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9)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9)화(9/195)
2. 길드 합병
#07
낙엽 길드장이 조촐한 고깃집에서 석영 길드와의 합병 소식을 전달하고 사흘 후, 월요일.
석영 길드에서 대규모 합병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합병 대상 길드는 모두 소형 길드로 사실상 석영에 흡수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합병하는 경우는 길드가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졌다가 단숨에 사라졌던 4~5년 전 이후로 처음이었다. 국내외 언론들은 앞다퉈서 석영 길드의 대규모 합병 이유에 대한 추측 기사를 내보냈다.
낮은 등급의 던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다, 대민 지원 사업을 확장하려는 것이다, 길드 확장 차원이다 등. 여러 추측이 있었는데 석영 길드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와중에 합병되는 소형 길드 쪽에 먼저 컨택한 곳이 석영 길드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소형 길드들은 길드 설립 이후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았는데 그건 낙엽도 마찬가지였다.
“희원 씨, 나 여기 뾰루지 안 났어?”
“안 났는데요.”
“정말? 아니, 어제 퇴근하고 인터뷰를 두 탕이나 해서 늦게 잤거든. 요즘 인터뷰를 너무 많이 해서 다크서클도 생겼지 뭐야.”
“아, 맞다. 팀장님. 저 오늘 세 시에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요.”
“왜?”
“방송 인터뷰 있거든요. HBS 알죠? 헌터 방송.”
“아, 맞다. 나도 다섯 시에 잡지 인터뷰 있으니까 빨리하고 와야 해.”
“저녁에는 ‘헌터피아’ 인터뷰 있어요. 아시죠? 헌터넷 넘버원 헌터 채널. 거기서 인터뷰 좀 해 달라고 사정사정을 해 가지고. 귀찮지만 어쩔 수 없죠.”
가장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을 던전 공략 팀은 던전에 들어가서 내일 나올 예정이고, 경영 팀은 F급 각성자들이라서 박영범과 고희원이 득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합병이 공식 발표된 저번 주 월요일부터 합병식을 하루 앞둔 오늘까지 난 이런 곳과 인터뷰했다, 나는 몇 군데서 했다며 인터뷰 대결을 하고 있었다.
길드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비록 낙엽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겠지만, 연봉과 복지가 말도 안 되게 좋아지니 당연했다. 던전 공략 팀도 미리 잡힌 레이드만 아니었다면 인터뷰하느라 난리였을 것이다. 길드장이 힘들게 잡은 B급 약초 던전이라 포기할 수 없어서 공략에 나선 그들은 늦어도 내일 오전 중엔 돌아와서 합병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윤서는 배경 음악처럼 흘러나오는 유치한 실랑이를 들으면서 실드 트랩을 케이스에 탁탁 챙겨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서 씨, 어디 가?”
“오빠, 어디 가요?”
박영범과 고희원이 고개를 홱 돌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혹시 인터뷰하러 가는 거야?’라는 시선이었다. 윤서는 어이가 없었다.
“일들 안 해요?”
“…해야지.”
“할 건데요….”
두 사람이 눈에 띄게 안심했다. 윤서는 가방을 메면서 말했다.
“저 오늘 외근 나갔다가 곧바로 퇴근합니다.”
“앗, 정말요? 그럼 내일 합병식에서 보겠네요.”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합병식은 강남 석영 본사에서 저녁 여섯 시에 거행되고, 저녁 만찬을 든 뒤 경복궁 경회루에서 연회를 연다고 했다. 아마 포탈 트랩으로 이동하려는 모양이었다.
“우리 몇 시에 볼까요? 경영 팀은 두 시간 전에 미리 만난다던데. 진짜 개오바 아니에요? 아무리 석영 길드장이 시간 약속에 늦는 걸 극혐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쩔쩔맬 필요가 뭐 있담.”
고희원이 도도하게 말했다. 박영범 또한 코웃음을 쳤다.
“내 말이 그거야. 우리는 그냥 소형 길드인 거지 을이 아닌데 말이야. 합병도 우리가 해 달라고 한 게 아니라 석영에서 원한 거잖아.”
“우리 팀은 좀 여유롭게 가요.”
“응, 여유롭게 열두 시에 보자. 딱히 일찍 만나자는 게 아니라 점심 식사 같이하고 싶어서.”
“그래요. 제가 강남 레스토랑 예약해 둘게요.”
윤서는 여느 때처럼 만담하는 둘을 놔두고 나가려다가 아, 하고 멈춰 섰다. 그는 가방에서 투명 봉투 두 개를 꺼내 박영범과 고희원에게 하나씩 줬다. 윤서가 봉투를 꺼낼 때부터 받아 들 준비를 하고 있던 두 사람이 냉큼 봉투를 열었다.
“어제 또 쿠키 구웠어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나 윤서 씨의 다양한 취미 생활 정말 응원하잖아. 앞으로도 파이팅.”
봉투에는 먹음직스러운 다갈색 초코크랙쿠키가 가득 들어 있었다. 윤서는 종종 이렇게 직원들에게 쿠키를 나눠 주고는 했다. 두 사람은 얼른 쿠키를 꺼내 와작와작 먹었다. 입 안으로 퍼지는 달콤한 맛에 둘의 표정이 황홀해졌다.
반면 윤서는 쿠키 먹는 모습만 봐도 속이 물려서 얼른 인사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어제부로 65,191개째의 쿠키를 구웠다. 유언이 10만 개 굽기이니 아직 까마득했다….
“운전자 윤서, 인식 완료. 목적지를 지정해 주세요.”
