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96)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96)화(96/195)
#89
아침 10시가 되자 줄 선 이들이 더욱 많아지자 식당 직원이 적당한 선에서 줄을 잘랐다. 앞에서부터 일행이 몇 명인지 체크하던 직원은 윤서 일행을 보고서 흠칫 뒤로 물러났다. 키도 크고 말끔하게 생긴 남자들은 안경, 마스크, 모자 등등을 착용하고 있었다. 변장 아이템이 분명했다. 그중에서도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은 남자가 직원에게 물었다.
“몇 시쯤 입장 가능합니까?”
“아, 그….”
단정하고 고혹적인 분위기의 미인이었다. 동행인들이 다들 잘생기긴 했지만 이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보는 터라 직원이 멍하니 바라보자 미인이 한 번 더 물었다.
“몇 시쯤 들어갈 수 있습니까?”
“아. 하, 한 시 전에는 들어가실 거예요. 앞 팀이 열두 팀이라서….”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저,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헌터분들이세요?”
“예.”
미인이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한 눈빛을 했다.
“그, 헌터분들이면 대부분 드시는 양이 많아서 미리 준비해 놔야 하거든요.”
“아, 인당 세 그릇 이상은 먹을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직원은 왜인지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뒤쪽으로 사라졌다. 윤서는 곰곰이 생각했다.
‘인당 세 그릇이면 되겠지. …부족해도 어쩔 수 없어.’
윤서만 해도 다섯 그릇은 기본으로 먹으니 부족할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시키면 뒤에 줄 선 사람들에게도 민폐였다.
“와, 미쳤다. 저 밥 먹으려고 여섯 시간 넘게 줄 서 보는 거 처음이에요. 윤서 형이 준 쿠키 아니었으면 포기하고 다른 데 갔을 듯.”
“줄 서는 게 취미인 사람 앞에서 그런 말 해도 돼?”
권지한이 주의를 주자 수재희가 헉, 하고 놀랐다.
“아니, 그게. 윤서 형, 저 형 취미 무시하는 게 아니라요. 그러니까 그냥 제가 이런 좋은 취미 생활도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았던 게 원통하고 원망스러워서…. 줄 서기 짱 좋은 것 같아요. 운동도 되고요. 앞으로 저도 자주 줄 서기 할래요.”
수재희가 주절주절 변명했다. 윤서는 권지한을 노려봤다. 쿡쿡 웃고 있던 권지한은 윤서와 눈이 마주치자 더 장난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딱 22살 남자애 같았다.
윤서는 한숨을 내쉬고는 수재희에게 말했다.
“저 줄 서는 취미 없습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줄 서는 맛집에 몇 번 간 적 있을 뿐입니다.”
“정말요? 하지만 지한이 형 말로는….”
“권지한 헌터가 절 놀리는 겁니다.”
“어… 그래요?”
수재희가 눈을 끔뻑하며 권지한을 바라봤다. 권지한이 인자하고도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형, 이런 건 남에게 말 못 할 부끄러운 취미가 아니니까 숨기지 않아도 돼. 난 형이 늘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동안 정체도 감추며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단 말이야. 그러니까 취미만이라도 숨기지 말아 줘.”
윤서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저딴 말에 누가 속나 싶었는데 바로 헌터들이 속았다.
“아, 진짜 그렇게 우리 못 믿으면 속상해요. 윤서 형. 베이킹, 뜨개질처럼 맛집 줄 서기도 다 가치 있는 취미라고요.”
“윤서 씨는 평소에 우리를 어떻게 봤길래 이런 취미도 이해 못 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야, 씨발. 이런 취미가 뭐가 잘못됐다고 숨기려고 그러냐? 나는 사실 가끔 올 누드로 우리 집 정원 뛰기도 하는데 그거에 비하면 멀쩡한 취미지!”
“…….”
“…….”
홍의윤이 윤서를 보호하려다가 숨겨야 마땅한 제 취미를 고백했다. 일행이 홍의윤으로부터 한 걸음 거리를 벌렸다. 홍의윤은 귀신 같은 육감으로 그것을 감지하고 당장에 눈을 부릅떴다.
“왜 떨어져. 설마 내 취미를 존중 못 하겠다는 거야?”
“형, 그건 좀….”
“다들 맨몸으로 정원 뛴 적 없는 것처럼 굴고 있네. 솔직히 한 번은 해 본 적 있으면서.”
“대체 그걸 누가 해요….”
“거짓말.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다들 발가벗고 달리고 싶잖아. 발가벗고 달릴 용도로 정원 딸린 주택을 구입한 내가 부러우면서!”
“…….”
그렇게 홍의윤과의 마음의 거리만 더 멀어지는 오전이 지나가고 마침내 그들이 들어갈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다섯 명이라 미닫이문이 있는 온돌방을 배정받았다. 수재희가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
세 명, 두 명이 마주 보고 앉아야 했는데 홍의윤이 냉큼 들어가 안쪽을 차지했다. 그다음 들어간 윤서는 홍의윤의 맞은편 안쪽에 앉았다. 권지한이 윤서 쪽으로 들어오려는데 갑자기 수재희가 끼어들어서는 윤서의 옆자리에 냉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고는 윤서에게 한쪽 눈을 찡긋찡긋 해 보이는 것이다.
‘완전 엉망진창으로 파국 난 형들의 관계는 내가 잘 수습할게요. 걱정 마세요.’
라는 듯했다. 윤서가 어이없어서 한마디 하려는데 그 전에 수재희의 몸이 쏙 올라갔다.
“넌 바깥쪽에 앉아서 물심부름이나 해.”
“헐, 형. 너무해요.”
