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95)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95)화(95/195)
#88
홍의윤은 쭈뼛쭈뼛한 태도로 말했다.
“뭐. 내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아, 내가 그러지 말랬지.”
“뭐, 뭐가.”
수재희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윤서 형, 제가 이 형 교육 더 시킬게요. 자나 깨나 형 걱정하면서 지내더니 막상 본인을 앞에 두고는 이러고 있네. 자기가 아무것도 모르고 심한 말 많이 했는데 어쩌냐고 얼마나 징징대던지 피곤해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윤서가 가만히 홍의윤을 바라봤다. 홍의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윤서도, 수재희도, 박수빈도. 심지어 권지한마저도 홍의윤에게 기회를 주듯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빨개진 청년이 우물쭈물 말하기 시작했다.
“…치유 내성이란 게 있는 줄 몰랐어. 그런 상태 이상이 있었으면 공개하고, 같이 치료 수단을 찾았어야지. 수, 숨어 버리면 어떡하냐.”
“아, 형. 사과한다며!”
수재희가 꽥 소리를 질렀다. 홍의윤이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몇 초 후 바로 고개를 들고 각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함부로 말해서 미안.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너무 오만했어.”
“홍의윤 헌터, 일단 전 치유 내성은 없앨 생각 없습니다.”
“어? 왜?”
“그리고…….”
윤서는 저번에 권지한에게 했던 질문을 홍의윤에게도 물을까 고민했다. 치유 내성이 없는 멀쩡한 상태로 잠적한 거였으면 지금 사과가 아니라 날 비난했을 거냐고.
이런 질문을 해도 부질없을 것이다. 어차피 각성자들 태반은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희생은 당연하다고, 아니, 희생이라는 생각조차 안 하겠지.
윤서는 말해봤자 입만 아플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유준철에게 그랬던 것처럼 적당하게 사과를 받아들이고 끝내려고 입을 열었다. 그때 권지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예전엔 권지한의 눈 색을 잿빛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햇살 아래에서 보니 보석 같은 은빛이었다. 그리고 햇빛 아래의 권지한은 생각보다 어린 청년이었다. 고작 스물두 살에 불과한.
“…….”
윤서는 다시 홍의윤을 쳐다봤다. 홍의윤이 의아한 얼굴로 윤서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 표정이 순진무구해 보였다. 따지고 보면 홍의윤은 자신보다 한참 더 어린놈이다. 권지한이나 홍의윤이나, 수재희나 박수빈이나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윤서가 입을 열었다.
“만약 ‘서채윤’이 어디도 다치지 않은 상태에서 잠적했다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무슨 말이야? 어디 아픈 곳이 없었다면 잠적하지 않았을 거잖아.”
“그렇군요. 치유 내성 덕분에 비난을 면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
“그러고 보니 10년 전 치유 내성이 막 생겼을 때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이 상태 이상이 마치 선물 같았습니다.”
“……왜?”
“이제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치유받겠구나 싶어서.”
“…….”
“눈앞에서 동료들이 죽어 가는데, 치유 스킬을 받으면 살 수 있는데도 나 혼자 그걸 독차지하고 있을 때의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압니까?”
여기 있는 이들 모두 그런 건 겪어 보지 못했기에 대답하지 못했다.
윤서는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은 다 죽었지만요. 역시 치유 내성은 없애지 않아야겠습니다. 계속 비난을 면하려면 말이에요.”
“…….”
“홍의윤 헌터는 각성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어, 어? 나는… 얼마 안 됐어…. 5년….”
“그렇군요. 홍의윤 헌터도 언젠가 헌터를 관둘 때 비난을 면하려면 저와 같은 상태 이상쯤은 생겨야 하지 않을까요. 걱정이네요.”
“…….”
홍의윤의 표정이 멍했다. 윤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알아들은 것 같았다.
만약 그저 약한 사람이 서채윤의 잠적을 비난했다면 윤서도 가만히 듣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약자를 도우며 살아온 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비난해도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으므로 처음부터 홍의윤에게는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다들 가이아 시스템의 희생양들이었다. 가이아 시스템의 근원적 문제, 범죄자는 각성하지 못한다는 것. 각성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어떤 헌터들은 각성 후에 더 정의감과 사명감에 가득 차기도 한다. 너는 착하다는 칭찬을 계속 들어서 더 착한 행동을 하려는 어린아이처럼.
홍의윤은 입술을 깨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윤서는 이 정의의 헌터가 답답해서 한마디 한 것뿐이니 홍의윤이 의기소침해지기를 원하지도 않아서 일부러 표정을 가볍게 꾸몄다.
“아무튼 사과는 잘 받았습니다. 이제 이런 쭈뼛쭈뼛한 태도는 그만두세요. 어색하니까.”
“어어…….”
홍의윤이 지금까지 중 가장 쭈뼛쭈뼛한 태도로 대답했다.
침묵이 흘렀다.
수재희와 박수빈도 윤서의 말에 생각이 많아진 듯했고, 권지한의 경우에는….
“…….”
또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괴로웠던 건 저인데 자기가 더 괴로워하는 표정.
그러나 그건 아주 찰나였고 윤서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표정을 확 바꿨다. 권지한은 빙긋 웃고는 윤서의 손에 든 쇼핑백을 가리켰다.
“근데 형, 바리바리 싸들고 온 그것들은 뭐야?”
노골적인 화제 전환에 윤서가 피식 웃었다.
“다들 아침 식사는 했어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묻자 수재희가 얼른 대답했다.
“이게 아침 아니었어요? 당연히 아직 안 먹었죠.”
“여기 식당 점심에 문 엽니다.”
