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97)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97)화(97/195)
#90
“맞아요. 윤서 씨 피아노 아주 잘 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직접 듣진 못했지만 낙엽 길드원분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더군요.”
윤서는 낙엽의 창립기념일에 딱 한 번 피아노 연주를 한 적 있었다. 그때 낙엽 길드원들이 한동안 윤서를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쳐다보며 연주를 또 해 달라고 졸라 대서 다시는 그들 앞에서는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형, 저 너무 듣고 싶어요.”
“저도 듣고 싶네요.”
“흥, 뭐. 원한다면 들어 줄 의향은 있어.”
셋이서 대놓고 연주를 청해 왔다. 당연히 윤서는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나도 듣고 싶어. 즉석에서 피아노 연주 듣는 건 살면서 처음인데 그 처음이 형의 연주면 무척 의미 있을 것 같아.”
권지한이 그윽한 시선과 근사한 저음으로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무시하겠는데 이상하게 권지한의 청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윤서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고, 나머지 네 사람은 의자까지 챙겨와 관람 준비 중이었다. 수재희가 손을 들었다.
“신청곡 받나요?”
“안 받습니다.”
냉정한 거절에 수재희가 시무룩하게 손을 내렸다.
‘그래. 피아노 연주 여기서 개수 하나라도 줄인다 생각하자.’
윤서는 가볍게 건반 몇 개를 눌렀다. 역시나 조율이 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지금 조율부터 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냥 연주를 시작했다.
그가 연주할 수 있는 곡은 단 다섯 개뿐이었다. 그중에서 어떤 걸 칠까 하다가 빠르게 끝낼 수 있는 하나를 선택하고 곧장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한가한 오후, 전면 창으로는 맑은 햇살이 비쳐 들어왔고 무심한 표정의 미인이 담담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림만 보면 눈을 감고서 아름다운 선율을 음미하고 싶은 분위기였으나….
그 미인이 연주하는 곡의 선율이 워낙 빠르고 경쾌한 데다가 긴장감까지 돌아서 음미고 뭐고 없었다.
윤서가 선택한 곡은 림스키 코르사코프 ‘왕벌의 비행’이었다. 그는 작은 별도, 학교 종도 못 치지만 왕벌의 비행은 칠 수 있었다.
워낙 빠른 템포의 곡이라 금방 끝났다.
‘이걸로 202번째.’
그는 속으로 횟수를 계산하고 마지막 음을 쳤다.
“…….”
청중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흘러나오지 않아서 그곳을 바라보자 남자 네 명이 입을 벌리고 멍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박수빈이 아, 하고 뒤늦게 손뼉을 짝짝짝 쳤다.
“윤서 씨, 진짜 잘 치네요. 손가락이 보이지도 않았어요.”
“이거 ‘왕벌의 비행’이잖아요, 형. 맞죠? 이거 대박 어려운 곡이라고 알고 있는데 악보도 없이 그냥 막 치네. 피아니스트인 줄 알았어요.”
“개쩐다….”
홍의윤조차 놀란 표정으로 감탄을 내뱉을 정도이니 잘 치긴 한 모양이었다.
“형은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이렇게 다 잘하면 어떡해? 그림도 잘 그려, 베이킹도 잘해, 뜨개질도 하는 데다가 이제 피아노까지 잘 친단 말이야?”
권지한의 말은 칭찬인지 투덜거림인지 헷갈리는데 아마도 칭찬인 것 같았다.
“거기다가 서채윤이잖아. 진짜 어이가 없다.”
“그게 뭔 소리예요?”
“그렇게까지 완벽할 필요 있냐는 소리야.”
윤서는 자신이 권지한에게 하고 싶던 소리를 들으니 더욱 어이가 없었지만 참았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 수재희가 사이가 나쁘다고 오해할까 봐.
“다른 곡도 쳐 주면 안 돼요, 윤서 씨? 이번에는 분위기 있는 걸로. 저 솔직히 감성에 젖을 준비하고 있다가 너무 긴박해서 깜짝 놀랐잖아요.”
“귀찮습니다.”
사실 윤서가 연주할 수 있는 다른 곡들은 5분이 넘어가는 곡들이라 연주하기 귀찮았다.
