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87)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87)화(87/195)
#80
‘야, 권지한. 문 열어라. 반찬 왔다.’
한번은 유준철이 깻잎과 장아찌가 든 반찬 통을 들고 옆집 문을 두드렸을 때, 문을 열어 준 건방진 어린놈은 앞치마를 메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유준철은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 떡볶이를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으며 그 떡볶이가 부모님이 해 준 것보다 맛있어서 두 번 놀랐다.
그 뒤로 유준철은 저보다 한참 어린 놈한테 심부름값을 주면서 떡볶이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떡볶이가 김치볶음밥이 되고, 된장찌개가 되고, 계란찜, 보쌈, 갈비찜이 되었다.
‘지한아, 너 졸업하면 같이 반찬가게 할래? 너는 요리만 하면 돼. 손님들은 싹싹한 내가 맡을게.’
‘가게는 형이 차려 주는 거야?’
‘네가 뭔 돈이 있겠냐. 투자금은 내가 대야지.’
‘그럼 좋지. 졸업하면 어디 할 거 없었는데 잘됐네.’
그 대화를 나눌 때 유준철은 이미 석영의 차기 길드장 후보로 손꼽히고 있었고, 권지한은 S급으로 각성한 상태였으므로 두 사람 모두 실없는 농담이라는 걸 알았다.
유준철은 ‘그땐 그랬었지’ 하면서 계란을 깼다.
탱글탱글한 노른자가 커다란 그릇 안으로 떨어졌다. 각성자 다섯 명, 그중에 세 명이 S급이니 한 판을 다 까도 부족할 것이다. 다행히 저택 냉장고에는 계란이 세 판이나 있었다. 그 외에도 양파, 파, 고추부터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는 물론 본 적 없던 향신료들까지 전부 구비되어 있었다.
이 신선한 식재료들을 누가 사 뒀는지는 뻔했다.
‘이 자식. 이걸 다 언제 준비해 둔 거야?’
권지한은 처음부터 윤서에게 밥을 해 먹일 작정이었던 것이다.
나한테 언질이라도 좀 주지.
다른 때 같았으면 이런 거 할 거면 미리미리 좀 말하라고 잔소리했겠지만, 지금은 권지한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준철은 슬쩍 권지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 고추 그렇게 많이 넣으면 맵지 않겠냐?”
“우리 형이 매운 걸 좋아해.”
“아, 그래….”
권지한의 대답은 언뜻 평범하게 들렸으나, 어렸을 때부터 요리하는 권지한 옆에서 이것저것 보조해 왔던 유준철은 지금 딱 직감이 왔다.
권지한은 화가 났다.
서늘한 눈매와 더욱 깊어진 회색 눈. 단단히 다문 입술.
세계 서열 1위 S급 헌터는 분노에 휩싸인 채 요리를 하고 있었다. 탁탁탁탁. 칼질이 심상치 않았다. 고추뿐만이 아니라 조리대를 잘라 버릴 듯한 기세였다.
“지한아, 너 왜… 화가 났냐…?”
결국 유준철이 슬그머니 물었다. 권지한은 마치 그런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윤서 형이 10년 전에 얼마나 개고생했는지를 알게 됐는데.”
“아아. 그것 때문이야?”
“존나 짜증 나.”
권지한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냄비 안에 고추를 투하했다.
“너무 많이 죽었어. 겨우 살아 나온 리벤저 두 명도 자살했고, 한 명은 정신 착란 증세가 있고. 이런데 윤서 형한테 후유증이 안 남을 리가 없지. 1,201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설명할 수도 없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다가 혼자가 됐는데 멀쩡한 사람이 이상한 거야.”
유준철은 계란을 섞으면서 멍하니 권지한을 쳐다봤다.
권지한을 잘 모르는 이가 봤다면 회색 눈은 그저 약간의 냉소를 품은 것처럼만 보일 터였다. 평소에도 말투는 시니컬했고, 눈매도 늘 서늘했으니까.
그러나 유준철은 알 수 있었다. 권지한은 분노했다.
이건 굉장히 놀라운 사실이었다.
