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84)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84)화(84/195)
#77
“…….”
윤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형선고라도 내리듯 그레이스가 이어서 말했다.
“그 대던전은 10년 전에 나타났던 대던전과 완전히 같은 것이라는 계시가 내려왔습니다.”
***
그들은 모든 걸 설명했다. 2년 전의 첫 계시, 권지한의 가이아 스킬 입수, 서채윤 추적, 최근의 새로운 계시, 검은 포탈로 들어가는 한 사람.
윤서는 담담히 들을 수가 없었다. 대던전이 다시 나타난다는 첫 문장 때부터 호흡이 가빠 오더니 나중엔 호흡 곤란까지 찾아왔다. 그레이스는 놀라서 말을 멈춰야 했다.
“형.”
권지한이 빠르게 떠다 준 물을 들이켜고 신경 안정제를 삼켰지만 불안 증세는 여전했다.
“계속하세요.”
윤서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저희는 그레이스 헌터가 본 대던전 속의 검은 포탈을 클리어하면 가이아 스킬 입수 시 나온 메시지의 ‘새로운 세계’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 비지나 헌터의 말에 의하면 10년 전 대던전 때 검은 포탈이 사라지기 전 어떤 메시지가 떴다는데, 본인은 직접 보지 못했고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윤서 씨가 이 부분을… 얘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더불어 대던전 지형과 출몰하는 몬스터들에 대한 것도 기억하는 대로…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준철은 목이 타는지 차를 들이켰다. 그때 권지한이 입을 열었다.
“형은 다시 안 들어가도 돼. 치유 내성 있는 사람 들여보낼 생각 없어. 떠올리기 힘들겠지만, 우리가 어떤 지형에서 어떤 놈들과 싸워야 하는지만 알려줘.”
“아뇨. 저도 들어갑니다.”
“안 돼. 치유 스킬도 안 통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그곳에서 동료를 몇이나 잃었는지 알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 말은 못할 텐데.”
“…….”
“저는 반드시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잠깐 조용히 하세요. 생각을 좀 할 테니까.”
권지한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
모두 각자의 생각에 잠긴 가운데 윤서 또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복잡한 감정을 추슬렀다. 햅쌀이는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손에는 약병만 쥔 채였다.
전부 듣고 나니 왜 서채윤을 찾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태재식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일이 좀 더 간단히 풀렸을 텐데. 이런 이유라면 윤서는 당장 길드장실로 쳐들어가서 내가 서채윤이오, 하고 자진 납세했을 터였다.
물론 태재식에게 이런 중대한 사안을 밝히지 않은 것도 충분히 이해는 했다. 그 아저씨가 알았다면 지금은 시골 깊은 산 속에 틀어박힌 자연인도 이 소식을 알고 있을 테니까.
‘아니…. 그 아저씨가 말했어도 절대 안 믿었겠네.’
대던전이 다시 나타난다니.
새로운 레드-블랙 던전도 아니고, 클리어한 던전이 10년이나 지난 지금 나타난다는 걸 어떻게 믿겠는가.
대던전, 리벤저, 죽음과 희생. 머릿속에 떠다니는 단어들을 끌어모아 모조리 치워 버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뇌 속의 사전에서 그것들을 삭제하고 싶었다.
유언이나 빨리 해치우고 죽을 생각을 하고 있던 자신이 멍청이 같았다.
언젠가는 검붉은색의 포탈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그래서 죽기 전에는 대던전 공략 내용을 글로 남길 거라고도.
그러나 10년 전의 던전이 다시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검은 포탈 때문인가?’
검은 포탈에 들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 기회를 줄 테니까 대던전에 들어가라고 가이아 시스템은 말하고 있는 걸까?
그 지옥에 다시 갔다 오라고.
네가 가야만 한다고.
그래서 ‘선택된 자’ 특성도, 가이아 스킬도 회수하지 않은 건가.
“형, 괜찮아?”
입술을 잘근잘근 뜯으며 생각에 잠긴 윤서를 권지한이 나직이 불렀다. 윤서는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반응하지 않았다.
“윤서 형.”
“…….”
“서채윤.”
윤서가 미간을 찡그리며 권지한을 노려봤다. 권지한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눈으로 윤서의 표정을 살폈다.
“형 상태 너무 안 좋아 보이는데 나머지 얘기는 나중에 할까? 위에 침실 마련해 놨어.”
“그래요, 윤서 씨. 시간도 늦었고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도 힘들 테니 내일 일어나서 합시다.”
셋이 보기에도 윤서의 상태가 심각해 보여서 동의했다. 대던전 공략법을 듣는 건 최우선 사항이지만, 약을 달고 사는 이를 무리시켰다가는 큰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권지한이 먼저 일어나고는 부축하겠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윤서는 그 손에는 시선 한번 안 주고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전 멀쩡하니 계속 얘기하죠. 나머지 얘기라는 건 뭡니까?”
“아니, 우리 쪽에서 더 할 말이 남았다는 건 아니야. 대던전 공략법과 검은 포탈에 대한 얘기를 자고 일어나서 하자는 거지.”
“대던전은 넓은 곳이고 출몰하는 몬스터들도 셀 수 없습니다. 설명하는 데에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몰라요.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일단 오늘 첫 번째 지형만이라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진짜 괜찮아?”
“괜찮습니다.”
권지한이 윤서의 표정을 물끄러미 훑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권지한이 도로 앉자 도리어 셋이 당황했다.
“윤서 씨, 지금 정말 상태 안 좋아 보입니다. 손이랑 다리도 덜덜 떨고 있고, 얼굴빛도 창백하고요.”
