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79)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79)화(79/195)
#72
“걱정하지 마. 전용 무기가 없어도 형 걸 빼앗지는 않을 테니까.”
“그거 걱정한 거 아니에요.”
“그럼 왜 그렇게 근심 어린 표정이야?”
“무기도 없이 날뛰는 그쪽이 안쓰러워서요. 그게 위험한 줄도 모르고.”
“하하….”
권지한이 웃었다. 역시나 전혀 염려하지 않는 듯했다. 윤서가 일곱 살 어린 놈을 노려봤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 전용 무기가 없으면 위험하다고. 그런데 어쩌겠어. 위험한 적이 생겨야 경각심을 좀 갖지…. 이번에 형이랑 대련하고 나면 좀 경각심이 생길라나.”
젠장, 이 자식 역시 안 까먹었어.
윤서는 입을 다물고 알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계약서 해지됐던데. 봤어?”
“네?”
윤서가 눈을 깜박이고는 얼른 인벤토리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권지한의 말대로 계약서 상단에 <해지>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었다.
“형의 정체랑 갖고 있는 스킬 몇 개가 내 의사와 상관없이 드러났기 때문인 것 같아. 가이아 시스템이 의외로 세심하더라고.”
“그렇군요.”
윤서가 이제 쓸모없어진 계약서를 주욱 찢었다. 그러자 계약서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래도 싸우기로 한 약속은 잊지 마. 나 그날만 기다리면서 산단 말이야.”
“아뇨. 이제 싸울 일은 영원히 없습니다.”
“함부로 ‘영원히’라고 말하면 안 돼. 사람이 꿈은 꾸게 해 줘야지.”
“꿈도 꾸지 마세요.”
“아, 형.”
“…….”
“윤서 혀엉.”
권지한이 징그럽게 애교를 부렸다. 윤서는 그저 이제 더 이상의 대화는 하기 싫다는 듯이 알만 끌어안았다. 권지한은 더는 거치적거리지 않고 피식 웃고 말았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들렸다. 둘 다 S급이라서 누구인지는 기척만으로 바로 알았다. 곧 의료진이 문을 두 번 두드린 후 들어왔다. 혹시 알레르기가 있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는데 보통 이런 걸 의사가 직접 와서 물어보나 싶었지만 윤서는 다 잘 먹는다고 착실히 대답했다. 그러나 권지한이 까탈스럽게 굴었다.
“맵고 짠 건 주지 마. 건강에 안 좋으니까.”
“예. 서채… 윤서 헌터님이 철저한 식단 관리가 필요한 환자는 아니어도 최선을 다해 균형 잡힌 식사를 제공하겠습니다.”
의료진이 돌아가고 윤서가 권지한을 흘겼다.
“S급 헌터는 맵고 짠 거 먹는다고 건강이 안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괜히 민간인들 괴롭히지 마세요.”
“나 그렇게 진상 S급 아니야. 그냥 내가 맵고 짠 건 못 먹어서 그랬어.”
“맵고 짠 걸 못 먹는다고요?”
“S급이어도 매운 건 맵더라고.”
윤서가 눈을 끔벅였다. 확실히 입맛은 각성 전과 후가 달라지지 않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저 사나운 양아치처럼 생긴 놈이 매운 걸 못 먹는다니 의외였다.
“라면도 못 먹어요?”
“순한 맛밖에 못 먹어.”
“떡볶이는?”
“분식집 달달한 떡볶이는 먹을 수 있어.”
“…김치찌개?”
“김치찌개는 매워하면서 먹는 거지. 맛있잖아.”
윤서의 얼굴에 점점 웃음이 스며들었다. 권지한이 맵찔이였다니! 애어른 같은 놈이 이렇게 한 번씩 애 같은 면모를 보일 때면 제법 귀여웠다. 윤서가 쿡쿡, 웃음소리를 참지 않고 웃었다. 권지한은 저를 비웃는다는 걸 알았을 텐데도 웃는 윤서를 웃음기 담긴 눈으로 쳐다봤다.
“형은 매운 거 잘 먹어?”
