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92)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92)화(92/195)
#85
권지한은 드물게도 윤서를 보고 있지 않았다. 미간을 잔뜩 좁힌 채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서가 잔뜩 그려 놓은 몬스터들 그림이었다.
“대던전에 나타난 보스 몬스터들은 S급 옐로우, 레드 던전의 보스 몬스터들이랑 닮았어. 가이아 시스템이 대던전으로 베타 테스트한 다음 업그레이드해서 다른 S급 던전들에 집어넣은 것처럼. 그리고 다른 잡몹들도 마찬가지야. 나도 수십 번, 수백 번 싸워 봐서 알아. 절대 이렇게 많이 죽으면서 싸울 몬스터들이 아니란 말이야.”
권지한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정적인 기색을 띠었다. 그는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구겨진 미간이나 찌푸려진 콧잔등, 턱에 잡힌 주름. 회색 눈과 검은 동공에 슬픔과 분노가 담겼다.
“지금까지 형 얘기를 들으면서 계속 생각했어. 리벤저는 운이 너무 안 좋았어. 가이아 시스템이 지금의 반만큼이라도 업데이트되었다면 대던전은 큰 희생 없이 클리어할 수 있었을 거야. 그렇게 정의롭고 용감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을 곳이 아니었어. 진짜 짜증 나.”
윤서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열띤 토론을 나누던 이들은 권지한의 심상찮은 분위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치를 살폈다.
“열 받아 미쳐 버리겠어. 죽지 않아도 됐었는데, 씨발. 다 구할 수 있었는데.”
권지한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는 진심이었다. 정말로 희생된 목숨들이 아깝고 억울하고 화가 나서 분노하고 있었다.
얼마나 화가 난 건지 가이아에게 쌍욕까지 퍼붓는 권지한을 윤서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나 마침내 입을 열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죽지 않아도 됐었지요.”
윤서는 그 말을 하면서 무언가 가슴 속에 응어리진 게… 아주 조금은 풀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권지한이 내뱉은 말은 윤서가 10년간 늘 해 온 생각이었다.
인벤토리가 그때에도 있었다면, 포션이 그때에도 있었다면. 길드석이나 아공간 같은 게 그때에도…. 아아, 너무 화가 나서 미치겠어. 너무 억울해 죽겠어. 너무 원통해.
생각하기만 하고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뱉은 적 없는 그 말들을 권지한이 다소 거칠게 대신 내뱉어 준 것이다.
권지한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속으로 삼켜야만 했던 윤서의 울분이 이제야 위로받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로부터….
“형.”
권지한이 윤서를 불렀다. 윤서가 눈을 끔벅이면서 바라봤다. 권지한의 회색 눈에는 금빛이 일렁였다. 너무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마력을 움직이는 듯했다.
“이번에 복수하자.”
“…….”
“존나 다 몰살시켜 버리자.”
“…대던전은,”
“나 겪어 보지 않았다고 쉽게 얘기하는 거 아니야. 정말로 대던전은 이제 우리 상대가 안 돼. 형이 아는 것보다 인간은 훨씬 더 강해졌어.”
“강해진 거 압니다. 다만 업데이트된 시스템을 믿고 방심하면 안 됩니다.”
“형, 우리는 단 한 번도 방심 같은 거 한 적 없어.”
권지한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한 자, 한 자 꼭꼭 씹어 먹을 듯이 발음하는 게 완전한 확신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이길 거야. 압도적으로.”
“…….”
대체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겠으나, 약간의 분노를 담은 동시에 확신으로 가득 찬 얼굴은 지나치게 근사했다. 순간 후광이 비치는 듯한 착각에 윤서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윤서 씨,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때마침 유준철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윤서는 내내 그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윤서가 저를 쳐다보자 유준철이 U패드에서 폴더 하나를 꺼내 허공에 띄웠다.
폴더에는 또 다른 폴더들이 담겨 있었다.
‘몬스터’, ‘스킬’, ‘아이템’, ‘던전 지형’, ‘가이아 시스템’, ‘행성 지도’.
유준철은 그중에서 ‘몬스터’ 폴더에 들어갔다. 반투명한 화면에는 수없이 많은 몬스터의 형태와 특징을 담은 리스트가 담겨 있었다.
