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88)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88)화(88/195)
#81
“…….”
햅쌀이가 알 껍데기를 부르르 떨었다.
“조금만 더 힘줘 봐. 좀만 더.”
“…….”
윤서는 두 손을 불끈 쥐고 응원하면서 지켜봤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부르르 떨리기만 할 뿐 금이 가지는 않았다. 열심히 껍데기를 깨려고 애쓰던 햅쌀이는 포기했는지 이내 잠잠해졌다.
윤서는 햅쌀이를 톡톡 쓰다듬고는 마저 뜨개질했다.
종일 대던전 공략법을 전해 주다가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의 유언은 쿠키 굽기와 뜨개질이었다. 씻고 나오자마자 레시피 같은 건 보지도 않고 뚝딱뚝딱 빠르게 반죽 후 오븐에 넣었다.
처음 쿠키를 구울 때는 엄청나게 헤맸다. 5g 차이로 반죽이 뭉쳐지지 않거나, 오븐 안에서 부풀지 않기도 했다. 지금은 눈 감고도 맞춘다. 저울은 안 꺼낸 지 오래다.
다 구워지기를 기다리면서는 뜨개질을 떴다. 수재희 건 다 떴고, 이제 100장째의 니트가 남았다…. 누구한테 줄지 생각 안 하고 손이 가는 대로 뜨려고 했는데, 이미 손은 권지한의 사이즈대로 뜨고 있었다. S급 각성자의 정확한 눈대중으로 권지한에게 상체 사이즈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래, 맛있는 거 얻어먹었으니까 보답이라고 치자.’
권지한은 점심에 한식을 먹었으니 저녁에는 양식을 먹자며 파스타를 해 줬는데 대단히 맛있었다. 한식파인 윤서도 이런 파스타라면 평생 먹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혹시 양식 조리사 자격증도 있나?’
문득 궁금해진 윤서가 핸드폰을 들었다.
‘권지한 양식 조리사’
검색해 보니 양식 조리사 자격증은 아직 안 딴 듯했다. 하긴 딸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연관 검색어에 ‘권지한 한식 조리사’, ‘권지한 요리 실력’, ‘권지한 음식 사진’, ‘권지한 조미료’가 있었다. 윤서는 ‘권지한 조미료’를 누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연관 검색어를 누르자 나오는 글을 보고 윤서가 눈을 크게 떴다.
‘조미료 광고를 찍었었어? 아니, 조미료 회사를 차려도 될 놈이 광고는 무슨…. 아, 출연료 전액 기부구나….’
뭔가 숙연해져서 핸드폰을 끄려는데 다른 연관 검색어가 눈에 보였다. ‘권지한 기부’.
‘기부를 어마어마하게 하네. 이 정도면 그냥 권지한이 우리나라 복지 유지해 주는 수준 아니야?’
노후 준비를 하고는 있는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기부액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때 또 다른 연관 검색어가 걸렸다. ‘권지한 CF’, ‘권지한 예능’, ‘권지한 출연 영화’.
방송도 나왔어?
윤서가 S급의 반응 속도로 검색어를 눌렀다.
방송 클립 속에서 지금도 어린데 지금보다도 더 어린 10대의 권지한이 심드렁한 얼굴로 진행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광고만 30초였던 클립은 1분 지나자 칼같이 끝났다. 그다음 클립도 광고 30초에 내용은 1분이었다. 조금 짜증 난 윤서는 권지한 출연 회차를 결제하고 영상을 TV로 연결했다.
‘18살 때였구나. 아, 이때 유준철이 새 길드장 되면서 가장 인기 있는 헌터 방송에 돌린 거로군. 권지한 엄청 심드렁해…. 아, 웃었다. 웃으니까 어린 티가 제법 나네. …. 이 진행자는 왜 이상형 같은 걸 물어보고 난리야…. 그때도 은거 기인이 이상형인 건 똑같았구나. 하, 정체를 숨긴 능력자라니 완전 나잖아. 어이없어, 진짜….’
