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82)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82)화(82/195)
10. 대던전
#75
하루가 더 지났다. 아직도 뉴스는 서채윤 소식이 대부분이었으나 이제는 던전 범람이나 폭발 같은 긴급 뉴스도 몇 개 정도는 헤드라인에 올라왔다.
수재희
형!!!! 드디어ㅠ 범람 몹들 다 잡았어여 하 진짜 열심히 일했다… 상으로 오늘 병문안 가도 돼요?
수재희
다들 형 보고 싶어 해요!!!! 새로 온 누나도 형 너무 보고 싶대요. 특히 저 커플들 지금 당장 병원에 달려가려는 거 제가 말렸어요. 한국인은 병문안 꼭 허락받아야 된다고. 잘했죠!!!!
형 전 형이 서채윤 님이라서가 아니라 윤서 형이라서 걱정돼서 병문안 가고 싶은 거예요. 진짜임!!!!!!!!1
오전 중에 1팀이 임무를 끝냈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이 오겠구나 예상은 했지만, 텍스트로도 너무 시끄러운 내용에 윤서가 미간을 좁혔다.
제 신분은 공개되지 않았으니 앞으로 메시지 보낼 때 조심해 주세요.
수재희
아 맞다! ㅇㅇ! 알겠습니다!!! 몇 시쯤 갈까용?
오지 마세요
수재희
ㅇㅁㅇ….
형….
S급들이 우르르 오면 시선 쏠려서 안 됩니다.
수재희
아 형 당연히 변장하죠… 제발….
어차피 내일 아침 퇴원이에요.
수재희
헉 벌써 다 회복했어요?
왜요 회복한 게 아쉽나요
수재희
;;;;;그럴 리가요^^
형이 퇴원해서 병문안 못 가게 돼서 너무너무 다행이당!
다음 주에 길드에서 보죠.
수재희
형,,, 주말에는 뭐 해요??ㅠㅠ
재희 헌터도 연달아 전투하느라 피곤했을 테니 쉬세요.
수재희는 그 뒤로도 포기 못 하고 전혀 안 피곤하다, 주말에 뭐 하냐, 영상 통화 하면 안 되냐 등등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윤서는 다 무시했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이번엔 2팀이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윤서가 햅쌀이를 쓰다듬으며 TV 화면의 ‘퍼펙트 2팀 폭발 임박 A급 던전 클리어’라는 헤드라인을 보고 있을 때 박수빈에게서 전화가 왔다. 영상 통화였다.
화면 속에서 박수빈은 방금 던전 클리어하고 나온 사람다운 조금 피로한 얼굴로, 방금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환자를 보듯이 윤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윤서 씨, 아직 병원이라고 들었어요. 병문안 가도 될까요?
“곧 퇴원하니까 오지 말고 쉬세요.”
– 벌써 퇴원한다고요?
박수빈은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닌지 미간을 확 찌푸렸다.
– 치유 내성도 있는 분인데 이렇게 빨리…. 설마 길드에서 퇴원하라던가요?
– 만약 그런 거면 석영 길드장에게 호통 한번 쳐야겠군.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알렉 목소리도 들렸다.
“아닙니다. 다 회복해서 퇴원하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수빈 씨와 다른 분들은 어디 안 다치고 무사히 나왔습니까?”
– 정말이에요? 던전에서도 괜찮다 괜찮다 하다가 픽 쓰러졌잖아요. 얼마나 놀랐는데.
“픽 쓰러지진 않았는데요.”
옆에서 권지한이 쿡쿡, 웃었다. 윤서가 그쪽을 흘기자 박수빈이 바로 눈치챘다.
– 옆에 누구 있어요?
“권지한 헌터가 절 감시 중입니다.”
– 아….
시종 걱정 가득했던 박수빈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전에도 느꼈지만 박수빈은 권지한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수빈 씨는 어디 다친 곳 없죠? 피곤해 보이는데요.”
– 저 멀쩡해요. 설마 권지한 헌터가 이번 주 내내 같이 있었어요?
“네, 아주 감사하게도요.”
– …….
