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90)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90)화(90/195)
#83
“아, 혹시 공간 이동 스킬에 아이템 탐지 능력도 있는 건가?”
권지한의 날카로운 추리에 윤서가 움찔 놀랐다. 그는 다시 햅쌀이를 제 품에 안았다.
“몰라도 됩니다.”
“알았어. 추리 안 할 테니까 나 다시 형의 알 좀 만지게 해 줘.”
쿨럭, 쿨럭.
둘의 맞은편에서 약과를 아작아작 씹으며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셋이 사레라도 들린 듯 기침했다.
최근 들어 이런 일이 많았으므로 권지한과 윤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제 알이 그렇게 만지고 싶어요?”
“응, 따뜻하고 크기도 적당해서 좋아. 여기서 뭐가 튀어나올까 기대도 되고.”
“알겠습니다. 만지세요.”
윤서가 선심 쓰며 햅쌀이를 다시 옆으로 내밀었다. 권지한이 커다란 손으로 햅쌀이를 쓰다듬었다.
“…….”
“어? 진동했다.”
“기분이 좋은가 보네요.”
“손바닥 아래에서 박동하는 느낌이 뭔가 되게 감동적이고 그렇네. 얼른 알 깨고 나오자, 햅쌀아. 삼촌도 너 빨리 보고 싶어.”
알이 부르르 떨었다.
“이제 그만 만져요.”
“알은 더 만져 줬으면 싶을 수도 있잖아. 왜 가져가.”
“내 겁니다.”
“형 거가 내 거고 내 거가 형 거지.”
“권지한 헌터는 제가 만질 알도 없잖습니까.”
“우리 형 너무 박하다. 어디서 알을 구해 와야 하나.”
윤서가 알을 가져가자 권지한은 피식 웃고는 찻잔을 들었다. 윤서는 수정과를 호로록 마시는 권지한을 힐끔 보며 햅쌀이를 끌어안았다.
파란 새가 된 햅쌀이가 삐유, 삐유 울면서 권지한 근처를 날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니 굉장히 즐거웠다. 하얀 족제비가 권지한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내밀고 삣, 하고 쳐다본다거나 노란 고슴도치가 권지한의 널따란 어깨에 매달려서 냐앙 하고 운다거나. 그런 상상을 하자 가슴속에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뭔가가 동글동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유언을 전부 끝내고 나면 햅쌀이를 권지한에게 양도해야지. 권지한은 분명 아껴 줄 것이다.
평소라면 흘러나오는 미소를 참으려 했겠지만 윤서는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
길고 풍성한 속눈썹, 살짝 올라간 매력적인 눈매와 깊은 갈색 눈동자. 웃으면서 볼록하게 잡힌 눈 밑 애교 살, 도드라진 광대와 올라간 양 입술 끝은 기분이 좋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투둑, 툭.
문득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윤서가 고개를 돌렸다.
“아, 씨.”
권지한이 수정과를 쏟았는지 얼른 찻잔을 내려놓았다. 윤서가 티슈를 건넸다.
“S급이면서 손힘 약해서 어떡합니까.”
“아니, 지금은 실수야. 나 완전 강해. 나랑 팔씨름해 볼래?”
“어린애 울리고 싶지 않은데요.”
“허어, 이 애송이 형 어떡하지.”
“지금 서채윤을 보고 애송이라고 하는 겁니까.”
“언제는 서채윤이라고 불리기 싫다더니. 선택적 서채윤이야?”
“빨리 티슈나 받아 가세요.”
권지한이 웃으며 티슈를 받아 갔다. 손가락이 살짝 스쳤다. 권지한은 니트에 묻은 수정과를 살살 닦았다.
“이거 잘 지워질까. 형이랑 맛집 갈 때도 이 옷 입으려고 했는데.”
손가락을 엄지로 꾹 누르던 윤서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맛집이요?”
“우리 채윤이 형아…. 설마 잊은 건 아니지? 주말에 매운갈비찜 맛집 가기로 했잖아.”
권지한이 서운하다는 듯 탄탄한 어깨를 흔들었다.
“그거 취소된 거 아니었어요?”
윤서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대던전 공략법 설명이라는 시급한 사안 때문에 이런 사소한 약속은 자연스레 취소됐다고 생각했다.
“형의 알도 못 만지게 하는 데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약속도 취소하려는 셈이야? 정말 나 계속 서운하게 할 거야? 나 맨날 그 맛집 리뷰 보면서 입맛 다시고 있단 말이야. 매운맛에도 익숙해지려고 열심히 김치도 먹으면서 훈련하고 있는데 너무하네.”
“지금 태평하게 맛집이나 갈 때가….”
윤서가 유준철과 두 명을 힐끔 바라봤다. 흥미진진 관람하고 있던 유준철이 척, 하고 상체를 세웠다.
“윤서 씨, 이 시국 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대던전 설명도 이제 거의 끝나가지 않습니까? 내일이면 마무리될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하지만….”
“그동안 그곳에서의 일들을 되새기며 윤서 씨도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을 텐데 주말에는 지한이와 함께 모쪼록 맛집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고 오세요.”
“주말에 공략법 연구 안 해도 됩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주말에도 출근해서 대던전 공략법을 연구하자니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실 수가 있습니까. 윤서 씨 그렇게 안 봤는데 그렇게 성실하고 정의롭고 자기희생적인 헌터셨습니까?”
유준철의 말에 윤서가 펄쩍 뛰었다.
세상에! 어떻게 나한테 정의롭다고 할 수 있어?
