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91)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91)화(91/195)
#84
약을 삼키고 쿵쿵쿵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힌 윤서는 신전의 보스 몬스터들과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무시무시한 드래곤에 대해 말했다.
“마지막 드래곤은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브레스 한 번에 제 실드에 금이 갔으니 최소 7000만 톤의 파괴력을 가졌다고 보면 됩니다.”
“7000만 톤…….”
도등수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사실 듣는 이들은 보스 몬스터보다는 윤서가 더 무시무시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실드는 수천만 톤의 위력에도 금만 갈 뿐 깨지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기 때문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강한 무기인 수소 폭탄 차르 봄바의 위력이 5000만 톤이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그보다 강한 위력의 무기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윤서의 실드는 차르 봄바의 폭발도 막아 낼 정도라는 뜻이다.
당시 윤서가 마력 고갈이었다는 점, 긴 공략으로 지쳤다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완벽한 컨디션에서 충분한 마력으로 실드를 펼친다면 어쩌면 수천만 톤이 아니라 기가톤 단위도 막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보스까지 해치우고 나니 생존자는 절 포함해 다섯 명이 남아 있더군요.”
“…잠깐. 대던전을 나온 리벤저는 윤서 씨와 라 비지나, 가리스 로미오, 마크 파심. 네 명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다섯이 생존했다니…. 그럼 한 명은 어떻게 된 겁니까?”
“이강진 헌터가 살아 있었어요. 저와 눈도 마주쳤고 대화도 나눴는데 왜 대던전을 나오지 못한 건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때부터의 기억은 아주 희미하게만 남아 있어서….”
윤서가 미간을 좁히며 말끝을 흐렸다.
“제가 부정확한 기억으로 혼란만 가중시키는 게 아닐까 걱정됩니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는 걸 감안하고 들으세요. 일단 알고 있는 건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윤서는 담담하게 그 상황을 설명했다.
“최종 보스가 죽고 나서 검은색 포탈이 나타났습니다. 그레이스 길드장이 계시에서 본 그 포탈이 맞을 겁니다.”
출구를 기다리고 있던 이들 앞에 그전에는 본 적 없던 칠흑 같은 새까만 색의 포탈이 나타났다. 누군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누군가는 절망에 물든 얼굴로 우리는 여기서 전부 죽을 거라고 외쳤다.
“그와 동시에 제 눈앞에는 시스템 창 하나가 떠올랐죠. 가이아 시스템의 숨겨진 비밀을 알려 주는 <관측자의 검>이라는 스킬이 발동된 겁니다. 그 스킬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가이아 시스템의 마지막 던전을 발견했다’고.”
“마지막 던전….”
도등수가 윤서의 말을 멍하니 따라 했다. 윤서는 그다음에 올라온 메시지도 읊었다.
평화를 위한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가시밭길
독을 품은 비가 머리 위로 내려오고,
굶주림과 추위는 그대를 지치게 하며,
넘어진 동료를 일으켜 줄 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관문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릴 때까지
가이아가 그대와 함께하니
그대는 두려워하지 않기를 · · ·
<관측자의 검>이 발동 중입니다.
가이아 시스템의 마지막 던전
※ 입장 불가 – 조건 불일치
가이아 시스템의 마지막 던전이 사라집니다.
“제 기억은 여기까지입니다.”
“하, 잠깐. 잠깐만요. 하….”
유준철이 상당히 혼란스러운 듯 머리칼을 헤집었다. 윤서도 어차피 그때 본 것은 다 설명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눈을 떠 보니 대던전을 나온 후였다.
최종 보스를 해치웠을 때는 분명 다섯 명이었는데 왜 네 명만 나왔는지는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다른 세 명은 모르겠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아마 라 비지나가 훨씬 정확하고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라 비지나의 정신만 온전하다면 신전에서의 일은 그녀에게 듣는 게 나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윤서의 희미한 기억에만 의지해야 했다.
유준철과 도등수, 그레이스는 비현실적인 뭔가를 마주하기라도 한 듯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일단, 차근차근 묻겠습니다. 메시지를 읽은 사람은 윤서 씨뿐입니까?”