“전 뭐든 잘 먹습니다. 각성 전에도 그랬어요.”
“좋겠다. 매운 것도 많이 먹으면 는다는데 나도 앞으로 열심히 먹을까 봐.”
“S급은 건강이 나빠질 일도 없으니 입맛이 풍부해지면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늘어나고 좋죠.”
“그럼 형 퇴원하고 나면 맛집 갈래?”
“아뇨.”
“좀 들어 봐. 발산역에 있는 매운돼지갈비찜 하는 덴데 인기 많더라고. 커플이랑 알렉이 갔다 왔는데 한국에서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다고 극찬을 했어.”
매운돼지갈비찜. 마침 점심때라서 단번에 입맛이 돌았다. 솔직히 지금 당장 가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권지한이기 때문에 윤서는 애써 눌러 참았다.
“그럼 극찬한 사람들이랑 가세요. 난 귀찮아서.”
“줄 서서 먹는 맛집이라던데 진짜 안 가? 내가 살게.”
순간 윤서의 머릿속에 유언 하나가 스쳤다.
줄 서서 먹는 맛집 열 군데 가 줘.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지라 아직 딱 두 번밖에 가지 못했다.
“좋습니다. 권지한 헌터가 그렇게 원하니 퇴원하면 가죠.”
“퇴원 언제 할 거야?”
“며칠 있으면 석영 길드장이 만나러 온다면서요. 얘기 끝내고 그다음 날 퇴원 수속 밟으면 될 것 같군요.”
“으음.”
권지한이 U패드를 꺼냈다. 그는 날짜 하나를 특정했다.
“이날 점심에 먹으러 가자. 줄은 내가 사람 고용할게.”
“줄 서는 것도 맛집 가는 묘미인데 변장하고 같이 줄 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윤서가 얼른 내뱉자 권지한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의외네. 그런 거 귀찮아할 줄 알았는데.”
“맛집 가는 거 좋아합니다.”
줄 설 생각만 해도 존나 귀찮다.
“저번에 템 시장 갔을 땐 줄 서는 것도 사람 많은 것도 싫어했잖아.”
“템 시장과 맛집은 다르죠.”
똑같다. 귀찮다.
“흐음.”
사람이 괜찮다면 괜찮은 줄 알 것이지 권지한은 뭔가 수상한 꿍꿍이라도 캐려는 듯 턱을 쓸었다.
“이상하네.”
“뭐가요.”
“형은 가끔 싫은 걸 억지로 할 때가 있는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나도 형의 보고서를 읽어 봤거든. 박수빈이 1년간 뒷조사한 거 말이야.”
권지한이 뻔뻔하게 얘기하며 U패드에서 파일 하나를 열고 허공에 띄웠다.
윤서의 수많은 취미 목록이 떠올랐다.
등산, 낚시, 뜨개질, 쿠키 굽기, 그림 그리기, 피아노 연주…. 가장 즐겨 하는 취미는 드라마 시청이라는 것까지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취미가 너무 중구난방에다가 형 성격이랑도 안 맞아. 사람은 무덤덤하고 심드렁한데 등산에 낚시 같은 아웃도어 취미라니 너무 이상하잖아. 내 생각에 형의 진정한 취미는 드라마 시청밖에 없는 것 같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른 취미는 억지로 즐기고 있는 거고.”
소름 끼칠 만큼 정확해서 윤서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권지한이 덧붙였다.
“형은 다중 인격자야.”
“…네?”
“등산을 좋아하는 인격, 낚시를 좋아하는 인격, 맛집 줄 서기를 좋아하는 인격이 따로 있는 거지. 내 추측으로는 인격이 200개는 넘을 것 같은데 맞아?”
윤서는 권지한의 주둥이를 한 대 때리려다가 그만뒀다. 대신 햅쌀이를 만지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본인이 취미라는데 어이없네요. 그렇게 줄 서는 게 싫으면 가지 말든가요. 혼자 가면 되니까.”
“아니, 싫다는 건 아니고 그냥 이상해서 말해 봤어. 나도 줄 서는 거 좋아해.”