차에 오르자 AI 찹쌀이 밝은 음성으로 시동을 켰다. 윤서는 오늘의 첫 번째 출장지 주소를 입력하고 시트를 뒤로 눕혔다.
‘진짜 합병하는구나.’
소식을 들은 지 꽤 되었는데 이제야 실감이 났다.
당장 사무실을 이전하지는 않는다고 해서 지금은 여의도의 길드 건물로 출퇴근하고 있는데, 합병식 이후로는 몇몇 길드원들은 석영으로 출퇴근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윤서는 그게 자기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강남은 일단 집과도 거리도 멀고…. 합병에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석영 길드 자체가 좋은 추억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실 그는 내일도 가기 싫었다.
‘하필 그날이란 말이야.’
내일은 바로 대던전 기념일이다. 정부에서 여는 공식 기념식보다 더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합병식에서 그 얘기를 안 할 리가 없다.
언론에서 말하기로는 석영 핵심부도 참석한다고 하니 어쩌면 콧수염 아저씨를 오랜만에 만날지도 모르겠다.
윤서는 핸드폰으로 콧수염 아저씨와의 대화창에 들어갔다.
콧수염
우리 공주님 오늘 엄마랑 김밥 말았다 ㅎ
맛있어 보이네요.
콧수염
나눠 주랴?
사 먹었습니다
콧수염
ㅋㅋㅋ언제 한번 먹고 싶음 와
최근 메시지 내역은 퍽 평화로웠다. 둘 다 메시지로는 절대로 대던전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내일 아저씨도 오세요?
워낙 바쁜 사람이라 답장은 한참 후에 올 것이다. 윤서는 핸드폰 화면을 껐다.
오늘의 첫 설치 장소는 작은 상가 건물이었고, C급 의뢰였다.
‘B급 정도는 되어야 효과 있는데.’
찹쌀이 주차 지역을 찾아 주차하는 동안 윤서는 고민했다. 낙엽처럼 작은 길드에 들어오는 의뢰는 대부분 B급이나 C급이었는데 윤서는 항상 B급 이상으로 설치하고 사후 보고서엔 C급으로 올렸다. 만약 들키더라도 낙엽 길드 성격상 그냥 ‘윤서 씨가 정말 능력자야’ 하고 넘어갈 게 분명했으니까. 쪽방촌에서처럼 S급으로 만들어 놓지 않는 한….
‘당분간은 조심해야겠지.’
석영 스타일은 어떨지 모르니 이런 몰래 하는 착한 짓도 당분간은 자제해야 할 것 같았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
여덟 시간 후.
오늘 세 곳 실드 트랩을 모두 B급 이상으로 설치해 버린 윤서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마를 짚었다.
“찹쌀아, 난 뭐가 문젤까.”
“세상에 문제없는 사람은 없어요.”
“전혀 위로가 안 되잖아.”
“어떤 말을 해 드려야 할까요? 우울함 극복은 스스로만 할 수 있어요.”
8년간 함께해 온 AI가 지나치게 시크했다. 윤서의 성격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AI이므로 윤서 탓이었다.
‘안 들키겠지. 지금껏 들킨 적 없잖아.’
던전 범람이나 폭발이 일어나지만 않으면 들킬 일 없다. 윤서는 애써 태평하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나 도착한 메시지는 윤서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콧수염
응ㅎㅎ 나도 간다. 너와 같은 길드가 되다니 신기하네. 우리 5년 전에 실드 트랩 구매하면서 처음 만났을 땐 무진장 싸웠었는데. 이렇게 같은 편 될 줄 알았으면 싸우지 말걸 ㅎㅎ
윤서와 콧수염 아저씨가 처음 만난 건 12년 전 대격변이 일어난 그날이므로 이 메시지 내용은 모두 거짓이었다.
누군가 염탐 중이니 이렇게 말을 맞추자는 뜻이다.
윤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이튿날 윤서는 합병식 시작 10분 전 강남의 석영 본사 앞에 도착했다. 길드원들은 이미 길드장 기상혁까지 모두 건물 안에 모여 있었다. 단체 방에 올라오는 신난 인증 샷들과 얼른 오라는 독촉을 보면서 윤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문 앞에 레드 카펫이 깔렸고, 양쪽으로 취재진이 둘러싸고 있어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뒷문으로 돌아가는데 길드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요.”
– 왜긴 뭐가 왜야. 곧 시작하는데 어디야?
“아직 시간 남았잖아요.”
– 10분? 어? 10분 남은 걸 남았다고 하는 거냐? 오늘 같은 날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다른 길드에서도 벌써 다 도착했다고!
– 오빠, 얼른 와요. 여기 엄청 빤딱빤딱해. 맛있는 것도 짱 많아요.
– 윤서 씨, 너무 넓어서 길 잃었으면 데리러 가 줘?
“지금 근처입니다. 끊어요.”
– 야!
냉정하게 전화를 끊은 윤서는 곧 뒷문을 발견했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 몇몇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윤서가 치를 떨면서 한 번 더 돌자 건물 옆면이 나왔다. 눈 부신 햇살 탓에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올려다봤다. 5층 위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새 충돌 방지 필름을 붙여 놓은 유리창은 얼마나 잘 관리하는지 얼룩도 없이 깨끗했고, 층마다 손과 발을 올릴 턱도 충분했다. 전파 방해 장치도 없고, 마스크나 모자도 없는 지금 카메라를 통과할 순 없으니 암벽 등반이나 해야겠다.
윤서는 핸드폰을 가방 안에 집어넣고 지퍼를 닫았다. 그리고 유리창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올라가려고?”
젊은 남자 목소리였고, 시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