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93)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93)화(93/195)
#86
대던전 발생까지 한 달 반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시간이 촉박했다. 그들은 앞으로의 일정을 간단히 정리했다.
우선 다음 주인 9월 1일 수요일, 대던전 발생 예언이 있었음을 전세계에 발표하기로 했다. 서채윤 복귀 기사를 내보내고 충분히 지났으니 혼란은 적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에 떠는 이들이 많다면 시간차를 두고 헌터 육성 계획과 우주 개발 등의 희망찬 소식도 내보내기로 했다.
발표하고 나면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열흘간 지원자 등록을 받고, 양자컴퓨터 분석 후 가장 완벽한 결과를 낼 헌터들을 엄선하여 4주간 합동 훈련을 진행할 것이다.
윤서 개인적으로도 할 게 많았다. 석영과 협조해서 대던전 공략을 위한 아이템들을 제작하고, 좀 더 구체적인 공략도 세울 계획이었다. 석영에서는 상태 이상 해소 포션 제작을 최우선으로 둔다고 했다. 윤서는 치유 내성을 없애고 싶지 않았고, 없어질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냥 마음대로 하게 뒀다.
10년 전의 참상에 대해선 대중에 공개하지는 않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정확히는 이번 대던전 공략 후로 미루는 것이다. 지금은 알맞은 시기가 아니었다.
서채윤의 치유 내성에 대해서는 윤서가 밝히지 않기를 희망해서 일단은 함구하기로 했다.
그렇게 일정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윤서는 소파에 앉아 머리를 헤집었다.
여러 가지 상념 때문에 복잡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었다.
‘뭐? 미래가 보고 싶어? 미친 거지, 내가.’
유준철의 저택에서 한껏 부풀었던 감정들은 혼자가 되자 돌덩이 같은 근심으로 변했다.
어떻게 미래가 보고 싶을 수 있을까.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고, 그 끔찍한 모습을 지척에서 봤는데도 아직도 미래를 꿈꿀 수 있다니 여러 의미로 끔찍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윤서는 괜히 햅쌀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라 비지나가 널 이제야 돌려준 이유가 뭘까. 10년 동안 제정신이 돌아온 게 이번 한 번만은 아닐 텐데.”
“…….”
“부르르 떨기만 하지 말고 말을 좀 해 봐.”
“…….”
햅쌀이가 안에서 얼마나 약이 올랐을지 상상하자 더더욱 근심이 깊어지는 바람에 말 걸기는 그만뒀다.
햅쌀이는 과거에도 윤서가 마력 고갈일 때면 동물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단검으로 돌아간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새가 되면 삐윳삐윳 울면서 윤서의 머리칼을 부리로 헤집었다. 눈을 표독스럽게 뜨고서 원망하는 투로 괴롭히는데, 윤서는 간지럽지도 않아서 가만 내버려 뒀다.
‘햅쌀아, 네 주인 가만히 둬. 네 주인도 많이 피곤해서 그런 거야.’
삐유!
‘햅쌀이, 언니한테 오자. 언니 머리카락 봐 봐. 길지?’
삐유웅.
정작 괴롭힘당하는 주인은 가만히 있는데 주위에서 햅쌀이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난리였다.
‘왜 자꾸 햅쌀이 여자애 만들어? 햅쌀아, 형태 형, 해 봐라. 형.’
삐윳.
‘채윤아. 네가 확실히 할 때가 됐어. 햅쌀이는 암컷이야 수컷이야?’
‘이 녀석은 그냥 아이템입니다.’
‘너무 매몰차다. 작은 구원자….’
삐유삐유!
‘햅쌀이도 너 냉정하다잖아. 우리 햅쌀이 오빠한테 와. 우웅, 그래. 서운했지. 우리 햅쌀이 살아 있는데.’
요즘 대던전 얘기를 계속 한 탓인지 혼자 있을 때면 그때 일들이 자꾸 떠올랐다.
윤서는 약병을 꺼냈다. 항상 넉넉하게 채워 두는 알약들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과거의 일이 떠오를 때면 즉시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증상이 모조리 닥쳐오니까.
“…….”