“형, 피아노도 오랜만에 자길 연주할 수 있는 진짜 피아니스트 만나서 얼마나 기분 좋겠어요. 피아노를 생각해서라도….”
“안 해요.”
“야. 이 피아노 너 줄 테니까 좀 더 쳐 봐.”
“싫습니다.”
윤서는 깔끔하게 손을 털고 덮개를 덮었다.
아무리 찔러도 안 먹힐 것 같은 단호한 얼굴에 수재희와 박수빈, 홍의윤이 권지한을 쳐다봤다. 아까 전 윤서가 권지한의 부탁만은 받아 줬기 때문이었다. 권지한은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래. 그만하자.”
세 남자가 배신당한 표정을 지었다. 권지한은 이어서 말했다.
“나중에 나 있을 때만 쳐. 나만 들을 거야.”
세 남자가 이번엔 윤서를 쳐다봤다. 윤서가 얼마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
윤서는 역시나 세상에서 가장 황당무계한, 예를 들어 ‘하늘 높이 날고 있는 저 송이버섯을 좀 봐.’ 같은 말을 들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 지한이 형. 형이 뭔데 독점해요. 형이랑 윤서 형 완전 파탄 난 사이잖아요.”
“무슨 파탄 같은 소리야? 나랑 형아 사이 좋아.”
“거짓말! 전 다 안다고요. 다 알지만… 말할 순 없지만…. 그것도 안 하기로 했고.”
“뭔 헛소리야? 이 니트도 형이 떠 준 거라니까.”
“진짜로요?”
수재희는 아까 니트 선물에 감격하느라 제정신이 아니어서 권지한이 입은 니트가 윤서가 떠 준 것임을 처음 알았다. 수재희가 고개를 홱 돌려 윤서에게 확인했다. 윤서가 얼른 고개를 연속 세 번이나 빠르게 끄덕였다.
“하….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더니….”
수재희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거, 공유 좀 합시다. 내가 피아노도 준다잖아.”
홍의윤은 여전히 연주를 더 해 달라고 난리였다.
박수빈만은 조용했다.
윤서의 살짝 발개진 귀 끝을 발견한 사람은 박수빈뿐이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많이 친해진 모양이군.’
내가 먼저 윤서를 발견했는데.
1년 동안 곁에서 지켜본 건 나였는데….
박수빈은 조금 씁쓸한 마음이었다.
***
“이쪽으로 오면 돼요, 형들.”
수재희가 길 안내를 다시 시작했다. 다른 공간들도 허세 가득하긴 했는데 역시 가장 허세 가득한 공간은 그랜드 피아노가 놓인 공간이었다. 수재희가 이 집에는 수족관도 있다면서 수조와 물고기들을 소개할 때 박수빈이 수재희에게 물었다.
“재희 너는 이 집에 자주 와 봤어?”
“이번에 세 번째인데 벌써 제집 같아요.”
수재희가 씩 웃었다.
집 구경을 마친 그들은 응접실에 앉았다.
이제 그들은 본격적으로 오늘 만난 목적에 관해서 대화를 시작했다.
“윤서 씨가 없는 2주간 석영이 굉장히 바빴어요. 고객 센터와 경비에 일시적으로 인원을 대거 충원했을 정도로.”
박수빈은 윤서에게 이야기해 줬다.
쏟아지는 전화들, 무작정 들이닥치는 기자들, 헌터들의 가입 문의 폭주….
이 정도까지는 그러려니 하겠으나 서채윤 광신도들, 사냥꾼 단체들의 침입 시도도 빈번했다고 하니 윤서는 미안해졌다.
“어제도 외국 사냥꾼들이 밤에 몰래 침입을 시도했다더군요. 국가 군사령부도 아니고 감히 석영 본사에.”
“수고가 많았군요….”
“그 서채윤을 품으려면 이 정도는 돼야죠.”
“…….”
윤서는 민망해서 차만 홀짝였다.
“여하튼 여러 일이 있었지만, 윤서 씨가 서채윤이라는 사실은 철저하게 기밀로 지키고 있으니 걱정마세요.”
“정 뭐하면 내가 SNS에 한소리 할 수도 있어. 제발 가만히 좀 놔두라고. 나 팔로워 많거든. …혹시 너도 SNS 해?”