권지한이 빙긋 웃었다. 권지한과 시간 약속을 잡고 맛집 리뷰를 찾아볼 때쯤 식사가 올라왔다.
밥은 훌륭했다. 탄수화물, 단백질 등 균형 있는 영양소에 맛도 아주 좋았다. S급이라는 걸 고려해서 양도 아주 많았다. 윤서는 스무 번씩 꼭꼭 씹어 먹느라 식사 속도가 느린데, 의외로 권지한과 비슷하게 끝났다.
권지한은 식사 후에도 윤서 옆을 떠나지 않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저녁 식사까지 함께한 후에야 병실을 나갔다.
“잘 자고 내일 아침에 봐.”
라는 인사를 남기고.
윤서가 재빨리 아침에 보긴 뭘 보냐고 빽 소리치긴 했지만 이미 권지한은 문을 닫고 나간 후였다.
***
권지한은 그다음 날에도 찾아왔다. 그것도 꼭두새벽에.
윤서는 일찍 일어나 조깅이나 하려고 막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권지한과 정확히 마주쳤다. 윤서는 눈살을 확 찌푸렸고 권지한은 느른하게 미소 지었다.
“뭡니까.”
“뭐긴 뭐야. 지한이지.”
“이 시간에 여긴 왜 와요.”
“형이 어디 도망갈까 봐. 러닝하려고 나가는 거면 같이 하자.”
그렇게 둘은 함께 병원의 정원을 돌게 되었다.
잘 꾸며진 정원에는 경비원 몇 명밖에 없었지만 권지한은 변장 아이템을 사용했다. 윤서는 얼굴이 공개되지는 않았으니 변장하지 않고 뛰었다.
문제는 두 S급이 같이 달리다 보니 자연히 경쟁하게 되어 버렸다는 점이었다.
옆 사람을 의식하며 무아지경으로 달리던 둘은 정원에 사람이 하나둘 많아지고 눈길이 쏠리기 시작해서 러닝을 그만두고 병실로 돌아왔다. 둘 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하, 형. 조깅 되게 빡세게 한다. 나 이렇게 땀 흘린 거 처음 같아.”
“하아…. 저도, 후. 이렇게 달린 건, 후우, 처음입니다.”
“형은 이런 빡센 운동을 아침마다 한단 말이야? 나도 앞으로 해야겠는걸.”
“그러든…가요. 후우…. 하아.”
윤서는 바닥에 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원래 이렇게 빡세게 러닝하지는 않는데 같이 달리다 보니 전속력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 자식은 정말 빡세다고 느낀 게 맞긴 해?
윤서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을 수도 없는 자신에 비해 꼿꼿이 서 있는 데다가 헐떡거림도 덜한 권지한을 노려봤다. 어딜 가서 체력으로 뒤처져 본 적 없던 자신이 뒤처졌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이었지만 나이 차이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렇게 빡센 조깅 후 두 사람은 특실의 샤워실에서 차례차례 씻었고, 씻고 나오니 아침 식사할 때가 되어서 함께 식사했다. 이번에도 권지한과 비슷하게 식사가 끝났다.
권지한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식판을 복도로 내놨다. 둘은 나란히 양치질하고 안락의자에 앉았다. TV를 켜는 윤서에게 권지한이 물었다.
“이제 뭐 할 거야?”
“뭐 하다니요?”
“수많은 취미 중 어떤 거 할 거냐고. 뜨개질? 드라마 시청?”
윤서는 병실에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유언을 다 처리할 생각이어서 1분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일단 ‘러브 인 한강’을 틀어 놓은 윤서가 안락의자를 끌고 통창 앞에 앉았다. 물론 품에는 담요로 감싼 햅쌀이도 함께였다.
권지한도 이젠 또 뭐 하려고 하나, 흥미로운 눈으로 안락의자를 끌고 옆에 앉았다.
윤서는 편안히 앉은 채 통창 너머 하늘을 바라봤다.
“이건 무슨 취미야? 명상?”
“아뇨. 모양 구름 찾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