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78)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78)화(78/195)
#71
어쩐지 수재희와 박수빈의 병문안 메시지가 어제가 끝이라는 게 이상하긴 했다.
윤서가 허둥지둥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를 나오려 하자 권지한이 윤서의 팔뚝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아직 마력 회복도 다 안 된 상태로 어딜 가려고? 그냥 쉬어. 나도 마력 회복 중이잖아. 막판에 마력을 엄청나게 잡아먹는 스킬을 연달아 써 가지고.”
<골든 타임>, <유토피아>, <퀘이사>.
윤서가 정신을 잃기 전 올라왔던 메시지들이었다. 스킬명만 들어도 예사롭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윤서는 팔을 휘둘러 권지한의 손을 떨쳐 냈다.
자신이야 치유 내성 때문에 자연 회복해야 한다지만 권지한은 마력 포션을 먹으면 될 일 아닌가?
강자는 세상을 지킬 의무가 있다던 권지한이 왜 지금은 전투를 피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치유 내성이 생겼나?
윤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권지한은 윤서의 표정을 보고 어떤 오해를 했는지 파악한 듯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치유 내성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시중 마력 포션을 내 몸이 싫어해.”
“잘 안 든다는 겁니까?”
“응, 마력의 밀도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포션으로 차는 마력은 뭔가 까끌까끌한 옷감을 걸치고 있는 것처럼 불편하거든. 떫은맛도 계속 혀끝을 맴돌고. 그래서 난 웬만하면 자연 회복 하거나 마력 회복 스킬로 회복하는 편이야.”
“…….”
윤서도 그런 얘기는 듣긴 했다. 대부분은 마력 포션에 대해 거부감이 없으나 가끔 순수한 자연 마력과는 달리 불편하고 껄끄러운 느낌을 갖는 각성자가 있다고. 윤서에게 마력 포션은 미지근한 맹물이나 다름없기에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이라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럼 권지한 헌터는 여기서 쉬세요. 난 서해 쪽에 가 봐야겠습니다.”
“S급 헌터 네 명이 가 있는데도 못 미더워?”
“그래도 범람이면…. 네 명이라니요?”
윤서가 손가락을 꼽아 숫자를 셌다. 알렉은 2팀과 던전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럼 수재희랑 커플, 세 명인데. 윤서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권지한이 빙긋 웃었다.
“아, 우리가 던전 들어간 사이 석영에 한 명이 더 들어왔거든. 외국 전투계 S급인데 원소를 다루는 스킬이 꽤 흥미로워. 강하진 않지만 약하지도 않아.”
“…….”
맥이 풀린 윤서는 다시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 올리고 침대에 앉았다. 최근 권지한과 대련했다던 그 외국 헌터인가 본데, 결국 패배하여 석영에 들어온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슬슬 권지한과 대련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른 척하자.’
아무튼 S급 네 명이라면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궁금해서 U패드를 켰는데 올라오는 뉴스라고는 죄다 서채윤 기사들뿐이었다. 기한이 임박한 A급 던전 공략은 물론 S급 던전 범람이나 S급 헌터 영입 소식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서채윤 복귀에 다 묻혀 버린 것이다.
윤서는 내가 이 정도였나 약간 떨떠름하면서 동시에 부담스러웠다.
“권지한 헌터.”
“형, 말 편하게 해. 지한아, 라고 해 봐.”
“기자 회견 한번 하세요. 사실 나는 센타우리자리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발표하는 겁니다.”
권지한이 외계인이었다니, 그 정도 스캔들이라면 서채윤 복귀 따위는 충분히 덮을 수 있다. 권지한에 대해 잘 모르던 합병 전의 윤서라도 그런 흥미진진한 기사가 올라온다면 클릭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윤서는 진심이었는데 권지한은 피식 웃었다.
“서채윤 이름이 거론되는 게 그렇게 싫어?”
“싫습니다.”
“자꾸 싫어하는 일을 시켜서 미안해. 그런데 복귀 기사라고 뜨긴 했지만 형을 다시 던전에 들여보내지는 않을 거야. 전투에 부를 일 없어.”
의외의 말에 윤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요? 치유 내성이라서?”
권지한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치유 내성이란 게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포션도, 치유 스킬도 안 통하는 사람을 몬스터와 싸우게 할 순 없지. 위에서 형 들여보내려고 해도 내가 막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아예 기사도 좀 막아 주지 그랬어요? 권지한 헌터는 이 발표를 말려 보기는 했습니까?”
“나? 내가 기사 막을 힘이 어디 있어.”
“정말 뻔뻔하네요.”
윤서는 어이가 없어서 권지한을 노려봤지만 권지한은 느슨하게 웃고만 있었다.