“없습니다.”
아이디가 있긴 하지만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유언 중에 ‘SNS 팔로워 1만 명 만들기’가 있어서 일단 만들어 놓았는데 아직 올린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만들면 내가 팔로우할게! 나 팔로워 오천만 명 넘는데 팔로잉은 세 명밖에 안 돼. 전 길드 오피셜 계정이랑 석영 오피셜 계정, 세계 자연 보호 기구 오피셜 계정. 팔로워가 오천만을 넘는데도 말이야.”
홍의윤이 자랑스레 말했는데 윤서는 왜 자랑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계 자연 보호 기구 계정을 팔로한다는 게 자랑스러운 건가?
“윤서 형은 SNS 할 생각 없어요? 윤서 말고 서채윤 이름으로. 하루 만에 1억 명도 찍을 것 같은데.”
현재 세계 인구가 60억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라 윤서는 당연히 농담이라 생각하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지한이 형 계정 팔로워가 3억 명 넘죠? 활동 안 한 지 1년도 넘었는데 계속 늘고 있다면서요.”
권지한이 SNS가 있었다고? 윤서는 얼른 핸드폰을 꺼냈다.
“확인 안 해 봐서 몰라.”
“이제 SNS 접은 거예요?”
“접지는 않았어.”
“하지만 권지한 헌터는 팔로워가 3억이지만 팔로잉이 123개나 되는데…. 나는 팔로잉 3명밖에 안 했단 말이야.”
홍의윤이 투덜거렸다. 윤서는 대체 홍의윤이 왜 팔로잉 수가 적은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지는 모르겠고 얼른 검색해서 권지한의 SNS 계정을 찾아냈다.
올라온 글이 무려 402개나 되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팔로우를 눌렀다. 집에 가서 존나 볼 것이다.
옆에서 윤서가 하는 행동을 본 권지한이 피식 웃었으나 윤서는 현실의 권지한에게는 신경을 쏟지 않아서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튼 전 SNS는 할 생각 없습니다. 얘기나 계속하시죠.”
“아, 네.”
이제 리벤저 유가족들이 전해 달라고 한 말을 들을 차례였다.
박수빈과 수재희가 U패드 화면을 켰다. 화면에 전달을 부탁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슬쩍 봐도 백 명이 넘는 것 같았다.
“기억나는 한에서만 대답해 주세요. 10년도 지난 일이고 1200명이 넘으니 한 사람, 한 사람 기억 못 할 수도 있으니까요.”
‘기억나는 한이라.’
우스운 말이다. 윤서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먼저 남궁심해 헌터와 김진해 헌터가 물어봐 달라고 한 건데요. 형, 혹시 리벤저 중에 김서해 헌터라고 기억해요?”
“물론 기억합니다.”
“김서해 헌터가 두 사람의 큰형이었대요. 큰형이 죽기 전 남긴 말이 없는지 궁금하다고, 마지막 모습이라도 알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김서해 헌터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동생들 얘기를 자주 하고는 했죠. 저와 비슷한 나이의 어린 동생들이 있다고, 아주 의젓하고 대견한 녀석들이라고. 그는 대던전 공략 중반에 사망했습니다.”
“유언은 안 남겼어요?”
“유언은….”
새벽 낚시로 참돔 9짜 10마리 낚아 줘
윤서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따로 남기지 않았으나 그는 낚시를 좋아했습니다. 평소에 동생들이 낚시를 즐기며… 살았으면 한다는 말을 자주 했으니… 그런 비슷한 말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까요.”
“낚시요?”
“네…. 이왕이면 새벽 낚시로….”
“새벽 낚시….”
“이왕이면 참돔 9짜를….”
“9짜….”
“10마리 이상 낚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싶군요….”
“…….”
수재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박수빈도 마찬가지였다. 홍의윤은 “갑자기 웬 참돔? 회 먹고 싶다.” 이런 말을 하며 횟집 배달을 시키려 들었다. 윤서는 일부러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차를 홀짝 마셨다.
“형도 낚시가 취미잖아. 둘이 잘 맞았겠네.”
“예, 뭐….”
권지한이 흐음, 하며 턱을 쓸었다. 회색 눈이 뭔가를 가늠하는 듯 가느다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