그렇게 권지한이 출연한 예능 두 편을 순식간에 다 봐 버린 윤서가 그다음엔 권지한이 카메오로 나왔다는 영화를 결제했다. 권지한 출연 분량은 2분 34초였고, 대사는 세 마디였다.
그걸 다 본 윤서의 감상은 이러했다.
왜 이 새끼는 연기도 잘해?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잘생기고 몸 좋고 올바른 가치관에 바른 인성, 뛰어난 요리 실력에 연기까지 잘하면 대체 어떡하냐고.
으아아아아-.
윤서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
유준철의 저택에 출퇴근한 지도 나흘째가 되었다. 윤서는 이제 대던전의 세 번째 지형인 미로 지형을 설명하고 있었다.
“가호 신들이 어느 길로 가라고 메시지를 안 보내 주던가요?”
질문한 이는 그레이스였다. 윤서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 시대에는 가호 신들에게 많은 걸 기대할 수 없었어요.”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윤서가 하는 말을 신중히 듣던 도등수가 말했다.
“이번에는 아무리 미로라 해도 그렇게 헤매진 않을 겁니다. 윤서 씨도 던전에 가 봐서 아시겠지만 던전 맵에 자동으로 길이 저장되기 때문에 산맥의 바위나 벼랑이 어떻게 변형되든 큰 문제 없습니다. 동굴에서도 몬스터 탐지 스킬이나 아이템을 사용하면 바로 찾을 수 있을 거고요.”
“몬스터 탐지 아이템, 비행 아이템, 수중 호흡 아이템 같은 거 많이 준비해 두세요. 실드 트랩 같은 것도.”
“예? 실드 트랩은 던전 내에서는 설치 불가능합니다.”
“…….”
“트랩 안에 내재된 실드에 정교하게 마력을 불어 넣어서 활성화시키는 원리라 이미 마력이 가득한 던전 내에서는 설치가 안 되는 걸로… 아는데….”
도등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윤서의 표정에서 뭔가가 읽혔기 때문이었다. 유준철도 같은 걸 눈치챘는지 다급히 물었다.
“설마 실드 트랩의 던전 설치가 가능한 겁니까? 그럼 설명을 해 주신다면 저희가 바로 개량하겠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실드 트랩을 처음 고안한 사람이 업그레이드하면 던전에서도 쓸 수 있다고 했을 뿐이라.”
“처음 고안한 사람을 아십니까?”
도등수가 벌떡 일어났다가 모두의 시선을 받고 뻘쭘하게 앉았다.
실드 트랩 개발자는 베일에 싸여 있다. 10년 전 인터넷에 실드 트랩 설계도를 공개하고 홀연히 사라진 신비스러운 구원자. 많은 기관에서 추적했으나 누구도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는데, 윤서가 그자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남자가 서채윤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다지 경악스럽지 않기도 했다.
그 서채윤 아닌가. 뭔가 서채윤은 세상의 비밀이란 비밀은 모두 알고 있을 것 같은 그런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개발자가 이름은 밝히지 말라고 했으니 공개하진 마세요.”
“여기서 듣고 잊겠습니다.”
“김미지 헌터입니다. 아마 다들 아실 거예요.”
“아아…. 김미지 헌터였군요.”
김미지는 실드 스킬과 제작 스킬을 가진 A급 헌터로, 아주 유명한 헌터였다. 대던전에 자원해서 들어갔고 살아나오지 못했다.
“김미지 헌터가 서채… 윤서 씨한테 실드 트랩 설계도를 주면서 인터넷에 뿌려 달라고 부탁한 겁니까?”
“그렇죠. 사실 당시에는 완성된 설계도 같은 건 없었습니다. 김미지 헌터가 말하는 걸 듣고, 대던전을 나온 뒤 제가 설계도를 그려서 인터넷에 공개한 겁니다.”
“말로만 전해 듣고… 그걸 외워서… 설계도를 그리셨단 말씀이군요….”