권지한은 매사 심드렁하다. 사람들은 사납다, 건방지다, 때로는 능글맞다라고도 표현하지만 사실 이 녀석은 언제나 무덤덤한 놈이며 감정의 기복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진짜 열 받아 미치겠어.”
“…….”
이런 말을 하고 있질 않은가.
유준철은 알았다. 이 녀석이 지금 화가 난다고 말하는 이유는 리벤저가 대던전에서 너무 많이 죽어서가 아니다. 분명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근본적인 게 있다.
요근래 이 녀석의 특이 행적들을 되짚어 가다 보면….
단서들의 끝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유준철은 조심스레 물었다.
“윤서 씨가 그런 일을 겪은 게 화나?”
“윤서 형이 또 그런 일을 겪을까 봐 화나.”
“…….”
“10년 전과 완전히 똑같은 곳에 가면 과거의 일이 떠오를 거 아냐. 안 그래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인데. 힘들어할 게 뻔해.”
“…….”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대던전에 형 안 데리고 가고 싶어.”
권지한은 고민도 없이 말했다. 유준철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이게 지금 권지한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대던전 같은 대재앙을 앞둔 상황에서 저보다도 더 강할지도 모르는 S급 헌터를 안 데리고 가고 싶다는 말을 하는 권지한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권지한은 강자에겐 책임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부류니까.
어렸을 때부터 그랬기에 유준철도 덩달아 권지한에게 물들어서 책임감 넘치는 강자가 되었다.
그랬던 녀석이 유일한 대던전 공략자에 S급 헌터이자 사상 최강의 방패인 서채윤을 대던전에 데리고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아, 형. 계란말이에 계란만 넣을 생각이야? 파랑 당근이랑 언제 썰려고 젓고만 있어? 그딴 식으로 할 거면 손 잘라 버리지 그래?”
“아, 어. 미안.”
멍하니 계란물을 젓고 있는 유준철을 보고 권지한이 인상을 쓰며 훈계했다.
유준철은 삐걱거리며 권지한이 시키는 것들을 했다.
아마 권지한은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대던전에 서채윤을 안 데리고 가고 싶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이런 건 스스로 깨닫게 둬야겠지?’
유준철은 스멀스멀 올라가는 입꼬리를 굳이 억누르지는 않았다.
인류애는 넘치지만 인간은 사랑하지 않는 영웅에게 변화가 찾아오는 거라면 환영할 일이다.
다만 서채윤 쪽이 그의 실드 만큼이나 철벽일 듯해 걱정일 뿐.
다른 의미로 칼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권지한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윤서는 꽁치김치찌개를 한입 떠먹자마자 이 집이 드문 맛집이라는 걸 알았다.
“형, 어때? 맛있어?”
“글쎄요.”
“글쎄는 맛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나 좀 긴장된다.”
존나 맛있다.
윤서는 일부러 표정 관리를 하면서 나머지 반찬들도 맛봤다.
하나같이 윤서의 입맛에 맞게 간간한 맛이었다. 윤서가 비각성자였다면 어떻게 요리사로서 맛에만 치중하고 먹는 이의 건강은 배려하지 않았느냐고 호통이라도 치겠으나, S급 각성자 윤서에게는 그냥 존나 맛있었다.
“으음, 어떤지 안 물어봐도 표정 보면 알겠다. 형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네.”
윤서는 대답 없이 윤기 흐르는 흑미밥을 크게 한 숟가락 퍼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그러면서 이미 다음 반찬 계란말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놓은 상태였다.
허겁지겁 먹고 싶은데 밥 먹을 땐 스무 번 이상씩 꼭꼭 씹어 먹으라는 유언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라면 스무 번씩 씹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다음번엔 깻잎지를 먹어야지.’
입술을 다물고 오물오물 씹으면서 눈길을 깻잎지에 뒀다. 분명 매콤, 짭짤 맛있겠지? 얼른 깻잎 한 장으로 밥 한 숟가락을 감싸서 먹고 싶었다.
그런 윤서를 흐뭇하게 보던 권지한이 젓가락을 들었다. 찌개나 주 반찬들을 그의 입맛에는 짜고 맵게 만든지라 맨밥만 먹다시피 해야 했지만, 잘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대상이 정말 잘 먹고 있으니 그걸로도 충분한 반찬이었다.