윤서는 약병의 뚜껑을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천천히 열고 하나만 꺼내 삼켰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눈도 길게 감았다가 다시 떴다.
몇 분간 그 행동을 반복했다.
쿵쿵, 빠르게 뛰던 심장 박동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손 떨림도 멎고 과거의 상념도 흐려졌다.
윤서는 햅쌀이를 푹신한 방석 위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쿠키나 구워야겠다.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고독과 허무가 순식간에 온몸을 감싸 온다. 이럴 때는 유언들을 처리하는 게 나았다.
온몸이 땀에 젖을 만큼 러닝을 뛰거나, 무아지경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생각 없이 쿠키 반죽을 만들거나. 그러면 잡념이 사라지고 기분이 나아졌다. 왜일까? 윤서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유언을 해결하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죽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권지한 것까지 구워야겠네.’
내일 새벽부터 만나서 줄 서기로 했다. 윤서는 아침 식사를 하고 갈 거지만 요즘 젊은 애들은 아침 식사를 거르는 경우가 많다니까 쿠키라도 먹일 생각이었다. 아마 식사는 점심에 하게 될 테니 요깃거리가 필요했다.
쿠키 틀과 주걱 등을 비롯한 준비물들을 꺼내는데 테이블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짧게 여러 번 진동했다. 윤서는 일단 준비물을 모두 꺼낸 뒤 메시지를 확인했다.
태재식
야… 뭐하냐…. 나 잊은 거 아니지?
윤서가 태재식, 라 비지나와 맺은 계약은 권지한과 맺은 계약과는 달라서 아직 자동 해지되지 않은 상태였다. 라 비지나와의 계약은 3주 후 그레이스가 계시를 받을 예정이라 그때 보러 가면서 해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태재식은….
“…….”
윤서는 일단 무시를 선택했다.
고희원
관종파이어 또 무슨 일이래요 ㅋㅋㅋ
박영범
응?
고희원
뭔일 생겼나봐요 홍의윤 에센에스 ㄱㄱ
“엥.”
윤서는 저도 모르게 박영범과 같은 소리를 내뱉고 홀로 수치심에 젖은 뒤 홍의윤의 SNS를 확인했다.
HELLHONNG
후회.
미안함.
내 생애 처음 겪는 감정-
이렇게 괴로운 것이었나.
오늘도 나는
전해지지 않는 사과를
가슴에 품는다
석영 본사의 옥외 정원에서 찍은 셀카가 첨부되어 있었다. 감성적인 흑백 셀카였다.
어이는 없긴 한데 SNS에 어떤 글을 올리든 자기 마음이고….
고희원
전 엔드파이어 길드원한테 직접 들었어요. 자기가 누구한테 잘못을 했는데 어떻게 사과하냐고 물었대요
박영범
그게 뭔 소리야. 사과하는 법도 모르나
고희원
귀엽지 않아요?ㅋㅋㅋ
박영범
으이구 귀여울 것도 많다. 난 됐고 서채윤이나 에센에스 해주면 좋겠어
고희원
헐 저도요ㅠㅠ 윤서 오빠는 석영 본사에서 지내면서 서채윤 마주친 적도 없어요?
없습니다.
박영범
우리 낙엽의 소중한 인재.. 거기서도 혼자 벽치면서 지낸다고 따돌림당하는 거 아니지?
사인을 받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고 있었다.
박영범
본사 스파이가 됐으면 우리한테 서채윤 얘기도 좀 전해 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고희원
윤서 오빠가 뭘 알겠어요~
오빠처럼 평범한 사람은 서채윤의 머리털끝 하나 본적없을걸요?
박영범
하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서채윤과 달리 우리 윤서 씨는 얼굴 빼고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니까 응응
고희원
그리고 오빠가 서채윤을 마주치기라도 했으면 분명 우리한테 바로 염장 질렀을 거예요 ㅋㅋㅋ
윤서는 곧바로 단체 방에 사진 하나를 보냈다.
박영범
헉 이게 머 ㅓㅓ야!?
