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83)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83)화(83/195)
#76
손길이 멈추자 바로 햅쌀이가 껍데기를 진동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윤서는 왼손으로 알을 쓰다듬고, 오른손으로는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권지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한 손으로 익숙하게 약병 뚜껑을 열고 알을 꺼내 삼키려는데 권지한이 잠깐, 하고 말했다.
“형은 왜 약을 물이랑 같이 안 먹어?”
“귀찮습니다.”
“<염력> 어따 맡겨 놨어?”
“마력 일으키기도 귀찮을 때가 있어요. 전 권지한 헌터처럼 성실하진 않거든요.”
“이건 성실한 거랑은 다른 것 같은데…. 아무튼 알았어. 내가 떠 줄게.”
권지한이 일어났다. 설마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권지한은 정수기로 성큼성큼 향하더니 한 컵 가득 물을 받았다. 그러고는 곧장 윤서에게 다가와 컵을 내밀었다.
“…잘 마실게요.”
“응.”
손가락이 스쳤다. 윤서는 깜짝 놀라 컵을 떨어뜨릴 뻔했지만 S급의 반사 신경으로 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권지한 덕분에 물과 함께 약을 삼키고 약병을 집어 넣었다.
“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요? 왜 나한테 꽁치 누명을 씌우려고 한 거예요?”
“…사랑해서.”
“뭐?”
“사랑한다고, 젠장! 처음엔 뭐 이딴 인간이 있나 했는데 어느샌가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단 말이야.”
드라마에서는 열렬한 사랑 고백이 이어지고 있었다.
물 한 컵을 전부 들이켠 윤서는 테이블에 컵을 탁, 소리를 내며 내려놨다.
“더 떠 줄까?”
“괜찮습니다. 드라마나 보세요.”
“응.”
권지한이 옆 의자에 앉았다.
“저 드라마 은근히 중독성 있는 것 같아. 소재는 존나 유치하고 어이없는데 나름 복선도 충실하고 세계관도 짜임새 있어. 마지막 반전도 되게 놀랍더라.”
“반전이요?”
“아, 형이 하도 재미있게 보길래 나도 집에서 며칠 동안 다 봤거든. 1화부터 마지막 화까지.”
윤서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러브 인 한강’은 무려 42화나 되는 대하 드라마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여기에 문병 오니까 밤과 새벽 사이에 42화를 전부 봤다는 뜻이었다. 몇 화 정도는 여기서 같이 봤다고 해도, 개인 시간을 모두 드라마 보는 데에 썼다는 거다.
설마…. 거짓말 아니야?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윤서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물었다.
“마지막 반전이 무슨 내용이었지 말해 보세요.”
“나 테스트하는 거야?”
“네.”
권지한이 쿡쿡, 웃고는 말했다.
“마지막 화에서 우승한 식당 커플한테 누군가 접근하잖아. 사실 이 대회는 평범한 김치찌개인들은 알지 못하는 궁극의 김치찌개 세계에 다다를 김치찌개인들을 뽑는 대회였고, 앞으로는 새로운 김치찌개 세계가 펼쳐질 거라고, 그대들이 선구자가 되어 달라고 하면서 끝나지. 한 마디로 새로운 김치찌개 우주 입성을 앞두고 뉴비들을 위해 튜토리얼을 한 거지.”
“…정말 봤군요.”
윤서가 멍하니 말했다. 윤서의 두 뺨이 발갛게 물들어 갔다.
“재미있더라. 형이 왜 좋아하는지 알겠어. 그런데 제목은 러브 인 김치찌개로 바꿔야 할 것 같아. 한강은 이용만 당했어.”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갈등이 해결된 장소가 전부 한강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러브 인 한강이 맞는 것 같아요.”
“아,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연애 진척은 전부 다 한강에서 했구나.”
“재탕하면 보일 거예요. 이 드라마는 재탕할수록 새로운 게 보이는 스타일이라서.”