“아, 이 꽁치김치찌개 레시피 ‘러브 인 한강’ 꽁치 식당 중에 우승한 식당 레시피야.”
“……!”
윤서가 눈을 크게 뜨고는 입 안에 든 걸 꿀꺽 삼켰다.
“그 레시피는 통조림 꽁치도 아니라 일거리가 많았을 텐데요….”
“그래서 오래 걸렸잖아. 아, 고추는 좀 더 썰어 넣기는 했다. 그래도 맛은 얼추 비슷할 거야.”
도등수와 그레이스는 ‘러브 인 한강’이 대체 뭔가 했다. 서채윤 프로필을 외운 유준철이 ‘그가 수백 번 재탕했다는 드라마 제목입니다’하고 입술로만 말했다.
윤서는 김치찌개를 한 입 더 떠먹더니 신중하게 맛을 음미했다.
“듣고 보니 정말 그 맛이 나는군요. 맛있습니다.”
“해 먹어 봤어?”
“해 먹진 않았고, 홍대 쪽에 ‘러브 인 한강’에 나온 우승 김치찌개들만 하는 김치찌개 전문점이 있어서 가 봤습니다.”
“와, 그런 곳이 있었어? 왜 나한텐 안 알려 줬어? 우리 오늘 저녁에 갈래?”
“이미 늦었어요. 거기는 오늘 저녁으로 먹으려면 어제 새벽부터 줄 섰어야 했습니다.”
“엄청나네. 그럼 형도 며칠 전부터 줄 서서 먹었겠네.”
“그랬죠.”
“누구랑? 낙엽 사람들?”
“혼자 갔습니다. ‘러브 인 한강’의 재미를 모르는 사람들과는 가고 싶지 않아서요.”
“나도 같이 데려가 주라. 나는 그 드라마의 재미 알잖아.”
윤서가 잠깐 생각하다가 흔쾌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꽁치와 돼지고기밖에 못 먹었으니 이번엔 참치나 어묵을 먹어 봐야겠군요.”
“왜 전부 안 시키고 하나씩 시킨 거야?”
“맛이 섞일까 봐요.”
“이제 보니 우리 형 미식가였네. 나도 하나만 시켜야겠다. 꽁치랑 돼지고기 중엔 뭐가 더 맛있었어?”
“둘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만 권지한 헌터는 뭘 시키든 덜 맵게 해 달라고 해야 할 거예요.”
“나 이 기회에 매운 거 먹는 실력도 늘리려고. 형이 옆에서 도와줘.”
“그거야 본인의 의지에 따른 건데 제가 옆에서 할 게 뭐 있습니까.”
“옆에서 응원해 줘. 심심하면 뜨개질 뜨면 되잖아. 아, 나 뜨개질도 배우고 싶은데 가르쳐 주면 안 돼?”
“전문가를 찾아가세요.”
“뜨는 거 딱 보면 형이 이미 전문가던데. 지금 뜨고 있는 그 니트는 수재희 준다고 했지. 다음 건 나 줘야 해.”
“왜 그래야 하죠?”
“나도 형보다 어리고 귀여운 동생이니까.”
“밥 먹는데 그런 말 하는 거 아닙니다.”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유준철, 도등수, 그레이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권지한은 윤서가 입안의 음식물을 씹고 삼키는 타이밍을 적절히 계산해서 말을 걸었고, 윤서도 심드렁한 표정이면서도 권지한이 하는 말에 하나하나 다 반응해 줬다.
셋은 한식 조리사 자격증 보유자가 만든 맛있는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열심히 눈으로 대화했다.
‘둘이 되게 친한 것 같은데요?’
‘그러게…. 던전에서 많이 친해졌나. 부럽다.’
‘하긴 생과 사를 함께하다 보면 우정이 싹트기 마련이죠.’
‘저도 대던전에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진정해요. 그레이스 길드장. 우정이 싹터도 죽으면 끝이니까.’
‘나는 대던전에 들어가기로 했으니까 꼭 저런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친해져야지.’
‘죽으면 끝이라니까요. 저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