“저희가 구축 중인 몬스터 베이스입니다. 출몰하는 지형과 등급별로 나눈 뒤 강, 목, 과, 속 등으로 세분화했습니다. 분석하다 보니 알겠더군요. 몬스터들은 잘 짜인 게임 데이터 같아서 공격력과 방어력을 정확한 수치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S급 옐로우 던전 이상에서 출몰하는 ‘작은 흡혈 박쥐’는 체력이 1,800~1,820이며, ‘큰 흡혈 박쥐’는 3,900~4,000입니다.”
“…….”
“마찬가지로, 저희는 각성자의 스킬도 수치화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 스킬 <어둠의 세례>의 공격력은 750, 소모되는 마력은 101입니다. 저는 <어둠의 세례> 여덟 번으로 ‘작은 흡혈 박쥐’와 ‘큰 흡혈 박쥐’를 해치울 수 있고, 808 마력이 소모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다른 안을 볼까요? 제 스킬 중 <흡혈 충동>의 공격력은 901, 소모 마력은 113입니다. 그럼 전 <흡혈 충동>을 여섯 번, <어둠의 세례>를 한 번 사용해서 박쥐 놈들을 물리칠 것이며 이때 소모되는 마력은 779입니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마력 소모량을 줄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뭐? 901이 뭐가 어쩌고 어째?
윤서는 숫자가 나오자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유준철이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얼추 이해했다.
“무기 공격력과 버프 아이템 사용 여부, 크리티컬 히트 여부, 스킬 쿨타임, 스킬 사용자의 숙련도 등 여러 변수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양자 컴퓨터를 이용해 그런 변수까지 모두 계산해서 시뮬레이션을 돌리면 효율적인 전투가 가능해집니다. 던전 공략이 마치 수학 방정식 계산처럼 숫자 싸움이 된 겁니다. 이건 윤서 씨가 얘기해 준 대던전의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가이아 시스템 업그레이드 이전의 몬스터들이니 더욱 계산하기 쉽겠죠.”
업그레이드 이전이면 왜 계산하기 더 쉬운 걸까. 윤서는 그런 궁금증이 들었으나, 현재 존재하는 생물의 과거를 추측하는 건 인류가 늘 해 왔던 일이란 걸 깨닫고 묻지 않았다.
유준철은 다른 폴더를 열었다.
이번엔 프록시마 b의 행성 지도였다.
“저희가 지도를 제작 중이란 건 지한이에게 들으셨지요? 지구보다도 크기 때문에 아직 미개척된 부분이 많으나, 윤서 씨가 말해 준 대던전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는 알 수 있더군요. 바로 여기, ‘용암 대협곡 10번’이라 이름 붙인 곳이 대던전의 진입 지역인 듯합니다. 4년 전 우리나라에 나타난 S급 레드 던전이기도 했죠.”
입체 화상으로 넘실거리는 붉은 용암이 나타났다. 유준철은 화상의 크기를 조절했다. 아직 미개척된 부분은 회색으로 표시됐고, 용암의 주위는 대부분 회색이었으나 색상과 이름이 적힌 곳들도 더러 있었다.
“용암 대협곡 10번과 연결된 이곳이 두 번째 지형인 늪지대일 겁니다. 8년 전 미국에 나타난 S급 레드 던전 지형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당시 나타난 던전 규모는 여기서 여기까지였고요.”
그 뒤로도 유준철을 몇 군데를 더 짚어 가면서 설명했다.
던전은 돔으로 둘러싸여 있고, 돔 밖의 지형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그 보이지 않는 지역을 서로 연결해가며 행성 지도를 만들어 냈다. 저번 던전에서 권지한이 그리던 지도보다 훨씬 더 정밀했다.
윤서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 모든 걸… 연구한 겁니까?”
“10년 전부터입니다.”
“…….”
“10년 전, 대던전 클리어 이후부터 계속해 오고 있었습니다. 지한이 말대로 너무 많이 희생되었으니까요. 아까운 목숨이 너무 많이…. 가이아 시스템이라는 미지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계속 그런 희생이 있을 거란 걸 모두가 알게 된 그때부터 석영의 주도로 각 지역 대형 길드와 헌터 연맹이 힙을 합쳐서 이룩한 데이터베이스입니다.”
“…….”
유준철은 뿌듯한 표정으로 윤서의 반응을 기다렸는데, 윤서는 실감이 안 나는 바람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준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알아낸 것을 기술하여 교재를 만들 예정입니다.”
“교재? 교재라니, 교과서 같은 거 말인가요?”
윤서가 안 그래도 크게 뜨고 있던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유준철은 자부심 가득한, 그러면서도 비장함이 넘치는 말투로 대답했다.
