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89)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89)화(89/195)
#82
“내 니트는 잘 뜨고 있어? 혹시 그거 뜨느라 피곤한 거야?”
“안 피곤합니다. 그리고 니트는 이미 떴어요.”
“어?”
“저 가방 보세요.”
권지한이 눈을 끔벅이더니 소파 한편에 놓인 크로스백을 쳐다봤다가 다시 윤서를 봤다. 설명이 필요한 눈빛이었지만 윤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햅쌀이만 쓰다듬었다. 권지한이 소파에 다가가 크로스백을 열었다.
얇은 실로 뜨여진 아이보리색 니트가 아무렇게나 접혀 있었다. 권지한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이거 내 거라는 뜻이야?”
“네.”
“너무 아무렇게나 놓은 거 아냐? 아니, 그리고 왜 말을 안 해? 내가 말 안 했으면 언제 주려고 했어? 혹시 며칠간 계속 갖고 다닌 건 아니지?”
“질문이 너무 많네요. 싫으면 두세요. 재희나 수빈 씨 주게.”
“고마워. 잘 입을게.”
권지한이 곧장 입고 있던 반팔 셔츠를 훌러덩 벗어 던졌다. 윤서가 권지한을 곁눈질했다. S급 동체 시력이 권지한의 훌륭한 이두박근과 대흉근, 외복사근을 순식간에 훑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두껍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옷을 벗으니 흉통이 두툼한 게 대단한 몸매였다.
“지금 입기엔 더울 텐데요.”
“S급 체온 조절 능력을 뭐로 보고.”
권지한은 망설임 없이 긴팔 니트를 꿰입었다.
윤서가 며칠 동안 권지한을 검색해 본 바, 그는 블랙 컬러 셔츠와 가죽 재킷, 스크래치 진으로 껄렁껄렁한 스타일을 주로 입었다. 단정한 아이보리색 니트를 입은 모습도 한번 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 색으로 골랐는데 역시나 새로운 매력이 있었다.
‘잘 어울릴 줄 알았지.’
윤서는 흡족해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내리눌렀다. 권지한이 윤서의 앞에 털썩 앉았다. 권지한 또한 옷이 퍽 마음에 드는 듯했다.
“우리 형, 쿠키도 주고 니트도 주고 아낌없이 주는 형이네. 나는 대체 뭘 해 주면 좋지?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윤서는 전날 초코크랙쿠키를 구워서 넷에게 나눠 줬다. 다 먹은 사람은 권지한뿐이었다. 유준철과 도등수, 그레이스는 A급 보관함에 소중하게 쿠키를 담고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 와중에도 맛보고 싶었는지 권지한 것을 한 개씩 얻어먹고는 감격에 겨워 서채윤은 대체 못 하는 게 무엇이냐며 칭송했다.
“식사 답례라고 생각하세요.”
“고마워. 근데 사이즈 딱 맞아서 신기하다. 형 언제 내 사이즈 쟀어?”
“눈대중입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눈대중만으로 이렇게 딱 알맞게 맞춰? 나 잘 때 몰래 와서 사이즈 재고 간 거 아니야?”
“제가 지금까지 뜬 니트가 그걸 포함해 100장입니다. 신체 사이즈 측정쯤은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면서 봐도 할 수 있어요.”
“100장….”
싱글벙글하던 권지한이 입꼬리를 내렸다.
“나 그럼 100장 중에 겨우 하나 받은 거잖아. 서운해졌어.”
“뭐요?”
“이제부턴 나한테만 100장 더 떠 줘.”
“개소리하지 마세요.”
“튕기지 말고 나 다음번엔 진그레이색. 좀 더 도톰한 것도 좋고 아니어도 좋고 형이 원하는 걸로 해.”
윤서가 하, 하고 기가 찬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그래, 어이없으시겠지. 듣는 우리도 어이없는데.’
‘과연 권지한이 여기서 물러날까.’
‘그건 모르지. 두근두근하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이곳은 응접실이었고, 이 공간엔 유준철과 도등수, 그레이스도 있었다. 그들은 이제 권지한과 윤서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셋이 모여서 차를 쪼르륵 마시며 흥미진진 관람했다. 왜 저 두 사람이 대화만 해도 이렇게 재미있고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의 존재를 잊고 천년만년 대화를 이어 나갔으면 했다. 웬만한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었다.
“돈 뒀다 뭐 합니까. 사서 입으세요.”
“내가 100장째라니 서운해서 그러지.”
“당장 벗으세요. 서운해하지 않을 사람한테 주겠습니다.”
“세상에 이 니트를 나보다 더 잘 소화할 사람은 없을걸. 튕기지 말고 좀 떠 줘 봐. 실이 부족하면 내가 사 줄게.”
“그거 다 뜨고 대바늘이랑 남은 실도 모조리 버렸거든요. 이제 다신 뜨개질 안 해요.”
흥미진진 구경하던 셋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권지한도 마찬가지잖아.
“왜? 좋아하는 취미잖아.”
“별로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니트를 100장이나 떴으면서 좋아하진 않았다고 하면 그걸 믿어야 해, 말아야 해.”
“취미도 그만큼 하면 질리는 거죠. 권지한 헌터는 이런 적 없습니까?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질려 버린 취미 같은 거.”
권지한이 턱을 쓸었다. 회색 눈이 가느다래졌다. 마치 윤서에게서 뭔가를 읽으려고 하는 듯 하얗고 예쁜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보던 그가 마침내 빙긋 웃었다.
“또 궁금하지도 않은 거 물어보면서 화제 돌리려고 하네. 알았어. 넘어가 줄게.”
“…….”
윤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아쉬웠다.
