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86)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86)화(86/195)
#79
“…….”
“권지한?”
“아, 어. 안 자.”
“S급은 대체 며칠을 안 자도 되는 거야? 부러워 죽겠네.”
유준철은 이제 몸이 피곤하여 하품도 나오는 형편이었다.
“난 들어간다.”
“…….”
권지한은 생각에 잠겨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준철은 오늘 들은 얘기가 여러모로 충격일 거라 생각해서 그를 이해했다. 권지한은 윤서에게 묘한 호감을 품은 듯했으니 마음이 복잡할 것이다.
유준철이 권지한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2층으로 올라갔다.
응접실에 혼자 남은 권지한은 태블릿을 내려다봤다. 정확히는 윤서가 그린 거대 화염 웜의 그림을.
10년 전에 한 번 마주쳤음에도 너무 디테일했다. 이건 그림 실력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 잘 그린 그림이 권지한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너무 건방졌어.’
권지한은 그림을 보면서 생각했다.
열여섯 살에 각성해서 6년 동안 열심히 약자를 보호했다. 위험한 던전에 자진해서 들어가고, 흉포한 몬스터들 사이로 주저 없이 뛰어들고, 그러다 다친 적도 있으나 바로 일어나 전투에 나섰다.
그래서 권지한은… 자신이 이 평화에 많은 걸 기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오만하다고 말해도, ‘나 정도면 오만해도 돼.’라는 깔끔한 대답으로 무시하고는 했다.
‘정작 오만해야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는데.’
대던전에서 1,199명이 죽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아는 이도 없었다. 권지한도 마찬가지였고…. 이제야 베일에 싸인 검은 상자 안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게 되었다.
당장 내일부터 설명을 이어서 들을 생각을 하니 참담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자세한 그림을 그릴 정도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 앞에서 어떤 표정으로 설명을 들어야 하는 걸까.
어쩌면 그 다양한 취미도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수많은 취미로도 결국… 아직까지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S급 옐로우 던전에서 분명 죽으려고 했어.’
푸른 빛이 감도는 갈색 눈은 이제 곧 죽는다는 사실로 환희에 젖어 있었다. 너무나 충격적이라 지금도 눈앞에 선명했다. 다가올 죽음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권지한은 살면서 처음 보았다.
윤서는 복잡한 사람이었다.
드라마 동지가 생겼다고 신나서 얘기하는 모습과 이제 죽을 거라는 사실에 더없이 편하게 눈을 감는 모습이 공존하고,
헌터들을 강제 동원하려 한 줄 알고 분노하는 한편 자원을 받는 것도 불편해한다.
목숨 걸고 자원하는 이를 어리석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안타까워하며,
인간애와 인간 불신, 희생정신과 이기적인 마음을 함께 지니고 있다.
권지한은 살면서 처음으로 난제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
윤서는 그가 말한 대로 오전 중에 저택에 도착했다. 새벽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하얀 낯빛에 권지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형, 잠 안 잤어?”
“잤습니다. 그러는 권지한 헌터야말로 안 잔 모양이군요.”
“어떻게 알았지. 그게 보여?”
“다크서클 있습니다.”
“그럴 리가. 나 S급인데.”
권지한이 놀라며 거울을 들여다봤다. 그의 눈 밑은 깔끔하기만 했다.
권지한이 윤서를 쳐다보자 윤서가 피식 웃었다. 그걸 속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권지한은 입꼬리를 올렸다.
“형이야말로 다크서클 심한데 진짜 잔 거 맞아?”
“저는 원래 있어요.”
“응?”
“원래 눈 밑 어둡다고요.”
“와, 이걸 이렇게 나오네. 알았어. 형은 존나 예쁘게 생겼어. 내가 졌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두 사람이 다투는 동안 사람들이 내려왔다.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 어제처럼 응접실 테이블 앞에 앉았다.
