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85)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85)화(85/195)
#78
윤서는 차가워진 손을 주무르며 말했다.
“이도민 헌터가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고유 스킬을 사용해서 던전의 시간을 멈췄습니다.”
“…….”
마치 윤서가 언령을 사용해 시간을 멈추기라도 한 듯 한순간 공간이 조용해졌다.
윤서는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킬이란 건 마치 마법이나 초능력과 같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을 가능하게 한다. 학자들은 이미 스킬 이론 정립을 포기했다.
그러나 시간을 멈춘다니…. 얼마나 믿기 어려울까.
이 사람들한테 <사건의 지평선>의 원리를 설명해야 하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윤서도 그냥 그런 스킬이구나 하고 넘어간 거지 이해해서 넘어간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대충은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여는 그때였다.
“‘사건의 지평선’이라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입자가 외부 시공간으로 탈출할 수 없는 블랙홀의 경계선을 말하는 거군요. 막대한 질량으로 입자의 경로를 왜곡시켜서 빛조차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경계 말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사건의 지평선’과 같은 스킬이라면 전부 이해가 되네요. 사건의 지평선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은 외부에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지구에 사는 우리로선 몰랐던 거고요.”
“…….”
이게 대체 언제부터 익히 아는 이론이었어?
그때 그레이스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그럼 라 비지나의 말이 맞는….”
윤서는 그레이스가 차마 잇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알기에 담담히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300년은 과장이 심합니다. 고작 3년일까.”
“아아…….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레이스가 울먹거렸다.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라 비지나가 300년 같은 얘기를 할 때 한숨만 내쉬었다고. 너무 후회스럽다고. 윤서의 생각보다 둘의 친분이 더욱 끈끈한 듯했다.
“사실 이런 시간 구분은 의미가 없어요. <사건의 지평선>은 시간을 흐르지 않게 하는 스킬이니까. 3년이든 300년이든 그저 체감일 뿐 스킬을 사용하는 동안의 시간은 멈춰 있었습니다. 그러니 77일 걸린 게 맞아요.”
윤서는 담담하게 위로했으나 그레이스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진 듯했다. 옆에서 좀 위로해줬으면 했는데, 유준철과 도등수도 크게 충격받은 듯해서 그런 건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권지한은….
“…….”
입술을 깨문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윤서의 시선을 느끼고는 눈을 마주쳐 왔다. 윤서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잔인한 시간을 보낸 건 이쪽인데 왜 네가 상처받은 얼굴이야.
윤서는 권지한이 상상 이상으로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지만, 그에 대한 말은 더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용암 지대의 보스 몬스터들을 설명할 때는 태블릿에 직접 그림을 그렸다. 10년간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 수백 점을 그렸다 보니 그의 그림 실력은 대단히 뛰어났다. 권지한이 윤서의 옆에 바짝 붙어서 그림을 내려다보고는 하나를 짚었다.
“이건 S급 레드 던전에 나오는 지렁이 놈이네. 거대 화염 웜이라고 이름 붙였지. 옆에 두 마리도 여기랑 여기에 갈색 털이 달린 놈들이랑 비슷하게 생겼어.”
“거대 화염 웜은 상대하기 어땠습니까?”
“강력한 화력으로 단번에 불태워 죽여야만 해. 재생 속도랑 분열 속도가 빨라서 어중간하게 공격하면 보스 몬스터 양산만 하는 꼴이라.”
“1페이즈 내로 끝내야 한다는 소리군요.”
권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두 마리도 거대 화염 웜과 비슷하다고 가정해 본다면 내가 한 마리 맡고, 커플이랑 수재희, 알렉이 한 마리 맡고, 마지막 한 마리는 홍의윤, 가미라 같은 공격계 헌터들한테 버프 스킬을 잔뜩 걸어서 집중 사격 하게 하면 될 거야.”
“그건 보스 웜들을 맞닥뜨렸을 때 스킬 쿨타임에 문제가 없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용암을 떠도는 잡몹들도 A급이란 걸 잊으면 안 돼요. 수가 무척 많고, 그놈들 역시 보스처럼 한 번에 죽여야 하죠. 2팀 팀원들은 그놈들 처리하다가 쿨타임을 소진해 버릴 겁니다.”
“대던전 진입 예정 멤버는 퍼펙트뿐만이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유준철이 말했다.
윤서가 이해하지 못한 듯 의아한 표정이자 유준철이 말을 이어갔다.
“유럽의 에우로페 길드, 미국의 S 길드, 엔드리스 공략 팀, 우리 퍼펙트 등 주요 공격대와 용병들을 포함하면 450명이 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리벤저보다는 적은 수지만, 모두 정예 헌터들로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전력이죠.”
“그들도 대던전 발생 사실을 아는 겁니까?”
“다음 달에 알릴 예정입니다.”
운서는 유준철의 당당한 대답에 조금 어이가 없었다.
당사자들에게는 아직 알려주지도 않았으면서 대던전에 진입할 헌터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그려 놓은 게 어처구니없었던 것이다.
“알려줬을 때 싫다고 하면? 강제 동원이라도 할 생각인가요? 그리고 거부하면 헌터 자격을 박탈하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초기 헌터 법에는 레이드 헌터의 경우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면 헌터 자격이 박탈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곳이라 하더라도 위에서 명령하면 던전에 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헌터가 죽으면 명예롭고 정의로운 영웅으로 추앙한다.