“앞으로 열심히 봐야겠다. 난 주인공 커플도 좋지만 조연 커플도 마음에 들었어. 맹랑한 어린애랑 세상 다 산 어른이 커플이 되니까 서로 성격이 반대가 돼서 너무 웃겼어.”
“그렇죠? 저도 그 커플 웃겼어요. 나중엔 입맛도 바뀌어서 주인공 커플이랑 꽁치랑 돼지고기도 같이 먹고.”
“그거 보고 배고파져서 꽁치김치찌개 끓였잖아. 새벽이었는데.”
“저도 그런 적 있습니다. 못 참겠더라고요.”
윤서의 얼굴이 완전히 발그레해졌다. 그는 자신이 덕질하는 작품에 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몹시 즐거웠다. 낙엽의 고희원도 박영범도 ‘러브 인 한강’을 비웃기만 하고 절대 넘어오지 않았는데. 윤서는 진심으로 죽을 때까지 누군가와 드라마 얘기를 할 날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던전에 있을 때는 이 드라마의 즐거움을 모르고서 덕 토크를 하지 못했고, 드라마의 즐거움을 알았을 때는 같이 덕질할 사람이 없어서 덕 토크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무려 권지한과 이런 얘기를 하다니….
“이거 준철이 형이랑 재희한테도 영업하려고. 소재 진입 장벽만 없으면 재미있다고 말해야지. 아예 퍼펙트에 필수 관람하라고 지령 내려 버릴까? 내가 영업할 때 형도 옆에서 거들어.”
“물론이죠.”
심지어 주변에 영업까지 한단다!
‘권지한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퇴원하고 나면 멀어지기로 한 다짐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마음의 빗장은 한없이 풀려 가고 있었다.
***
늦은 밤, 병실을 정리한 권지한과 윤서는 포탈 스톤으로 유준철의 저택에 도착했다. 둘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유준철과 도등수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채윤 헌터.”
“서채윤 헌터, 처음 뵙습니다. 석영 부길드장 도등수입니다.”
“안녕하세요.”
윤서는 유준철과 도등수에게 차례차례 인사했다. 두 사람은 윤서의 품에 있는 알을 보고서 움찔했으나 언급하지는 않았다. 권지한에게서 얘기 들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마력은 충분히 회복하셨습니까?”
“…….”
사실 윤서는 건강에 대해 물으면 무조건 아직 회복 다 못 했고, 너무 피곤하고 어지럽고 서 있는 것도 힘들다고 엄살 부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앞의 두 남자를 보니 엄살이 쏙 들어갔다.
둘 다 A급 각성자임에도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다. 하긴… 서채윤 때문에 온갖 곳에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았을 것인가. 도저히 엄살도 부릴 수 없고, 화도 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네, 다 회복했습니다.”
“다행이군요. 들어가시죠.”
응접실에는 이미 긴 대화를 위한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차와 다과, 테이블 중앙의 영상구까지…. 그리고 테이블 가운데에는 긴 금발을 늘어뜨린 여자가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채윤 헌터. 에우로페의 길드장 그레이스 엘리시아입니다.”
그레이스가 일어나 인사했다. 그녀는 통역 도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TV로만 보아 왔던 S급 예언자의 등장에 윤서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서채윤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라 비지나 헌터도 오고 싶어 했는데, 지금 많이 불안정한 상태라 오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윤서는 라 비지나의 안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아마 라 비지나도 묻지 않았을 것이다.
윤서가 걸어가 앉는 동안 그레이스의 시선이 빤히 그를 향했다. 실례라는 생각도 못 할 만큼 서채윤이 신기한 것이다.
유준철과 도등수가 나란히 왼편에 앉고, 그 맞은편에 윤서와 권지한이 앉았다.
테이블 한쪽에 서류들이 놓여 있었다. 유준철이 서류를 쓱 내밀며 입을 열었다.