박수빈의 낯빛이 한층 더 안 좋아졌다. S급 던전 클리어하자마자 거의 쉬지도 못하고 A급 던전에 들어갔으니 피곤할 만했다. 그를 생각해서 슬슬 전화를 끊으려 하는 그때였다.
– 야, 너! 너 지금, 윤, 윤… 그 사람이랑 통화하는 거지?
– 시끄러워요, 홍의윤 씨.
– 홍의윤 헌터, 조용히 하게나.
– 나도 좀 통화를….
– 또 무슨 말로 스트레스 주려고요? 이제 그만 좀 하세요.
박수빈의 목소리가 꽤 날카로웠다.
–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아니다. 그냥 나중에 내가 따로 연락해서…. 아, 씨발. 번호 모르는데.
– 절대로 알려줄 수 없어요.
– 하, 나도 너한테 알려달라고 안 할 거거든?
홍의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통화하지 않았는데도 윤서는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왔다. 윤서는 혹시 또 연락이 올까 봐 핸드폰 전원을 꺼 버렸다. 권지한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형, 연하한테 인기가 많네.”
“네?”
“수재희, 박수빈, 홍의윤. 전부 형보다 어리잖아.”
“홍의윤 헌터와는 한 살 차이밖에 안 나요. 박수빈 씨는 저보다 한 살 많고.”
“아, 그래?”
권지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왜 형이 더 나이 많은 느낌이지. 얼굴 말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가 뭔가 한참 위 같은데 백전노장이라 그런 건가?”
윤서가 움찔했다. <가이아의 눈>을 가지면 통찰력 같은 것도 생기는 걸까.
대던전에서 <사건의 지평선>으로 지구와는 다른 시간을 보냈기에 어떤 의미로는 맞는 말이었다. 신체는 나이를 먹지 않았지만 영혼은 고스란히 시간의 흐름을 느꼈으니까.
그때 권지한이 정색하며 말했다.
“말해 두겠는데 형이 늙어 보인다는 건 절대로 아니야. 사실 내가 형을 형이라고 부르는 게 괴리감 느껴질 정도로 어려 보이고 예쁘니까 그런 오해는 하지 마.”
“집어치우세요. 토할 뻔했습니다.”
“이상한 형이네. 예쁘다 그러는데 왜 토할까. 설마 수줍어하는 거야? 귀엽다.”
윤서는 그냥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수재희 쪽과 박수빈 쪽도 무사한 걸 알고 나니 마음도 편해져서 드라마나 보기 위해 채널을 변경하는데 권지한이 화제를 이어 갔다.
“형, 있잖아. 내 얼굴은 어때?”
“뭐요?”
“나 잘생겼지? 어디 가서 외모로 꿀려 본 적 없어.”
“권지한 헌터는 건방지게 생겼습니다.”
“애매한데. 칭찬이라고 생각할게.”
“싸가지 없게 생겼어요.”
“너무 잘생겼으면 얼굴에 싸가지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더라.”
“아주 그냥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네요.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건지 모르겠군요.”
“진짜로 나 어때? 잘생기지 않았어?”
“건방지게 생겼다니까요.”
“에휴.”
권지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결혼 생각은 없는데, 이 유전자를 후대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은 들어.”
“왜 결혼 생각은 없어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결혼을 하겠어.”
“…….”
“형은 어때?”
“저도 없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윤서가 문득 든 궁금증에 물었다.
“권지한 헌터, 혹시 어떤 사람 좋아합니까?”
“이상형이라면 말했듯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그게 아니라, 성적으로 어느 성별한테 끌리냐고요.”
“몰라.”
“네?”
“나 아무도 좋아해 본 적 없어서 남자 좋아하는지 여자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그래도 신체적으로 어떤 성별에 끌리는지는 알 수 있잖아요.”
“모르겠는데. 난 다른 사람이랑 손도 잡아 본 적 없어서.”
권지한은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듯 당당하게 덧붙였다.