추앙받는다 한들 죽으면 무슨 소용이지?
정말이지 구역질 나오고 환멸 나는 일이었다.
윤서의 삭막한 눈에 경멸이 차오르자 유준철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지원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대던전 발생 사실을 알리고, 지원을 받아서 공략 멤버를 구성할 생각이었습니다.”
“만약 거부하면요? S길드나 엔드리스 공략 팀이 대던전에 들어가지 않겠다 하면 어쩌려고 450명이니 뭐니, 차원이 다른 전력이니 뭐니 하는 겁니까?”
“설마 거부하겠습니까. 다름 아닌 대던전인데…. 알려 주면 당연히 다들 참전할 겁니다. 지구가 멸망할 위기에서 외면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
윤서가 실소를 터뜨렸다. 이걸 믿으라고 하는 말인가?
석영은 헌터 법 규정을 입맛대로 수정하는 것쯤은 간단히 해 버릴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 게다가 이 자리에는 S급 예언자이자 에우로페의 길드장도 있다. 두 사람이 함께라면 사라졌던 규정을 부활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윤서의 분위기가 점점 사나워지자 유준철은 식은땀을 흘리며 난처해했다. 그때 권지한이 나섰다.
“형, 오해하지 마.”
그의 말투는 퍽 부드러웠다.
“형이 석영을 불신하는 건 이해해. 그런데 준철이 형은 지금 진심이야. 대던전 발생 사실을 알리면 많은 헌터가 기꺼이 제 목숨을 걸고 지원할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 거지. 절대로 헌터 법을 바꾸는 일은 없을 거야. 형 스킬로 확인해도 돼.”
“…….”
윤서가 권지한을 빤히 바라봤다. 유준철과 도등수, 그레이스는 싸움이 일어날까 봐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는데 권지한은 그런 걱정은 없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윤서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석영 길드장쯤 되는 분이 아주 꿈속에서 살고 계시는군요.”
여전히 신랄한 비판이 흘러나왔다. 권지한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럼 형은 헌터들이 자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10년 전에도 1,203명이나 자원했는데?”
“그렇게 자원했다가 전부 죽었잖아요.”
“많이 죽었지만 결국 지구를 지켜 냈지.”
“지구를 지키면 뭐 합니까. 본인은 죽고 없는데. 자신은 죽고 없을 세상을 구하는 일에 대체 어떤 멍청이가 자원을 하겠어요?”
“나.”
“…….”
“그리고 여기 두 형도 이미 참가하기로 했어.”
권지한이 도등수와 유준철을 가리켰다. 윤서가 쳐다보자 도등수와 유준철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보통 이런 말을 들으면 희생정신과 정의로움에 감탄해야 맞는데 윤서의 시선은 한심하고 아둔한 자들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윤서로서도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방법은 강제 동원 아니면 자원을 받는 것 두 개뿐이고, 전자보다는 후자가 합리적이다.
“알아서 하세요. 어차피 다른 수도 없고 제가 뭐라고 터치할 부분이 아니군요. 단 미리 유언장을 써 두고 들어가는 편이 좋을 겁니다. 다시 못 나올 수도 있으니까.”
“예, 뭐. 유언장은 본래도 분기별로 갱신하고 있어서…….”
유준철이 안경테를 추어올리며 머쓱하게 말했다.
“유준철 헌터는 그렇게 유언장 갱신해 가면서 목숨 걸어야 하는 이 일에 만족합니까?”
“…세상엔 나 하나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진 게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유준철 헌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
“사실은 아주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유준철은 입술을 다물었다. 윤서는 ‘모릅니다’라고 끝맺었으나 체념과 같은 확신이 담긴 어조였다.
유준철은 윤서의 가치관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고, 더 얘기하면 그의 반감만 살 것 같아서 아무 대꾸를 안 하는 쪽을 택했다.
도등수와 그레이스도 분위기를 읽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윤서도 한참 말이 없었다.
아까보다 무거워진 분위기에 다들 난감한 상황에서 권지한이 입을 열었다.
“용암 지대는 얼추 끝난 듯한데, 나머지는 내일 계속하자.”
권지한이 가벼운 말투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이미 시간은 새벽 네 시가 넘은 상태였다.
“윤서 형도 여기서 자. 여기 방 많아. 형 방도 마련해 놨어.”
“전 제집에서 자겠습니다.”
윤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람들도 우르르 그를 따라 일어섰다.
윤서는 오전 중에 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차를 타고 떠났다.
그가 떠나자 권지한을 제외한 세 명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의미가 담긴 복잡한 한숨이었다.
유준철은 서채윤에게서 반감을 산 것 같아 크게 낙심했고, 도등수와 그레이스가 그를 위로했다.
일행은 윤서가 돌아간 후로도 더 대화를 나눴다. 대던전은 지형이 네 곳이고, 보스 몬스터는 열세 마리나 된다는 것 등 새로운 정보들을 협회와 세계 연맹 쪽과도 공유했다. 리벤저들이 얼마나 참혹하고 끔찍한 나날을 보냈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이었다. 그 참혹하고 끔찍한 나날을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한 시간이 더 지나서야 모임이 끝났다.
도등수와 그레이스가 저택에 마련된 방으로 돌아가고, 유준철도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권지한은 여전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지한아, 안 잘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