“손 떠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건 내 정신력과는 상관없는 거예요. 어차피 이 상태론 한숨도 못 잘 테니까 시간 허비하지 말죠.”
“하지만.”
“우리 형이 괜찮다잖아.”
권지한이 툭 내뱉었다. 윤서를 포함해 넷이 권지한을 쳐다봤다.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왜들 호들갑이야. 형, 얘기 시작해.”
“…….”
권지한은 경청할 준비가 됐다는 듯 미소 지으며 자세를 잡았다. 윤서의 손 떨림이 잦아들었다. 윤서는 피식 웃고는 유준철에게 말했다.
“일단 얘기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제 쪽에서도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윤서 씨.”
“그게 10년 전과 똑같은 대던전일 거라고는 어떻게 확신하죠? 검고 붉은 포탈의 새로운 S급 던전일 수도 있잖아요.”
“예언자의 계시는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습니다. 특히 S급인 그레이스 길드장의 계시는 더더욱…. 10년 전의 대던전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클리어한 던전이 다시 나타난 적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상하지 않아요? 왜 다들 그냥 받아들이는 겁니까? 클리어한 던전이 다시 나타난다는데…. 그것도 대던전인데.”
“2년 전에는 저희도 많이 놀랐습니다. 그러나 던전이 발생하는 프록시마 b는 지구보다 몇 배나 크다 해도 어쨌든 한정된 지역이고, 던전이 발생한 지도 벌써 12년이 되었으므로 이제 슬슬 같은 구역이 나타나도 이상할 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앞으로도 대던전 재탕이 몇 번이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그래서 형한테서 정보를 듣고 대비하려는 거지.”
권지한이 무서운 소리를 가볍게 내뱉었다.
유준철이 왜 아직 불안정한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냐고 노려보자 권지한은 합당한 추리를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윤서가 입술을 깨물며 창백한 얼굴로 째려보자 권지한은 “미안….” 하며 사과했다. 그 사과에 윤서는 이번만 봐주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일련의 행동에 유준철은 조금 놀랐다. 권지한이 무신경한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닌데, 이렇게 빠른 사과는 처음이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가이아 시스템은 확실히 게으른 면이 있으니 언젠가는 던전 재탕 같은 짓을 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번 대던전은 그런 게 아니에요.”
윤서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시선이 집중됐다. 윤서는 약병 뚜껑을 당장이라도 열 것처럼 손가락으로 문질렀는데 열지는 않았다.
“그럼 윤서 씨는 다시 나타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고견을 들려주신다면….”
“라 비지나 헌터는 뭐라던가요?”
“말씀드렸다시피 검은 포탈이 사라지고, 어떤 메시지가 떴다는 게 끝입니다. 자신은 그 메시지를 직접 보지 못했고, 누군가가 말해줬다고 했어요.”
라 비지나와 가장 자주 접촉했던 그레이스가 대답했다.
“다른 얘기는 안 했습니까? 그곳에 출몰하는 몬스터들이나 지형 같은 것.”
“안타깝게도 그분은 대던전 공략에 300년이 걸렸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형편이라….”
“…….”
“공략 기간은 77일이었으나 300년으로 느껴질 만큼 끔찍했던 거겠지요….”
윤서가 눈을 감았다. 창백한 얼굴에 괴로운 감정이 스쳤다. 약병 뚜껑을 열 것처럼 손가락 끝이 하얘졌다. 권지한이 바로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이러다 우리 형 또 약 먹겠네. 약물 중독자 되겠어.”
“안 먹어요.”
윤서는 이맛살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눈을 감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동안 주변은 침묵했다.
A급, S급 헌터들인 그들은 윤서의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고 있었다. 듣는 이를 초조하게 만드는 박동이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윤서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한동안 적막이 흐른 후 윤서가 눈을 떴다. 진정하기를 바랐건만 갈색 눈은 여전히 공허하고 위태로웠다.
윤서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순서대로…. 진입 첫날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한 번도 머릿속에서 정리한 적이 없어서 뒤죽박죽이라 시간순으로 설명드리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예, 편한 대로 말씀해주십시오. 지형과 출몰한 몬스터들, 그곳에서 나온 아이템들까지 기억하는 한에서 천천히 말씀해 주시면 여기 영상구에 음성 인식으로 자동 입력 될 겁니다.”
윤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던전의 지형은 크게 총 네 곳이었습니다. 용암, 늪, 산맥, 그리고 마지막은 신전.”
***
윤서는 진입 첫날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당시 멸망 직전이던 상황에서도 여러 국가에서 장갑차, 자주포 등 화기를 끌어모아 지원했었는데 그게 거의 다 진입하자마자 녹아 버렸다는 사실을 말하자 모두가 탄식했다.
그러다 윤서가 용암 지대에 출몰한 몬스터들을 잡몸까지 하나하나 형태과 특징을 설명하자 그들은 묘한 표정이 되었다.
“아직도 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네, 전부 기억합니다.”
윤서는 자신이 대던전에서의 일들을 전부 기억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끄덕였지만 다른 이들의 분위기는 조금 가라앉았다.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용암 지대라는 지형이 문제였죠. 이곳에서만 33일을 머물렀는데-.”
“30일이요? 지형이 네 곳이라 하셨잖아요. 첫 지형에서만 공략 기간의 거의 절반을 보냈던 겁니까?”
“대답하기 애매합니다. 그것 때문에 라 비지나 헌터가 300년이라고 얘기한 거고.”
“예…?”
셋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들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