“저만 본 건 아닙니다. <가이아의 눈>을 복사한 강진이 형…. 이강진 헌터도 봤습니다. 라 비지나 헌터는 못 봤을 거고, 이강진 헌터한테 메시지가 떴다는 걸 전해 들었겠죠.”
“그렇군요.”
도등수가 윤서가 읊은 시스템 메시지를 그들 사이에 입체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가시밭길, 마지막 관문, 새로운 세계, 가이아가 그대와 함께한다는 내용까지.
이 해괴한 내용은 꼭 전설의 서문 같기도 했다.
“윤서 씨, 이 메시지는 대체 뭘 말하는 겁니까? 새로운 세계라는 건 대체 뭡니까?”
“모릅니다.”
윤서는 그런 질문을 받을 거라 예상한 듯 즉답했다.
“제가 아는 건 모두 다 얘기했습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건 저도 몰라요.”
“…예,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유준철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불가사의한 메시지에 대한 추론은 이제 그들의 몫이었다. 내내 메시지를 읽고 또 읽던 도등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앞의 다섯 문장은 그냥 이 던전이 쉽지 않을 거란 걸 알려 주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그다음 문장이죠. 마지막 던전이 클리어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가이아가 도와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세로운 세계라는 건 뭘까요? 외계 행성? 다중 우주? 다른 차원?”
“사람들은 가이아 시스템과 게임을 자주 비교하고는 해요. 정말로 게임 시스템 바탕이라면 챕터 2가 열리는 걸지도요.”
“아예 이 시스템 자체가 소멸하는 걸 수도 있어. 어떤 선별을 마친 후 시스템은 가동을 멈추고 선별된 자들만 다음 세계로 나아가는 거죠. 휴거처럼….”
여러 추측이 오고 갔다. 윤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한 적 없으므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중 우주든 챕터 1이든, 휴거든. 그저 모쪼록… 유언 집행에 차질만 없기를 바랄 뿐이다.
“가이아 시스템에는 물리학, 천문학 관련 스킬명이 많잖아. 내 <퀘이사>라든가 형의 <테라포밍>, <오르트의 구름>. 수재희의 <상자 속의 고양이>도 결국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말하는 거고. ‘선택된 자’ 특성 입수 메시지에서도 ‘선택된 자’를 우주의 개척자로 표현했던 걸 보면 그 새로운 세계라는 건 우주와 관련된 건 맞는 것 같아.”
권지한의 낮은 목소리에 윤서의 귀가 쫑긋했다.
새로운 특성을 입수합니다.
‘선택된 자’
선하고 정의로운 그대여
가이아의 힘으로 평화를 수호하라 · · ·
새로운 세계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으니 · · ·
윤서도 봤던 메시지였다.
“정리하자면 이 우주인지 뭔지 모를 새로운 세계에 가기 위해서는 대던전 클리어 후 나오는 마지막 던전을 공략해야 한다는 거네요. 10년 전에는 실패했으니, 이제 다시 기회를 주는 거고.”
“클리어하지 않으면 지구가 멸망할 판인데 이걸 기회라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맞는 것 같군.”
유준철이 혀를 찼다.
“이제 던전 입장 조건을 알아봐야겠군요.”
“그건 제가 곧 예언 스킬 쿨 타임이 돌아오니까 가호 신께 여쭤볼게요.”
“예, 부탁합니다.”
“새로운 선택된 자도 찾아야 해. <가이아의 마음>과 <가이아의 그림자>, <가이아의 꿈>을 보유한 사람들.”
권지한의 말에 유준철은 곧바로 A급 헌터 리스트를 띄우고 그 특성을 가지고 있을 만한 눈에 띄는 후보들을 골랐다.
윤서는 참여하지 않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슬슬 집에 가고 싶었다. 내일 권지한과 맛집도 가기로 했는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내일을 맞이하고 싶었다.