“내가 좀 뻔뻔해. 그 서채윤에게 뻔뻔함을 인정받으니 감개무량하네. 그동안 어땠어? 들킬까 봐 초조했어? 아니면 다른 후보들한테 돈 거는 사람들 보면서 웃었나.”
“전혀 웃기지 않았습니다. 말 나온 김에 물어볼게요. 대체 난 왜 찾은 겁니까?”
“아아.”
권지한이 팔짱을 꼈다. 윤서는 대답을 회피하는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곧 준철이 형이 와서 설명할 거야. 그 외 다른 부분들도. 형이 들어야 할 얘기가 많아.”
“석영 길드장 말입니까?”
“응. 사람들 시선이 적은 늦은 밤에 다들 모이기로 했어.”
윤서는 순간 치솟는 불길함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그 ‘다들’은 누구누구입니까?”
“석영 길드장, 석영 부길드장, 한국 헌터 협회 회장, 세계 헌터 연맹 회장, 유럽 에우로페 길드장, 미국 S 길드장 등등….”
“…….”
“안 돼. 도망칠 생각하지 마.”
권지한이 재빨리 윤서의 환자복 소매를 붙잡았다.
“대체 그 사람들이 왜….”
“이유는 지금은 말할 수 없어.”
“꼭 만나야 하는 겁니까? 대면 안 하고 화상 통화하면 안 될까요? 최첨단 시대잖아요….”
“무조건 얼굴 보고 얘기해야 해.”
“아아, 안 그래도 마력 부족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이 아픈데 너무 스트레스받고 화딱지 나서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윤서가 연약한 목소리로 무시무시하게 협박하자 계속 느물느물 웃기만 하던 권지한이 일순 얼굴을 굳혔다.
“형, 내가 잘 판단이 안 되는데 정말 아픈 거야. 아니면 아픈 척하는 거야?”
“…….”
“아하.”
윤서의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픈 척이었다는 걸 안 권지한이 다시 웃었다.
“알았어. 형이 그렇게 질색하니까 그냥 딱 세 명만 오라고 할게.”
“세 명은 누구요?”
“우리 길드장, 부길드장, 에우로페 길드장. 예언자가 꼭 있어야 해서 말이야.”
윤서가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에우로페 길드의 그레이스 엘리시아는 윤서도 알고 있었다. S급 예지자로 라 비지나와도 친분이 있다고 했다.
“서채윤 님이 너무너무 질색하니 인원 줄이라고 연락하고 올 테니까 도망가지 말고 있어.”
“알겠습니다.”
권지한이 병실을 나갔다. 윤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엎어졌다. 그는 뉴스 기사를 몇 개 읽다가 TV를 켰다. 평소 드라마만 하던 채널에서도 지금은 서채윤 복귀 관련 좌담회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채널을 계속 돌리자 드라마 하는 곳을 한 군데 발견할 수 있었다. 좋은 방송국이었다.
“권지한 헌터. 나간 김에 과자 좀 사 오세요. 마실거리랑.”
“…….”
윤서는 복도로 나간 권지한에게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은 없고 나직한 웃음소리만 들렸다. 매점이 아래에 있는지 권지한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러고 보니 이 층에는 병실이 여기 하나뿐인 듯했다.
윤서는 <염력>으로 창문의 커튼을 걷었다. 통창 밖에 보이는 하늘은 새파랬고, 하얀 구름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완전 날씨 좋은 날, 패러글라이딩하기.
파란 하늘 아래에서 스카이다이빙.
강아지, 병아리, 상어, 축구 하는 어린애, 해바라기 모양 구름 찾기.
당장 떠오르는 유언만 세 개였다.
패러글라이딩과 스카이다이빙은 진즉 완료했는데, 모양 구름 찾기는 아직이었다.
‘휴가도 받았으니 숙제 열심히 해야겠네. 일단 얼마 남지 않은 뜨개질부터 처리하고. 아, 햅쌀이도 꺼낼까.’
어차피 서채윤이란 게 까발려진 마당에 햅쌀이를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인벤토리에서 넋을 꺼냈다.
‘왕 큰 새 알’ 이름도 ‘존재하는 넋’으로 돌려놓을까 하다가, 아직 모두가 윤서가 서채윤이란 걸 알게 된 건 아니니 놔두기로 했다.
조그만 알이 윤서의 손바닥 위에서 지이잉 미약하게 진동했다. 그 가냘픈 진동이 안쓰럽고 애달파서 윤서는 꼬옥 끌어안았다.
“햅쌀아.”
“…….”
“앞으론 계속 꺼내 놓을게. 열심히 회복해서 알 깨고 나와. 알았지?”
