세요. 검에 스킬을 담고 공격하면 위력이 두 배가 됩니다.”
“…무시무시하네.”
권지한은 분명 강력한 스킬을 가지고 있다. 윤서는 권지한의 시스템 프로필을 읽은 바가 있었다. <관측자의 검>으로 그 스킬의 화력을 두 배로 만들면 S+급 베리어 정도는 단번에 찢어 내겠지. 윤서는 그에게 <관측자의 검>을 내밀었다. 검을 든 권지한의 회색 눈에 금빛이 서렸다. 안 물어봐도 알 수 있었다. <관측자의 검>의 상태 창을 읽고 있는 것이다. 윤서는 힐끗 실드를 확인했다.
<수호의 궤> 내구도 1/100
“시간 없어요. 빨리…. 동굴이 무너질 때까지 1분 남았어. 얼른 보스 죽이고 길드석으로 이동해.”
윤서는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더는 안타깝거나 안쓰럽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가 담겨 있었고, 갈색 눈에는 희망이 감돌았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희망이었다.
여기서 죽는다. 드디어 죽을 수 있어….
죽음은 언제나 그의 염원이었다.
윤서는 너무 죽고 싶었다.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들어주지 못한 유언들 때문에 죽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생을 마감한다면 유언을 지키지 못했어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을 보호하려다 죽는 거니까.
그렇지?
이건 죽어도 되는 죽음이야.
다들 그렇게 죽었잖아.
그러니까 나도 괜찮아.
윤서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력 고갈이 아닐 때도 항상 죽고 싶어 했던 그였는데 심지어 이제는 자살 충동을 부추기는 마력 고갈 상태까지 되었다. 그는 죽어도 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고 진심으로 만족해했다.
기쁨을 주체 못 하는 윤서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권지한이 입을 열었다.
“정말 서채윤이었구나.”
윤서는 어이가 없었다. 이 긴박한 순간에 할 말이 이거라고? 죽음에 대한 기대만 있던 푸른 눈에 온갖 험한 욕설이 담겼다. 권지한은 느른하게 미소 지었다.
“형, 나 스킬 레벨 업 할 수 있다고 했잖아.”
“지금 이런 대화할 시간 없어요.”
“그런데도 아직 B급에 머무르고 있는 스킬이 하나 있거든. 왜인지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무 강해서 사용한 적이 한 번밖에 없어.”
권지한이 윤서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안 그래도 서 있을 정신이 없어서 누우려 했던 윤서가 당황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나랑 붙어 있는 게 제일 안전할 거야.”
움직이지 않는 손을 휘저으며 저항하려 했지만, 권지한의 안은 자세가 얼마나 안정적인지 윤서는 만사 포기하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가만히 포개고야 말았다. 권지한은 한쪽 팔로만 가뿐히 윤서를 안은 뒤 다른 손으로 <관측자의 검>을 들었다.
‘권지한’이 스킬 <골든 타임>을 사용합니다.
금색 마력이 권지한과 윤서의 몸을 휘감았다.
“좀 자고 있어, 형.”
어떻게 이 상황에서 자란 말이야? 라는 말은 나오지 못했다. 바로 이어진 스킬 알림 로그를 윤서가 힘겹게 노려봤다.
‘권지한’이 스킬 <유토피아>를 사용합니다.
마력 고갈로 인해 저항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꿈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권지한’이 스킬 <퀘이사>를 사용합니다.
<수호의 궤>가 파괴됩니다. 동굴이 무너집니다.
쏟아지는 메시지 속에서 윤서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게 마지막이기를.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