윤서는 햅쌀이를 품에 끌어안은 채 대던전의 두 번째 지형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용암 지대 다음은 독이 가득한 늪이었습니다. 늪은 일주일 만에 빠져나왔습니다. 물론 <사건의 지평선>을 사용하지 않을 때의 시간이 일주일 흘렀다는 뜻입니다.”
“용암 지대보다는 수월했군요.”
“214명밖에 안 죽었으니 수월했다고 할 수 있겠죠.”
“…….”
윤서가 건조하게 대답하며 차를 마셨다. 유준철은 경솔하게 말 꺼낸 자신을 후려치고 싶었다. 자꾸 서채윤 님의 반감을 살 만한 발언을 하는 것 같아서 앞으로는 닥치고 있어야겠다 생각했다.
***
윤서는 용암 지대 때와 마찬가지로 늪지대에서 출몰한 몬스터들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열의를 가지고 설명하고, 도등수와 유준철, 그레이스도 열심히 경청했다. 그렇게 열정을 불태우는데 윤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후에 마저 하겠습니다.”
“네? 왜….”
윤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U패드의 시간을 흘깃했다. 오후 12시 1분. 세 명은 시간을 보고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윤서를 올려다봤다. 권지한이 낮게 웃었다.
“우리 형 밥 먹어야 해.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사람이란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윤서가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는 것과 식사량이 상당하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유준철이 재빨리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점심시간을 생각 못 했군요. 포탈 스톤을 준비해 놨으니 바로 식당에 이동하시지요.”
“귀찮은데 여기서 해 먹자. 윤서 형, 내가 맛있는 김치찌개 끓여 줄게.”
호텔 레스토랑을 생각하고 있던 유준철은 권지한의 말에 기겁했다. 전 세계 1위, 현 세계 1위, 석영 길드장, 석영 부길드장, 에우로페 길드장이 모였는데 점심 만찬으로 고작 김치찌개라니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혹시 서채윤이 홀대한다고 오해할까 봐 얼른 다시 말하려는 그때였다.
“김치찌개요?”
윤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응, 내가 김치찌개를 좀 잘 끓여. 대격변 전부터 혼자 요리를 해 왔거든. 참치, 꽁치, 돼지고기, 어묵. 뭐가 좋아?”
“전 그냥… 근처 식당에 가도 됩니다.”
“고슬고슬한 흑미밥, 얼큰하고 칼칼한 김치찌개, 짭짤한 김과 케찹 올린 계란말이, 야들야들한 소고기랑 메추리알을 넣은 장조림, 참기름에 버무리고 참깨로 마무리한 시금치무침, 콩자반이랑 양념깻잎지. 먹고 싶지 않아?”
“…재료가 다 있습니까?”
“당연하지. 여기 석영 길드장 저택이야. 이만한 냉장고도 있고 냉동고랑 김치냉장고도 따로 있단 말이야.”
“그럼 꽁치김치찌개 먹겠습니다.”
“주문 접수했어.”
권지한이 웃으며 일어났다.
“보조 한 명 필요하니까 준철이 형이 와.”
“아… 그래.”
유준철은 정말 식재료가 다 있었나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집에 있는 건 김치랑 계란뿐이었다. 권지한이 알아서 할 거라고 믿으며 그를 따라 응접실을 나갔다.
도등수와 그레이스는 가만히 윤서의 눈치를 살폈다.
윤서의 표정은 언뜻 보면 무덤덤했으나 자세히 보면 갈색 눈에 기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햅쌀이라는 이름의 왕 큰 알을 쓰다듬으면서 입술을 혀로 살짝 핥는 게 벌써 맛있는 꽁치김치찌개를 상상하는 듯했다.
둘은 서로의 얼떨떨한 표정을 확인했다. 잠깐 적막이 흐르고 그레이스가 다정다감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권지한 헌터의 요리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한 번도 얻어먹은 적 없는데 윤서 씨 덕분에 이렇게 먹는군요.”
