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layed My Death Because Of a Will RAW novel - chapter (98)
유언 때문에 죽는 건 잠깐 미뤘습니다 (98)화(98/195)
#91
윤서는 뻔뻔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음은요?”
“아….”
뭔가를 생각 중이던 박수빈이 두 번째 이름을 말했다.
“아르타리타 수잔 헌터는 기억하시는지요? B급이었다던데. 그분의 가족이 활약상을 궁금해하시네요.”
“아르타리타 헌터는 진입 초기에 사망해서 얘기를 나눈 적은 없으나 그분을 알았던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하곤 했습니다. 용암에 추락하면서도 메고 있던 가방을 우리 쪽으로 던지고 떨어졌어요. 식료품이 가득 담긴 가방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대단하죠. 가족분들이 이 얘기를 듣고 자랑스러워하셨으면 좋겠군요.”
“…….”
“그리고요?”
“황회정 헌터의 가족에게서도 연락이 왔어요. 그곳에서 어떻게 잘 지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많은 도움이 됐는지, 남기고 간 유언은 없었는지…. F급 헌터여서 기억 못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분도 진입 초기에 사망해서 따로 유언은 듣지 못했습니다. 음식이 아니라 책을 들고 와서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본인이 쓴 동화책이더군요. 수염을 길게 기르고 머리칼도 희뿌연 할아버지가 아기자기한 동화책을 쓰셨다기에 신기하게 생각했었어요. 그분의 가족에게 남은 리벤저들이 동화책을 보면서 끔찍한 현실을 버텼다고 꼭 전해 주십시오.”
“…….”
“…….”
“아, 나제민 헌터…. 이분도 F급 헌터였는데.”
“나제민 헌터는 E급 헌터입니다. 공략 중반에 사망했고요. 스킬은 강하지 않으나 전투 센스가 뛰어나서 더 높은 등급의 헌터들도 그가 목숨을 구해 주고는 했습니다. 리벤저에 없어서는 안 되는 훌륭한 분이셨다고 전해 주세요. 아, 마지막에 남긴 말은 그림을 많이 그리라는… 그런 거였습니다.”
“그림이요?”
“그림 그리기를 워낙 좋아하던 사람이라.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를… 열심히 그리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어요.”
정확히는
풍경화 120점, 인물화 30점, 정물화 30점 그려 줘
였다.
“효미 헌터에 대해서는 기억하세요?”
“피아니스트이자 힐러였죠. 활기찬 성격으로 항상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준 고마운 분입니다. 마지막 남긴 말은, 가족들이 피아노 연주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었습니다.”
피아노, 하고 권지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윤서는 이어서 말했다.
“이왕이면 그 연습곡은 쇼팽 에튀드 10-5번 흑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 3악장 ‘터키 행진곡’, 베토벤 ‘월광’, 림스키 코르사코프 ‘왕벌의 비행’,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2번 4악장이면 좋을 것 같군요.”
“…….”
“자, 다음.”
윤서는 슬슬 뻔뻔해졌다.
“쉰다 릴리 헌터도 기억합니까?”
“그분은 공략 후반에 사망했습니다. 베이킹이 취미였고 던전을 나가면 쿠키 10만 개를 만들 거라고 늘 말하고는 했으니 가족분들이 소원을 이뤄 준다면 좋겠네요. 꼭 10만 개여야 합니다.”
“10만 개….”
“이왕이면 초코크랙쿠키로요.”
윤서가 하는 말을 받아 적고 있던 박수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윤서 씨 취향 아닌가요?”
“릴리 헌터가 워낙 초코크랙쿠키 얘기를 해 대서 제가 세뇌당했나 봅니다.”
윤서는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린다 데이지 헌터는 기억하세요?”
“손재주가 좋은 헌터였습니다. 대던전에는 잡초라고 해야 하나 잎이 기다랗고 얇은 풀 같은 게 있는데 나뭇가지를 깎아 대바늘을 만들어서 그 풀 이파리로 뜨개질을 했습니다. 니트나 모자 같은 걸 많이 만들어 줬어요. 데이지 헌터의 마지막 유언은-.”
“뜨개질을 열심히 하라는 거였어?”
권지한이 끼어들었다. 윤서는 눈을 깜빡이며 권지한을 쳐다봤다. 권지한은 웃고 있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사나운 표정을 지은 것도 아니었다. 약간은 심드렁하고 시니컬한 얼굴이었고 윤서는 그 얼굴이 꾸며 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일부러 이쪽을 방심하게 하려는 듯한….
“예, 비슷합니다.”
“아아, 그럼 형이 뜨개질하는 것도 그 사람한테도 영향받은 거구나.”
“맞습니다.”
굳이 숨길 일이 아니라 순순히 대답하자 권지한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알겠어. 얘기 계속해.”
권지한이 박수빈에게 까딱 턱짓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 모습을 보고 건방지다고 생각했을 윤서이지만 지금은 분위기 있어 보이니 큰일이었다.
그 뒤로도 박수빈이 이름을 말하면 윤서는 바로 대답하는 문답이 계속되었다.
그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죽었다,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우린 그 사람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미간을 좁히고 기억을 더듬는다거나 고민하는 일 없이 바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강진 재단에서도 연락이 왔어요…. 평전을 쓰는 중인데 어떤 사람이었는지, 대던전에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는지를 궁금해하더군요.”