권지한이 수재희의 뒷덜미를 잡고 무 뽑듯이 쏙 들어서 바깥쪽 자리에 던졌다. 그러고는 저는 윤서의 옆에 앉았다. 좌식이라 양반다리를 하고 앉는데, 권지한의 다리가 길어서인지 그의 무릎과 윤서의 무릎이 닿을락 말락 했다. 윤서는 한껏 벽에 붙었다.
가장 늦게 들어온 박수빈은 홍의윤의 옆에 앉았는데 윤서와 권지한을 한 번 흘깃할 뿐 자리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메뉴를 주문받아 놓았기 때문에 앉자마자 돼지갈비찜과 푸짐한 밑반찬들이 나왔다. 소문대로 맵고 맛있어서 모두 잘 먹었다. 그들은 돼지갈비찜 3인분씩에 사이드 메뉴인 고기만두, 주먹밥, 계란찜, 떡볶이까지 해서 토탈 20인분을 해치웠다. 다들 건장한 헌터들이기 때문에 그 정도 먹는 건 당연했다.
다들 빠르게 식사를 끝냈으나 스무 번 이상 씹으라는 유언의 저주에 갇힌 윤서는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 일행은 윤서를 기다리며 여러 대화를 했는데 아무래도 얼마 전 S급 범람 처리를 해서인지 전투 얘기가 많았다. 윤서는 끼어들지 않고 열심히 먹으며 듣다가 의외의 말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화심 헌터가 퍼펙트에 남기로 했다고요?”
“아, 네. 형은 모르셨구나.”
“C급이 왜….”
“전 못 봐서 모르겠는데 화심 형이랑 같이 들어간 2팀 팀원들 말로는 엄청난 화염 스킬 쓴다고 하더라고요. 그 스킬 아니었으면 전멸했을지도 모른대요.”
확인하기 위해 홍의윤과 박수빈을 바라보자 박수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홍의윤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범위는 나보다 좁지만 위력은 더 좋았어. 사실 딱 한 번 봤을 뿐이라 썩 탐탁지는 않은데 팀장이랑 길드장이 남기겠다고 하네.”
“화심이 형 본인도 퍼펙트로 남고 싶어 했어요. 그 서채윤까지 본 마당에 떠나고 싶겠어요? 그리고 장담하는데 그 형도 분명 뭔가가 있어요. S급은 아닐지라도 분명 뭔가가.”
화심한테서 수상하게 보이게끔 하는 오오라라도 나오나?
윤서가 <인류 도감>으로 확인했을 때는 분명 평범한 C급이었다. 혹시나 해서 권지한을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 스킬로 봤을 때도 C급 맞았어. 나중에 내가 준철이 형한테 말해서 빼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마.”
그제야 윤서도 안심했다. 홍의윤과 박수빈은 떨떠름해했지만….
***
“이제 뭐 할까요. 영화? 게임? 아니면 수련장 가서 대련이나 할래요?”
“마지막 좋은데.”
“나도 마지막 찬성.”
윤서가 식사를 마무리하자 일행이 다음 행선지를 논의했다.
“윤서 형은요?”
“하긴 뭘 해요. 집에 가야죠.”
“네에? 이렇게 바쁜 헌터들을 모아 놓고 집에 간다니요. 어떻게 그런 심심한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수재희는 윤서가 큰 배신이라도 한 것처럼 소리쳤다.
윤서는 밥 먹은 후의 일을 생각하지 않은지라 다소 난감했다. 윤서의 표정을 확인한 박수빈이 말했다.
“윤서 씨,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나 해요. 전해 달라는 말도 많고….”
“맞아요, 형. 본래 오늘 만난 이유도 서채윤한테 전해 달라는 말이 뭔지 들으려고 만난 거였잖아요.”
아니다. 오늘 만난 이유는 권지한과 자신의 사이가 파국이 나긴커녕 원만하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생각해 보니 이 목적을 아직 달성하지 못한 것 같아서 윤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석영 본사로 갈까요.”
“흥, 오늘 회사에 가면 소문 퍼져서 조용한 대화는 못 할걸?”
“그럼 역시 오늘은 헤어지는 걸로….”
“따, 딱히 갈 곳 없으면 우리 집에나 가든가!”
홍의윤이 턱을 치켜든 채 새침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대로 헤어지기 가장 아쉬워하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
홍의윤이 유명한 건축업체에 직접 의뢰를 넣어 지었다는 집은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전원주택이었다. 잘 꾸며진 정원에 넓고 깔끔한 외관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으나 석영 길드장의 저택에 매일같이 방문했던 윤서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집주인이 종종 발가벗고 뛰어다닌다는 정원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깔끔한 하얀 벽에 걸려 있는 명화들, 곳곳에 놓인 대리석 조각상들,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까지…. 여러모로 허세 가득한 공간을 홍의윤이 자랑스레 소개했다.
“홍의윤 씨, 피아노 연주도 해요?”
“크흠, 못 하진 않아.”
“이 형 피아노 못 쳐요. 체르니 100번도 못 뗐어요. 저 값비싼 피아노가 아깝다니까요.”
“체르니 100번을 못 뗐다고 피아노를 못 치는 건 아니거든?”
“아니야, 형. 그건 보통 못 친다고 해. 앞으로 누가 피아노에 대해 물어보면 장식용이라고 대답하는 게 좋겠어.”
“씨발, 덤벼. 새끼야.”
홍의윤이 당장이라도 <불의 고리>를 사용하려는 듯 붉은 눈을 번뜩였다.
“윤서 형 취미 중에 피아노도 있지 않아?”
그때 권지한이 상큼한 말투로 물었다. 윤서를 돌아보는 세 명의 눈빛이 대번에 반짝반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