윤서는 권지한과 대화할 때마다 놀라고 또 놀라는 기분이었다. 이 녀석은 잘생겼고, 능력 있고, 신념 뚜렷한 데다가 심지어 순수하기까지 해? 어떻게 이 썩어 빠진 세상에 아직도 권지한 같은 놈이 존재하는 거야?
“형은 남자 좋아해, 여자 좋아해? 아니면 아직 형도 손도 안 잡아 봤어?”
“제 나이가 몇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나이가 몇이든 아직 경험 없을 수도 있지. 나이는 숫자일 뿐이야.”
편견도 없어!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지?
윤서는 자신이 상당히 편파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차라리 자각하지 못한 게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형은 어느 성별한테 더 끌려?”
“저는 양쪽 다 가능합니다.”
“그렇구나….”
잠시 침묵에 잠겼던 권지한이 뭔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거 양쪽 다랑 해 봤다는 뜻이야?”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네요.”
“나는 다 얘기해 줬잖아.”
“드라마나 보세요.”
윤서가 TV 볼륨을 키웠다. 다행히 권지한은 더 묻지 않았다.
확실히 요 며칠간 권지한은 달라졌다. 무신경하게 떠보고, 자극하고, 도발하던 녀석이 상대가 싫다고 하니까 더 물어 오지 않는다.
사실 윤서가 대화를 그만둔 건 더했다간 제가 질문을 쏟아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명 접근하는 사람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거절했는지. 혹시 손은 안 잡아 봤는데 입은 맞춰 본 건 아닌지.
‘오늘로 퇴원이니까 이제 둘만 만나는 것도 끝이야.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겠지. 앞으로는 사람들이랑 같이 볼 테니까 대화도 줄어들 테고. 좋아. 순탄해.’
퇴원 수속은 내일 밟을 예정이지만 사실상 오늘 밤 퇴원이었다. 오늘 밤에 석영 길드장의 자택에서 만난 후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늦은 밤, 극비리에 열리는 모임의 멤버는 석영 길드장, 석영 부길드장, 에우로페 길드장 그리고 권지한과 윤서였다. 처음엔 태재식과도 만날 거라고 얘기했는데, 결국 최종 명단에서는 빠진 걸 보면 분명 외부로 새어 나가면 안 되는 중요한 이야기를 할 모양이었다. 권지한도 엄청나게 심각한 얘기를 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해 놓으라고 했고.
윤서는 그 대화의 주제보다는 지금 당장 권지한에게 정들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 찌개에서는 돼지고기 냄새가 너무 많이 났어요. 난 김치찌개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어.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누가 만들었다는 거야? 당장의 의심을 피하고자 거짓말을 하면 안 돼. 너는, 주방을 책임지는 셰프라고!”
“꽁치….”
“뭐?”
“이제 모든 걸 알겠어. 꽁치김치찌개를 끓이던 그 작자가 범인이에요. 내게 뒤집어씌우려는 거였어요!”
따단, 따단딴. 드라마에서 격정적인 대화와 BGM이 흘러나왔다. 덕분에 윤서도 상념에서 벗어났다.
‘예전엔 그 녀석 취미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러브 인 한강’은 매회가 이렇게 격정적이었다.
‘야, 너는 뭐 이런 이상한 드라마를 보냐?’
‘이상하다니, 대하 김치찌개 드라마를 향해 감히 그런 표현을 해?’
‘대하 김치찌개 드라마 자체가 너무 이상한 조합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도 언젠가는 꼭 1화부터 정주행해. 한강과 사랑 그리고 김치찌개와 우주에 관한 깊은 철학이 담긴 대하 드라마니까.’
이도민은 대던전에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내내 드라마를 돌려 봤다. 윤서는 그 녀석이 부탁할 때마다 <스파크>로 노트북을 충전해 줬다.
한 번은 대체 뭐가 그렇게 재미있나 싶어서 리벤저들과 다같이 1화를 본 적 있었는데, 윤서의 취향이 다행히 정상이었던 건지 아무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노트북이 용암 속으로 잠겨 들어간 뒤로 이도민은 ‘러브 인 한강’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
윤서는 눈썹을 찡그리고는 햅쌀이를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