저번에는 궁금하지 않으면서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물어본 게 맞지만, 이번에는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그래도 아깝다. 이렇게 잘하는데 뜨개질을 그만둔다니. 내가 더 선물받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너무 잘하는데 다신 안 뜬다는 게 아까워서 말이야.”
권지한이 니트의 소매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핸드메이드인데 기계로 뜬 것보다 더 정교하고 올이 나간 부분도 없었다. 윤서는 홱 고개를 돌리고는 괜히 햅쌀이를 쓰다듬었다.
“체온 조절이 된다고는 해도 보는 입장에서는 더우니 이제 좀 벗죠.”
“계속 입고 있을 거야.”
“…휴식 시간이 너무 길었네요. 이제 다시 시작하죠.”
자꾸 얼굴에 열이 오르려는 것 같다. 차라리 대던전의 끔찍한 참상을 떠올리는 게 낫다고 생각한 윤서는 애써 덤덤한 표정을 꾸미고서 말했다.
권지한은 피식 웃었고, 흥미진진 지켜보던 이들은 곧장 진지한 자세로 경청할 준비를 했다.
***
어느덧 미로 지대의 중반을 설명할 때가 되었다.
이도민의 죽음을 말해야만 했다.
윤서는 그때의 휘몰아치던 절망과 슬픔, 비통, 분노, 상실감과 허무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지금도 온몸의 솜털 하나하나가 솟을 만큼 너무나 선명했다.
그는 모든 감정을 생략하고 네 명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굴 공략 중반에 이도민 헌터가 죽었습니다.”
그 안에 담긴 많은 스토리를 뒤로한 채로 아주 짧아진 설명이었다.
유준철이 깜짝 놀랐다.
“그럼 시간이 다시 흐르게 된 겁니까?”
“저도 그런 줄 알았지만 다행히 <사건의 지평선>을 이강진 헌터가 복사했습니다. <가이아의 그림자>라는 스킬이었죠.”
“가이아 스킬…….”
“참고로 도민이, 이도민 헌터도 <가이아의 꿈>이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어요. 단, 이게 어떤 능력을 지닌 스킬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대던전에는 가이아 스킬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어?”
권지한이 물었다.
“다섯 명이었습니다. 제가 <가이아의 대지>, 이강진은 <가이아의 그림자>, 이도민은 <가이아의 꿈>, 그리고 외국인 헌터 두 명이 각각 <가이아의 눈>, <가이아의 마음>이라는 스킬을 가졌어요. 나중에는 이강진 헌터가 <가이아의 눈>을 복사해서 가졌고요.”
“<가이아의 마음>은 어떤 스킬이야?”
“강력한 텔레파시 스킬이었습니다. 원거리에서도 생각을 전달하고 소통할 수 있으며, 정신 조종도 할 수 있었죠.”
“형의 <거짓 기억>처럼?”
“<거짓 기억>은 간단한 암시만 거는 게 고작입니다. <가이아의 마음>은 <거짓 기억>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내게 <가이아의 눈>이 생긴 것처럼 지금 지구상의 누군가는 <가이아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럴 수도 있겠죠…….”
윤서는 왠지 섬뜩해져서 품 안의 알을 더욱 꼬옥 끌어안았다. 햅쌀이는 따끈따끈한 상태여서 금방 온기가 전해졌다.
윤서는 다시 설명을 이어 갔다.
설명은 오래 이어졌고 유준철과 도등수, 그레이스는 꼼꼼하게 기록했다. 권지한은 늘 그렇듯 팔짱 낀 채 시니컬한 태도로 설명을 들었다.
***
윤서는 6시가 되면 칼같이 일어나서 퇴근했는데, 오늘따라 유준철이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고 권해 왔다.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으나 도등수와 그레이스도 간곡히 애원해서 어쩔 수 없이 도로 앉았다. 권지한이 얼큰한 소곱창전골과 잡채를 만들겠다고도 한 것도 있지만 그건 선택에 아주 미미한 영향을 끼쳤을 뿐이었다. 정말이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후에는 진짜로 돌아가려 했는데 그 또한 실패했다.
권지한이 약과와 수정과를 디저트로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윤서는 눈을 감은 채 수정과의 쌉싸래한 맛과 톡 쏘는 향을 음미했다.
권지한은 왜 못 하는 게 없을까. 이건 가이아 시스템과 더불어 2대 불가사의였다.
“형, 햅쌀이 이제 깰 때 다 됐네.”
윤서의 품 안에 있는 커다란 알을 보면서 권지한이 말했다.
“그쪽이 그걸 어떻게 알죠?”
“그냥 뭔가 마력이 가득 차오른 게 느껴져.”
“…맞습니다. 일주일 이내에 깰 것 같아요.”
“진짜 귀엽겠다. 기대돼.”
윤서가 본인이 칭찬받은 듯 미소 지으며 햅쌀이를 은근슬쩍 옆으로 내밀었다.
권지한과 윤서가 나란히 앉아 있었으므로 윤서의 행동은 권지한에게 ‘내 알을 쓰다듬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권지한이 피식 웃으면서 손을 알껍데기에 가볍게 올렸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뭐야. 되게 따뜻하네? 형이 품고 있어서 그런가?”
“지금 햅쌀이가 기분이 좋아서 따뜻한 겁니다. 제가 막 데리고 왔을 때는 차가웠어요.”
“아, 우리의 아프리카 금고에서 말이지. 그때 진짜 다들 기절초풍했잖아. 거기까지 공간 이동 스킬로 간 것까지는 알겠지만… 거기에 햅쌀이가 있다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비밀입니다.”
“너무하네,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뭔데요.”
“생사를 같이할 동료 사이잖아.”
“그쪽이랑 생사 같이할 생각 없습니다.”
생사를 같이하는 건 정말 곤란했다. 윤서는 권지한이 오래오래 살았으면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