“전 몇 번 먹어 본 적 있는데 진짜 잘합니다. 길드장님 말로는 대격변 전에는 권지한 헌터와 같이 반찬가게나 할까 했다더군요.”
“그 정도인가요? 기대되네요.”
“권지한 헌터는 한식 조리사 자격증도 있으니 기대하세요.”
“한식 조리사 자격증도 있다고요?”
그냥 내뱉은 말에 윤서가 덥석 반응했다.
도등수가 얼른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권지한 헌터가 18살 때 땄던 걸로 기억합니다. 현 길드장님이 막 취임했을 때라 기념으로 행사도 했었습니다. 보육원 다섯 곳의 어린아이들을 석영 본사에 초대해서 권지한 헌터가 직접 만든 식사를 대접했었죠.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더군요.”
“…….”
“검색하면 기사 잔뜩 뜰 겁니다. 권지한 헌터가 개인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보육원들이었는데, 지한이 형 늘 감사합니다, 하고 편지도 종종 옵니다.”
“잠깐만요.”
“네?”
“지금 후원이라고 했습니까? 권지한이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보육원이요?”
윤서가 ‘후원’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물었다. 도등수는 맹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후원. 권지한 헌터 연봉이 전 세계 헌터 중 1위인데 그중의 70%를 후원에 쓴다고 알고 있습니다.”
윤서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깜박이면서 입을 조그맣게 벌렸다. 본인이 입을 벌렸다는 의식도 없는 것 같았다.
권지한이 이런 기부 활동을 하는 건 그래도 꽤 기사도 많이 났는데 전혀 몰랐던 걸까. 도등수는 윤서의 반응이 귀엽게 느껴졌다.
“여기에 아이들 편지를 다 기록해 놨는데 보시겠습니까?”
도등수가 태블릿PC를 몇 번 조작하더니 윤서에게 건넸다.
윤서가 여전히 멍한 눈으로 태블릿을 가져와 화면을 쳐다봤다.
‘석영 기부 활동1’ 폴더에 보육원 아이들이 찍은 영상 편지와 손편지 사진들, 여러 행사에서 촬영한 영상들이 담겨 있었다. 윤서는 그중 손편지 사진을 클로즈업했다.
권지한 오빠! 항상 고맙습니다.
저도 어옅한 S급 각성자가 되고 싶어요!
지한이형 저는 김진훈이고 축구선수가 됄거에요
지한이 오빠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저 구구단 5단 외웠어요.
석영의 권지한 헌터님께.
안녕하세요. 어제 달리기 1등 했어요. 후원해 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너무나 사랑스러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윤서는 홀린 듯이 다른 사진들과 동영상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도등수와 그레이스는 그런 윤서를 신기하게 구경했다.
어제의 그 실소를 터뜨리던 남자와 흥미로운 눈빛으로 권지한 영상들을 보는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도 신기하고, 무엇보다 서채윤은 그들에겐 전설적인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내내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신선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너무 어린 나이부터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구나, 라는 깨달음이 들었다. 신선한 모습에 설렜던 가슴이 다시 무겁게 내려앉았다.
***
도등수와 그레이스, 윤서가 응접실에서 담소를 나누는 동안 유준철과 권지한은 넓은 주방에서 요리를 시작했다. 물론 주방장은 권지한이고 유준철은 거들기만 했다.
권지한은 남들이 부모님한테 떡볶이 해 달라, 피자 만들어 달라고 할 나이에 어머니한테 떡볶이와 피자를 만들어 줬던 놈이다. 식재료가 없어서 옆집 주방을 빌렸는데, 그 옆집 주방의 주인이 바로 유준철이었다.
당시 유준철의 집안도 잘사는 편은 아니었으나 옆집의 불쌍한 어린애한테 간간이 밥과 반찬을 줄 정도는 됐다. 유준철의 부모님은 툭하면 아들에게 반찬 심부름을 시켰고, 유준철은 옆집 건방진 어린놈이 뭐가 기특하냐고 툴툴대면서 심부름을 수행하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