“우선 본론 들어가기 전, 전달해드릴 게 있습니다. 서채윤 헌터의 연금과 관련된 서류입니다. 저희 길드에서 직접 정부 쪽에 연금을 요청했습니다. 복잡한 절차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윤서가 서류를 대충 훑었다. 서명은 하지 않고 내려놓자 유준철이 눈짓했다. 도등수가 얼른 인벤토리에서 작은 병들 여러 개를 꺼내 테이블에 늘여놨다. 유준철이 설명했다.
“이건 각종 상태 이상을 없애주는 S급 포션들인데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그래도 윤서가 묵묵부답이자 유준철과 도등수는 S급 아이템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석영 길드가 금품으로 서채윤의 마음을 달래려 하는 것이다.
“사람이….”
윤서가 입을 열었다. 유준철과 도등수, 그레이스가 동시에 움찔했다.
“사람이 정신을 잃은 사이 복귀한다고 냉큼 발표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게 그렇게 힘들었습니까?”
“아니, 그. 일단 저희 길드 경험치가 대폭 깎여나간 상황에서, 이제 곧 말씀드리겠지만 재앙급의 일까지 일어나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저희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
윤서가 유준철을 가만히 쳐다봤다. 분위기가 싸늘했다. 주절주절 변명하던 유준철이 A급 헌터의 본능으로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권지한이 말했다.
“왜, 형. 계속해. 형을 보고서 사과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배우던 참이었는데.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하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구나. 나도 이런 적 있는데 반성할게.”
권지한의 담담한 목소리에 안 그래도 창백한 낯빛이 더욱 하얘졌다. 유준철은 마침내 윤서를 향해 진지하게 사과했다.
“동의 없이 기사를 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절대로 없을 겁니다.”
“좋습니다.”
윤서는 단번에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제 얘기 시작하세요.”
유준철은 서채윤의 그런 태도에 그가 처음부터 이 일을 가지고 화를 낼 생각이 없었다는 걸 알고 사과하기 전보다 더욱 심란해졌다.
‘보통 화내야 하는 상황에서 화를 안 내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지. 너무 너무 착하고 순한 경우. 혹은 아예 상대에 대한 기대가 없는 경우.’
서채윤은 아예 우리에게 기대가 없는 것이다. 업보가 돌아온 것임에도 씁쓸했다.
일단 지금은 이런 걸 곱씹을 상황은 아니었다. 유준철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입을 열었다.
“지한이가 아직 아무 얘기도 안 한 것으로 압니다.”
“그냥 심각한 사안이라고만 하더군요.”
“…심각한 사안이라.”
유준철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응접실 조명이 어두운 데다가 그레이스, 도등수도 다 얼굴에 그림자가 져 있었다.
“전 세계의 운명이 달린 극비 사항이라 서채윤 헌터께서도 오늘 이야기를 들은 후 꼭 함구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냥 윤서라고 불러 주세요. 외부에는 계속 정체를 숨기고 싶으니까.”
“예, 윤서 씨.”
유준철이 침을 꼴깍 삼켰다.
좀처럼 본론을 꺼내지 못하는 이를 보며 윤서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머릿속으로 몇 개의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석영은 대체 무엇을 위해 2년간 서채윤을 찾았던 걸까.
경험치를 쌓아 레벨 업을 해야 하는 권지한을 위해서?
아니면 길드 아이콘으로 대외 활동을 하라고 할 셈인가?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이렇게까지 무거운 분위기로 심각하게 얘기할 일은 아니었다. 결국 답은 하나다.
‘가이아 스킬과 관련이 있는 거야.’
권지한은 가이아 스킬 보유자, ‘선택된 자’이다. 저도 언젠간 권지한에게 ‘선택된 자’ 특성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다. 그런 건 달고 있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그걸 달고 있던 이들은 모두 죽었다고. 어차피 특성을 떼어 내는 방법은 모르지만 그 말은 해주려고 했다.
윤서는 담담히 유준철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우선 저희가 윤서 씨를 추적한 이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준철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 달 반 후, 북극에 대던전이 나타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