“점심 먹으려고 벌써부터 줄 서는 거였다고요?”
수재희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홍의윤과 박수빈도 모르고 있던 모양인지 덩달아 놀랐다.
“유명한 식당이라고 말했잖아요. 그럼 홍의윤 헌터와 수빈 씨도 안 먹었겠군요.”
“당연하지, 씨…. 이렇게 일찍 일어났는데 어떻게 아침까지 챙겨먹…어.”
홍의윤이 윤서의 눈치를 보면서도 끝까지 말했다.
“저도 안 먹었어요. 윤서 씨는요?”
“저는 먹고 왔습니다.”
“혼자 밥 챙겨 먹고 왔……!”
홍의윤이 흥분하려다가 말았다. 수재희가 옆에서 피식피식 웃었다. 윤서는 뭐 시간이 지나면 홍의윤도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싶어서 놔뒀다.
“형, 왜 나한테는 안 물어봐?”
“권지한 헌터도 당연히 안 먹었을 테니까요.”
윤서는 담담히 말하며 쇼핑백에서 초코크랙쿠키를 꺼냈다. 반투명 봉투 다섯 장에 각각 50개씩 담고, 금색 리본으로 매듭까지 지었다. 인원이 다섯 명인 데다 다들 많이 먹는 각성자들이라서 넉넉하게 만든 것이다.
“와, 고마워요. 윤서 씨의 초코쿠키. 오랜만에 먹는군요.”
낙엽에서 일하면서 몇 번 얻어 먹어 본 박수빈이 환하게 웃었다. 홍의윤이 봉투를 받아들면서 눈을 깜빡였다.
“이걸 직접 만들었다고?”
“네, 어제 만들었습니다.”
홍의윤이 잽싸게 받아들더니 우선 사진부터 찍었다. 찰칵, 찰칵. 연사하다가 같이 셀카도 찍고, 동영상도 촬영한 후에야 한 개를 바삭, 하고 깨물었다. 깨물자마자 풍기는 단맛과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식감에 이빨로 깨물면 사르르 녹는 초콜릿칩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쿠키였다.
“베이킹까지 섭렵했다니…!”
홍의윤은 마치 적군의 장수에게 감동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윤서는 쿠키를 돌려받고 싶었으나 이미 쿠키 봉투는 홍의윤이 두 손으로 소중하게 안은 채였다.
“이렇게 많이 만들기도 피곤했을 텐데…. 그리고 우리는 어젯밤에 급 약속 잡은 거였는데 우리 것까지 만들어 주느라 고생했어요, 형.”
“고생은요. 양만 더 잡으면 되는 거라 간단한 일입니다.”
“겸손하기까지 해…. 저 진짜 평생 따를게요. 서채윤 님이 내가 생각하고 상상했던 바로 그런 품격을 지닌 훌륭한 분이어서 정말 행복해요.”
수재희가 우는 시늉을 했다. 아니, 시늉이 아닌 것도 같았지만 윤서는 수재희가 생각하고 상상했던 바로 그런 품격을 지닌 훌륭한 분이 아니므로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고마워, 형. 잘 먹을게.”
권지한이 쿠키를 오독오독 깨물어 먹었다. 윤서는 사실 쿠키를 구우며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런데 권지한의 입술 안쪽으로 하얀 파우더 가루가 뿌려진 초콜릿색 쿠키가 야금야금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있지도 않았던 피곤함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이것 봐. 나랑 권지한 사이 안 나쁘다니까?’
윤서는 수재희를 곁눈질했다. 그러나 수재희는 자기 건 아까워서 못 먹겠다면서 홍의윤의 쿠키를 뺏어 먹느라 이쪽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할 듯싶었다.
윤서는 들고 온 쇼핑백 두 개 중 하나를 수재희에게 건넸다.
“이건 수재희 헌터 겁니다.”
“네? 뭐예요, 형?”
수재희가 내용물을 꺼내고는 깜짝 놀랐다.
“니트입니다. 제가 떴는데 마침 수재희 헌터 사이즈에 맞을 것 같아서요.”
“헐….”
수재희가 입을 멍하니 벌렸다.
“서채윤 님이 직접 만든 쿠키에 직접 만든 니트까지….”
그는 손을 덜덜덜 떨더니 니트를 부여잡은 채 갑자기 무릎 꿇었다. 안 그래도 그들에게 쏠리고 있던 시선에 경악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런 행동엔 윤서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너무 감동적이라서…. 형 잘 입을게요. 진짜 고마워요. 아니, 근데 못 입을 것 같아요. 아까워서 어떻게 입어. 지금 쿠키도 아까워서 못 먹겠는데…. 흐엉엉. 집 안에 장식해 놓을게요. 힘들 때마다 니트 보면서 힘낼 거예요. 영원히 간직할 거예요.”
“입든 보관하든 마음대로 하고 얼른 일어나요.”
윤서가 수재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허리를 숙였는데, 그 전에 먼저 불쑥 끼어드는 팔이 있었다.
“사람들이 다 너만 쳐다본다.”
권지한이 수재희를 일으켜 세웠다. 수재희는 흐엉헝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니트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옆에서 홍의윤이 반쯤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씨발, 존나 부러워….”
박수빈은 수재희를 귀엽다는 듯 보며 말했다.
“윤서 씨가 직접 뜬 니트군요. 저도 하나 가지고 있죠.”
낙엽 길드원들은 전부 한 개 이상 가지고 있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것도 형이 떠 준 거야.”
권지한의 자랑도 빠지지 않았다.
“존나 부럽다…. 나도 갖고 싶다….”
세 명이 뿌듯함에 젖는 동안 홍의윤의 다 들리는 중얼거림만 더욱 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