앞으로 더욱 바빠질 것이다. 공략법을 만들고, 한동안 하지 않았던 수련도 하고, 틈틈이 유언 집행도 하려면….
윤서는 당연히 대던전에 들어가려는 생각이었다. 대던전 공략이 실패하면 앞으로 유언 집행이 힘들어지니까. 이제 유언은 17개 남았다. 종료를 목전에 둔 것도 있지만 아직 이뤄 주려면 한참 남은 것들도 있는데, 대던전 공략에 실패해 세상이 멸망해버린다면 어떻게 쿠키를 굽고 색칠 공부를 하겠는가?
이것이 표면적인 이유였고.
사실 아주 깊숙한 곳에서는 다른 이유가 자리 잡고 있었다.
대던전을 공략한 후, 검은 포탈이 나타났을 때의 일.
그레이스의 예지에 의하면 검은 포탈 속으로 누군가가 들어갔다.
단 한 명이었으며 그자가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의 추측대로 권지한인지. 아니면… 서채윤인지.
어쩌면 둘 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선 둘 중에 한 명으로 생각하는 게 가장 확률 높았다.
왜 한 명만 들어갔을까? 그 검은 던전에, 수백 명이 들어가도 부족할 곳에 왜…?
……그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죽었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서?
많은 생존자 중 용감한 영웅이 선두로 걸어 들어간 것이든…. 혼자만 살아남아 외롭게 들어간 것이든.
윤서는 그 한 명의 영웅이 권지한이게 둘 수도 없었고, 죽는 이들 중 하나가 권지한이게 둘 수도 없었다.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면 그건 저여야만 했다.
정의로운 희생정신 따위가 아니었다. 물론 윤서가 S급 옐로우 던전에서 죽으려고 한 건 사실이나, 그건 마력 고갈 때문이었다.
너무너무 죽고 싶어도 유언들이 남아 있으니 죽을 수 없다는 게 윤서가 가진 생각인데, 마력 고갈 상태에서는 그런 생각 따위 증발해 버린다. 우울함,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이 극대화되는 것. 죽어도 되는 이유를 억지로 찾아내고 스스로 납득해 버리는 것. 이게 바로 마력 고갈의 무서운 점이었다. 예를 들면 눈앞에 지뢰가 있다. ‘하마터면 밟을 뻔했네. 돌아올 때도 잘 피해야지.’ 생각했는데 마력 고갈 상태에서는 그냥 밟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력 고갈에서 벗어난 지금은 자살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다만…….
‘권지한이 죽는 것만은 절대로 용납 못 해.’
10년 동안 윤서의 삶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건 바로 유언이었다. 그렇게 죽고 싶어도 유언 때문에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게 되더라도 권지한을 죽게 할 수는 없다.
어차피 내게는 미래 따위는 없지만 권지한은 아니니까.
갈색 눈이 깊게 잠겨 갔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들리지 않게 되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윤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뜨거운 용암이 그 무엇도 남기지 않고 녹여 버리는 곳.
발을 옮기면 땅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곳.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어둠.
이끼가 낀 바위틈 사이로 벌레가 기어 다니고, 사방엔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한 곳.
들려오는 건 고통스러운 비명과 신음뿐.
윤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선하고 정의로워서 선택된 자들의 말로를 윤서는 안다. 그들은 모두 그곳에서 죽었다.
권지한만은 그런 끝을 맞이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윤서가 심연에 잠겨서 죽음을 생각하는 그때였다.
“그때도 인벤토리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직한 목소리가 깊은 연옥의 가장 밑바닥에 잠긴 윤서에게 닿았다.
“너무 분하고 원망스러워. 그때도 인벤토리랑 포션 같은 게 있었으면, 길드석 같은 게 있었으면 그렇게 많이 죽지 않았을 거야. 존나 억울해서 뒤져 버리겠어.”
그 목소리는 마치 그을음 진 검날 같았다.
윤서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권지한.
심드렁하거나 능글맞은 음성은 익히 들었으나 이렇게 어둡고 사나운 목소리는 처음 듣는다.
윤서는 멍하니 권지한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