그야말로 천재 아닌가. 판타지 소설이었다면 설정 과다라고 까였을 것이다. 그러나 서채윤이라고 생각하니 과연 그런 것도 가능하구나 싶었다.
“정말 힘드셨겠습니다.”
“힘들다기보다는 귀찮고 성가신 작업이었어요. 유언만 아니었으면 무시했을 텐데….”
뒷말은 혼잣말하듯이 조그맣게 흘러나왔다. 세 명은 그냥 ‘아, 유언이었구나.’ 하고 지나쳤으나 여태 잠자코 듣던 권지한이 반응했다.
“유언?”
권지한의 회색 눈에 이채가 돌았다. 윤서는 그때 일을 떠올리고 몹시 피곤해진 바람에 권지한의 달라진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네, 김미지 헌터가 다 죽어 가면서 마지막 소원이라고 절절하게 유언을 남기는데…. 그 많은 사람 중 딱 절 향해 말해서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부탁했으면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했겠네. 어떻게 형이 살아 나갈 거란 걸 딱 안 모양이야.”
“…….”
세 명은 조마조마했다. 권지한의 말이 윤서의 트라우마를 건드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짐작이 틀리지 않았는지 윤서가 주섬주섬 약병을 꺼내 딸깍, 하고 뚜껑을 열었다. 윤서가 물도 없이 약 두 알을 삼키려는데 권지한이 미치겠다는 얼굴로 얼른 물을 내밀었다. 윤서가 물과 함께 약을 삼켰다.
“아오, 씨. 이놈의 주둥이.”
권지한이 자기 입술을 찰싹 내리쳤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서 말버릇을 고치기 힘들었다.
“미안. 형도 내 입 때릴래?”
“아닙니다. 맞는 말이니까요.”
윤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눈을 내리깔고 있어서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확실히 그중에서는 제가 살아 나갈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죠. 그래서 다들 나한테 유언을 남긴 거고…. 아무튼 중요한 건 실드 트랩을 개량하는 게 좋겠다는 점입니다. 김미지 헌터는 시간이 없는 탓에 개량하지 못했지만 머리를 굴리면 가능할 것 같다고 얘기했었으니까.”
“예, 윤서 씨.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겠습니다.”
유준철이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곧이어 윤서는 다시 공략법의 설명을 이어 갔다.
권지한은 얘기를 듣는 척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진득한 허무로 젖었던 윤서의 얼굴은 이제는 무덤덤하게 돌아온 상태였다. 그러나 찰나에 떠올랐던 그 허무는 결코 무시할 만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다들 나한테 유언을 남긴 거고.’
S급의 직감인지, 아니면 윤서에게 흥미가 있는 한 사람으로서의 직감인지는 모르겠지만, 권지한은 저 ‘다들’이라는 표현을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
“형, 요 며칠 뭐 했어?”
오전 나절 설명을 마치면 권지한이 차려 준 맛있는 점심 식사를 먹고 나서 햅쌀이를 끌어안은 채 잠시 휴식한다. 그리고 다시 공략법을 설명하다가 6시가 되면 칼퇴근한다. 요 며칠 윤서의 일상이었다.
권지한은 그 짧은 휴식 시간에 윤서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고 온갖 화제로 말을 걸었다. 그는 윤서가 대던전 공략법을 설명할 때는 말수가 적었으나 이런 쉬는 시간에는 수다스러워졌다.
“뭐 했냐니요. 열심히 대던전 공략법 설명 중이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집에 돌아간 다음에 뭐 했냐고. 사람이 되게 퀭해졌어. 꼭 덕질하느라 밤샌 사람처럼.”
“오해입니다. 전 멀쩡해요.”
“어디 안 좋으면 꼭 말해. 형은 PTSD를 앓고 있으니까 무리하면서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어.”
“무리 안 합니다.”
윤서는 정말 무리하지 않았다. 밤마다 권지한의 기사와 출연 영상들을 보고 또 보긴 하지만 S급인 그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윤서가 밤새운 것도 모르는데 권지한 혼자 귀신같이 캐치해 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