고희원
헐‘;;;;
허류…. 권지하뉴ㅠㅠㅠㅠㅠㅠㅠ
바로 권지한, 유준철, 그레이스가 윤서가 만든 쿠키를 먹는 사진이었다.
‘잠깐 사진 좀 찍겠습니다. 포즈 취해 주세요.’
‘네? 아, 네? 사진 말씀입니까?’
‘형, 브이 하면 돼?’
‘마음대로요.’
윤서의 말에 셋은 어색하게 브이하고, 권지한은 쿠키를 든 채 근사하게 웃었다.
박영범
이거 윤서 씨가 만든 초코크랙쿠키네
고희원
존나부러워요ㅠㅠㅠㅠ 권지한이라니ㅠㅠㅠㅠㅠㅠ
엉어유ㅠㅠㅠㅠㅠㅠㅠ왜 덕은 계를 못타는 거임ㅠㅠ
박영범
부러워서 머리 깰 것 같군…..
옆은 석영 길드장에 에우로페 길드장??
고희원
석영 부길마도 있네여
존나 염장 ㅠㅠㅠㅠㅠ
그렇다. 윤서는 일부러 이 둘을 염장지르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박영범과 고희원의 ‘ㅠㅠ’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윤서는 미소까지 걸친 채 안 읽은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그중에 하나는 수재희에게서 온 것이었다.
수재희
형 잘 쉬고 있어요?? 놀랄까봐 미리 말해둘게요. 윤서가 서채윤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몇명 있어서 절대 아니라고 말해놨는데 형 길드 복귀하면 물어볼수도 있을것같아요ㅠ
놀랄까 봐 미리 말해 둔다는 메시지에 윤서는 무척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는 바로 수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 세 번 만에 연결이 되었다.
– 형! 잘 지내요?
“네, 재희 헌터도 잘 지냅니까?”
– 꿀 같은 휴식 중이죠. 근데 얼른 S급 던전이라도 가고 싶어요. 형 보고 싶어 죽겠어요.
“제가 서채윤이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 아, 그것 때문에 전화하셨구나.
“누구입니까?”
윤서는 전화를 스피커 폰으로 돌리고 투명한 볼에 버터와 크림치즈를 정량만큼 넣었다.
계량 따위 필요 없었다. 쿠키를 65,800개 정도 굽다 보면 이렇게 된다.
– 임시 팀이었던 남궁심해 헌터랑 김진해 헌터가 대놓고 물어보더라고요. 되게 낮고 굵은 목소리로, 윤서 헌터가 서채윤인가? 이렇게 위엄 있게 물어보는데 저도 살짝 쫄았어요.
“그 둘은 왜 절 의심한 거죠?”
– 왜, 임시 팀 들어갔던 던전에서 형이 최대 공로자가 됐기도 하고…. 서채윤이 엄청나게 미인이라는 소문도 퍼질 대로 퍼진 상황이라 의심할 만하죠….
윤서는 진즉에 얼굴을 가리고 다녔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얼굴을 가리고 다녔으면 그건 그거대로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 일단 저랑 수빈이 형은 윤서 형은 서채윤이 아니라고, 절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잡아뗐거든요. 납득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서채윤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전해 달라 그러고 갔어요.
“하고 싶은 말?”
– 이게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니라…. 그, 두 사람 형제 중에 리벤저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아아, 어떤 얘기인지 알 것 같군요.”
우물쭈물 말을 흐리는 수재희에게 윤서는 담담히 말했다.
합병식 연회장에서 형제는 대던전에서 죽은 가족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큰 형의 마지막을 알기 위해서 서채윤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심해 형, 큰형이 그곳에서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되면 우리 마음도 좀 편안해질까?’
가족의 마지막을 아는 이가 존재를 드러냈으니 얼마나 간절히 만나고 싶을까. 마지막을 듣는다고 마음이 편해질지는 모르겠으나 유일한 단서인 서채윤이 나타난 지금은 어느 때보다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윤서는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큰형이 가족을 향한 애틋한 유언을 남긴 게 아니라, 서채윤에게 새벽 낚시로 참돔 9짜 10마리 잡아 달라는 어처구니없는 유언을 남겼다는 건 도저히 얘기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