윤서는 다른 소리는 다 참을 수 있어도 성실하고 정의롭고 자기희생적이라는 표현만은 견딜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주말엔 쉬겠습니다.”
윤서는 할 수 있는 모든 정색을 끌어모아 냉정하게 대답했다.
요새 대던전 공략법 설명하느라 유언 집행을 제대로 못 했다. 특히
줄 서서 먹는 맛집 열 군데 가 줘
유언은 아직 두 번밖에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 나온 김에 처리하는 게 윤서도 좋았다.
권지한과 단둘이 식사하는 것도 좀 기대되고….
윤서가 슬쩍 고개를 들어 권지한을 쳐다보자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권지한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 니트 내가 잘 빨아서 꼭 입고 갈게. 형도 비슷한 색 입고 와.”
윤서는 귀 끝이 빨개졌다.
비슷한 색이고 뭐고, 이 한여름에 니트라니 말이 안 된다. 매운 것도 못 먹으면서 덥게 입었다가 땀범벅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먹다가 덥다고 니트 소매를 팔뚝까지 걷을 거 아냐. 그럼 푸른 힘줄이 돋은 두껍고 단단한 팔뚝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을 것이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큼직한 손으로 거칠게 쓸어 올리면? 하아, 하고 상기된 얼굴로 뜨거운 숨을 내뱉기라도 하면 어떡해? 이거 보통 일이 아니야.
“저, 그런데 그 맛집은 어디 있는 곳입니까?”
심각해진 윤서에게 유준철이 찬물을 끼얹었다.
“저도 매운갈비찜 한동안 못 먹었는데 오랜만에 먹고 싶군요.”
유준철은 권지한이 자각은 못 했지만 윤서에게 관심이 많은 걸 알아서 둘만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둘이서만 식사하는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모습을 놓치기 싫어서 슬쩍 끼어들어 봤다. 유준철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다.
“한국 음식 사랑해요. 저는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외국인이에요.”
그레이스는 갑자기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이 되었다. 며칠간 먹은 게 죄다 한식이었는데.
“저는 먹진 않겠습니다. 구경만 할게요.”
식당에 가서 구경만 한다니?
도등수는 가장 솔직했지만 윤서의 해괴한 걸 보는 듯한 시선을 받게 되었다.
“어디 내 맛집에 숟가락을 올리려고 들어? 형이랑 나만 갈 거야. 다른 사람들은 꿈도 꾸지 마.”
“하지만 나도 먹고 싶어서….”
“저는 한국 음식에 흥미가 있는 외국인인데….”
“안 먹고 구경만 할 건데요….”
“다들 닥치고 셋이 알아서 처먹어.”
권지한이 주책 부리는 30대들을 철벽처럼 단호하게 차단했다. 어찌나 단호했는지 셋은 입술만 삐죽 내민 채 더는 조르지도 못했다.
윤서는 저는 괜찮으니 다들 같이 가자고 말할까 고민했다. 권지한과 둘이서만 먹고 싶기도 했지만 이 사람들이 이렇게 원한다면…. 괜찮다고 입을 열려던 윤서가 권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
권지한이 윤서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나 잘했지? 하는 듯한 미소였는데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휘황찬란 반짝반짝했다.
그래, 역시 둘만 먹자.
윤서는 새초롬하게 고개를 돌렸다.
***
드디어 네 번째, 신전 지형을 설명할 때가 되었다.
그야말로 ‘던전’다운 마지막 지형. 윤서는 신전 내부 지도를 마치 지금 보고 그리는 듯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그렸고, 함정 위치와 종류를 표시했다.
“함정 위치를… 전부 기억하십니까?”
“발동된 함정은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발동하지 않은 것들도 많을 테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예.”
늘 그렇지만 윤서가 10년 전의 던전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건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웬만한 건 아이템으로 감지할 수 있을 테니 아이템을 충분히 챙겨야 합니다. 아, 식량도 할 수 있는 한 많이.”
“식량이요? 굶주리기라도 했나요?”
“예, 신전 지형에는 정말 먹을 게 없어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습니다. 총 111명이 아사했죠.”
“…….”
그레이스가 손으로 제 경솔한 입을 틀어막았다.
“뭐 인벤토리와 아공간이 있는 지금은 큰 문제 없겠지만요.”
“맞습니다……. 정말 다행-.”
도등수가 진심으로 안도하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가 죄책감이 들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에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려 한 자신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그, 그래도 윤서 씨는 그런 험난한 장해물들을 이겨 내고 이렇게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계시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 그건 다른 리벤저들이 저한테 식량을 양보해서요. 저는 귀중한 전력이었으니까요.”
“…….”
그렇게 유준철마저 입을 틀어막았다.
세 명이 나란히 입틀막한 자세로 앉아 있는 가운데 윤서가 딸깍, 약병 뚜껑을 열어 약을 몇 개 꺼내 삼켰다.
유일하게 양손이 자유로운 권지한이 익숙하게 물컵을 건넸고, 윤서가 받아 마셨다.
권지한은 꼴깍꼴깍 물을 넘기는 윤서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사라니 그건 너무 허무한 죽음이었다. 죽어가는 이들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은. 끝내 살아남아 그때의 일을 읊는 서채윤의 심정은 어떨까?
지금까지 감정과 서사가 생략된 담백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윤서는 딱히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거를 상기하고 있다기보다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캐릭터가 나온 드라마 줄거리를 얘기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갈색 눈에는 허무와 체념이 담겨 있었다.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극한의 허무였다.
권지한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고 싶었다. 그 방법을 알려줄 테니 대신 스킬 몇 개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바꾸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