“…….”
알 표면이 부르르 떨렸다. 윤서는 웃음을 터뜨렸다. 햅쌀이는 아주 말이 많은 녀석이었다. 지금도 얼마나 말하고 싶어서 답답할지 생각하면 안쓰럽고 귀여웠다.
하염없이 알을 쓰다듬던 윤서는 문득 제 옷 소매에 시선이 멈췄다.
‘잠깐.’
일어났을 땐 이미 이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누가 갈아입혔지?
“…….”
차마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
– 그래. 어차피 며칠은 못 갈 것 같다. 지금 시선이 너무 많이 쏠려서 이 시기에 문병 가면 바로 특정될 거야.
“알았어. 그렇게 전달할게.”
– 그…. 화 많이 나셨지…?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유준철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권지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문제야. 형이 화를 안 내. 본인은 빡쳤다고 말하는데 목소리 한번 안 높인다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있단 말이지.”
– 그럼 다행인 거 아니냐. 우리 입장에서는.
“내 입장에서는 아니야. 사과하고 싶은데 화를 안 내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 거야? 사과 듣길 원하지 않는 사람한테 일방적으로 미안하다고 하는 것도 안 되는 거잖아.”
– 으음.
유준철 주위가 시끌벅적했다. “길드장님, 곧 협회장이-”, “에우로페 쪽에서 연락을-” 등 소란스러웠다. 다들 그를 찾는 와중에도 유준철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 보통 화내야 하는 상황에서 화를 안 내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지. 너무 너무 착하고 순한 경우. 혹은… 아예 상대에 대한 기대가 없는 경우.
“…….”
– 그분은 어느 쪽인 것 같냐?
권지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준철은 조금 더 기다리다가 말했다.
– 일단 지금은 바빠서 끊으마. 나중에 통화하자.
“알았어.”
전화를 끊은 후에도 권지한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상대에 대한 기대가 아예 없다…….
그럴 만했다. 지금까지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건방지게 굴었으니까.
대던전이 나타난다는 계시가 내려오고… 숨어 있는 사람을 끌어내야 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미움받을 각오는 했다.
“…….”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권지한은 눈을 감고 몇 번 심호흡 했다.
세상에는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세상의 평화를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는 강자로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
통화를 마친 권지한이 양손에 주전부리를 잔뜩 들고 돌아왔다.
“형, 아쉽겠지만 아무래도 며칠간은 길드장 형 못 만날 것 같아. 서채윤 만나러 갈까 봐 감시하는 시선이 너무 많대. 지금 시기에 문병 오면 형을 서채윤으로 추측하는 사람도 백 퍼 있을 거라서 좀 관심이 식은 다음에 만나서 얘기해야겠다는데.”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우리 쪽도 급해서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며칠만 복잡한 생각 뒤로 미루고 쉬어.”
권지한이 알을 끌어안은 채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윤서 옆에 다른 안락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생각해 주는 척하지만 저 말은 며칠 후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얘기를 할 거라는 뜻이라 윤서는 벌써 머리가 아프려고 했다.
“그 알은 뭐야?”
“넋입니다.”
“‘존재하는 넋?’”
윤서가 끄덕이자 권지한이 입꼬리를 올렸다.
“흥미롭네. 정말 형태 변형이 자유로운 거야?”
“네.”
“단검도 되고, 활도 되고?”
“맞습니다. 이런 아이템은 이제 많지 않나요?”
“지금도 많지는 않아. 10년 전엔 이게 유일했겠지. 탐나는 무기네.”
탐난다는 말에 윤서가 알을 제 품으로 꼬옥 끌어안았다. 담요도 꼼꼼하게 감싸서 알껍데기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권지한 헌터도 본인만의 무기 있지 않습니까. 손잡이가 까만 검.”
“지금은 그걸 쓰긴 하는데 1년에 두세 번은 바꾸게 되더라고. 내구도가 내 스킬의 위력을 못 버텨. 형 건 어떻게 내구도를 유지해?”
“마력으로 채웁니다.”
“그럼 영구적이라는 뜻이야?”
“반영구적이죠. 권지한 헌터는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무기를 바꿔 왔던 겁니까?”
권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었는데 사실 이건 상당히 대수였다. 그처럼 전투에 많이 나서는 사람이 1년에 두세 번씩 무기를 바꾸는 건 아주 위험했다. 보통 2, 3년 안에는 전용 무기를 찾는데 각성 후 6년이 지난 지금도 전용 무기가 없다니, 심지어 지금 말하는 걸 들으면 경각심이 조금도 없다. 이 어린놈을 어떡해야 할까. 주위 어른들은 대체 뭐 했지? 유준철 뭐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