“예, 헌터 육성을 위한 교재입니다.”
급기야 헌터 육성이라는 단어까지 나오자 윤서는 팔목 살을 살짝 꼬집었다. 옆에서 권지한이 ‘형, 이거 꿈 아닌데 꼬집으려면 내 팔을 꼬집어’ 했다.
“윤서 씨는 처음 들어서 놀라셨겠지만 이미 정부 요직 인사들와 헌터 협회 간부들은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설마 태재식 아저씨도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윤서 씨. 당연히 태재식 이사에게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동네 이장님한테는 얘기해도 절대로 태재식 이사한테는 말 안 합니다.”
“…….”
“체계적인 몬스터 도감과 던전 맵, 스킬 사용법이 담긴 교재로 헌터를 육성하는 일은 석영이 10년 전부터 기획,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인데 이번 대던전 포탈이 공개되면 그때 함께 공개하려고 합니다. 이미 학교 부지도 선정해 놓은 상태입니다.”
“대담한 프로젝트를… 계획하셨네요.”
“인간다운 프로젝트를 하는 거지요. 인간은 정복하는 동물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가이아 시스템을 정복할 겁니다.”
“…….”
정복.
윤서는 일순 염려스러워졌다. 신이 들을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대격변의 날에 각성해 대던전을 겪고 ‘검은 포탈’ 앞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가이아가 정말 신처럼 느껴졌다. 전지전능한 상위 존재가 감히 가이아 시스템을 정복하겠다는 인류의 오만한 발언에 분노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윤서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준철은 대담한 발언을 계속했다.
“언제까지 이 정체 모를 빌어먹을 시스템의 지배 아래 살 수는 없습니다, 윤서 씨. 가이아 시스템이 업데이트하듯이 인류도 진화 중이에요. 던전, 스킬, 아이템 등 모든 것을 습득하고 활용해서 앞으로는 인류가 가이아 시스템을 이용할 겁니다. 가이아 시스템이 우리에게 베푸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이아 시스템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걸 만드는 거죠.”
“…….”
“우주선과 워프 홀을 연구 중이라는 건 아시지요?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이 연구는 상당 부분 진척되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인류는 가이아 시스템의 발산지인 센타우리계의 행성에 직접 가서 우리가 왔다고 얘기하게 될 겁니다.”
유준철의 눈빛에도, 말투에도 자신감이 가득했다. 도등수와 그레이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근거 없는 오만함이 아니다. 바로 이 영상구만 해도 인류가 발명한 것이 아닌가. 행성 지도도 상당 부분 진척된 걸 윤서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이 몬스터 도감 또한 정확하고 상세했다. 아이템 제작이야 이미 하고 있고….
정말 해낼 수도 있었다.
가이아의 시스템을 정복하는 것.
“윤서 형.”
퍽 다정한 목소리로 들려온 이름에 윤서가 권지한을 바라봤다.
권지한은 호전적인 듯하면서도 자신만만한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말했잖아. 우리는 형이 알던 것보다 훨씬 강해졌어. 한 명의 영웅에게만 희생하게 하는 일은 이제 없을 거야.”
“…….”
“가서 복수하자.”
윤서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부정도, 긍정도 나오지 않았으나 권지한은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저 알겠다는 표정으로 미소짓고만 있었다.
그들이 열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윤서는 멍해 있었다.
‘우리는 가이아 시스템을 정복할 겁니다.’
‘인간은 강해졌어.’
‘한 명의 영웅에게만 희생하게 하는 일은 이제 없을 거야.’
윤서는 그저 참혹하다는 감상으로 끝내버린 대던전 공략, 이게 뭐지? 하고 의문을 가졌다가도 어차피 불가사의라는 생각에 더 알려고 하지 않고 넘어간 것들. 아마 대다수가 그러할 것이다.
이 시스템은 본래 이래.
이런 시스템 속에서 희생은 당연한 거야.
이 시스템은 본래 인간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이니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는 미지를 파헤치고 있었다.
이들은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쿵, 쿵. 윤서의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뛰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큰 북을 울리는 듯했다.
불안함과 걱정, 우려….
그리고 기대감.
윤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린 지 아주 오래되었다. 윤서가 기대하는 미래는 오로지 모든 숙제를 마치고 죽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이들이 준비하는 미래가 보고 싶었다.
권지한이 말하는, 소수의 희생이 없는 세상.
그 미래에서는 1,201명의 죽음이 무의미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