“이강진 헌터는 많은 도움이 된 정도가 아니었지요. 리벤저의 리더였으니까요.”
“S급이 다섯 명이나 있었는데도요?”
“각성 등급과 상관없이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자연스럽게 그로 결정됐습니다. 지금도 퍼펙트의 리더가 S급이 아니라 이인선 팀장이듯이 말이죠.”
“이해했어요.”
“죄송하게도 그의 마지막은 보지 못했으나 그가 없었다면 대던전 클리어는 불가능했다는 건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유언은 따로 듣진 못했지만 평소에 이곳을 나가면 안락한 보금자리부터 구하겠다는 말을 자주 했었어요.”
“예, 잘 전달할게요. 고마워요, 윤서 씨.”
박수빈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강진 재단은 이 정도로는 부족해할 것이다. 77일간의 활약상 전부를 듣고 싶어 할 터였다. 그러나 더 자세한 내용을 윤서에게 물어보는 건 도저히 못 할 짓 같았다.
왜냐하면 이미 너무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왜 끔찍한 죽음을 이토록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10년이나 지났음에도 마치 엊그제 일을 읊는 듯하다.
처음에는 리벤저의 역사를 물어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지금까지 대던전에서의 일은 알려진 바가 없고, 죽은 영웅들의 활약 또한 그늘에 있었으니까. 리벤저의 활약은 널리 알려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윤서가 너무 상세하게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 이런 질문을 하는 상황이 악랄하게 느껴졌다.
‘10년 전 치유 내성이 막 생겼을 때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이 상태 이상이 마치 선물 같았습니다.’
‘이제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치유받겠구나 싶어서.’
‘결국은 다 죽었지만요.’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이 다시금 떠올랐다. 어떤 감정도 남지 않은 허무….
박수빈은 그에게 과거의 트라우마를 되새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은 누군가요?”
그러나 그건 박수빈만의 생각이고, 윤서는 지금 조금 홀가분했다.
자신도 이 얘기를 하면서 홀가분한 마음이 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저만 알고 있던 1201명의 마지막.
그들이 그곳에서 얼마나 영웅이었는지…. 물론 지금도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지만 앞으로 1201년은 더 떠받들어야 하는 영웅이었다는 걸 이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혼자만 간직하고 있었던 기억들이 알게 모르게 마음의 짐으로 남았던 듯했다.
‘진즉 얘기할걸. 인터넷에 익명으로라도 털어놓을 걸 그랬어.’
이 자리를 끝낼 생각 없는 반짝반짝한 윤서의 갈색 눈을 보고 박수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이 늦어져 저녁 식사까지 마쳤다. 식사는 배달시켰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배달 기사가 다섯 명이나 와야 했다. 근처 식당들은 이 전원주택이 헬파이어 홍의윤의 집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 ‘항상 우리를 지켜 주는 헬파이어 헌터님 감사합니다^^’라는 손편지와 함께 서비스를 어마어마하게 줬다. 다섯 명은 돼지갈비찜 식당에서 부족했던 몫까지 양껏 먹었다. 음식값은 서채윤 님에게 쿠키와 니트를 선물받은 기념이라며 자기가 내겠다는 수재희와 서채윤에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자기가 내겠다는 홍의윤이 싸우다가 결국 수재희가 냈다.
“형들, 잘 가요.”
“너는 안 가?”
“전 내일 가려고요. 홍이 형 집 지하에 수련장 있거든요. 대련 좀 하다가 자고 가야겠어요.”
수재희가 홍의윤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씩 웃었다.
“대문 열어 놨으니 알아서 가.”
수재희와 홍의윤은 배웅을 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윤서와 권지한, 박수빈은 주차 공간으로 향했다. 셋 다 자기 차를 가지고 왔다. 박수빈의 집은 강남, 윤서의 집은 용산, 권지한의 집은 합정이라서 차에 오르기 전 작별 인사를 했다.
“윤서 씨, 월요일에는 출근하는 거죠?”
“아뇨, 전 이틀 더 쉬다가 수요일에 갑니다.”
“브리핑 때 말이군요. 그럼 그날 봐요. 조심히 들어가고요.”
“수빈 씨도요.”
박수빈이 방긋 웃으며 네, 했다. 그리고 역시 상냥한 얼굴로 권지한에게도 인사했다.
“지한 헌터는 언제 와요?”
“나는 월요일.”
“네, 푹 쉬고 월요일에 봐요.”
권지한은 고개만 끄덕였다. 윤서는 저 역시 권지한에게 상냥한 인사를 건네고 싶었으나 고개만 끄덕이는 싸가지 없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멈칫했다. 그러다 멈칫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서 먼저 고개만 까딱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최근엔 유순하게 굴긴 했지만 권지한은 기본적으로 재수 없다. 그런데 나는 왜… 나한테 싸가지 없게 대하는 게 무슨 문제라고 멈칫했지? 새삼스럽게 왜 이런 걱정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박수빈의 차가 가장 먼저 대문을 빠져나갔고 그다음은 윤서, 마지막이 권지한의 차였다.
곧 갈림길이 나와 박수빈의 검은 세단이 오른쪽으로 꺾었다.
차에 오르자마자 인벤토리에서 햅쌀이를 꺼내 쓰다듬던 윤서는 핸드폰 진동에 고개를 들었다.
권지한
권지한의 이름 석 자에 윤서는 냉큼 전화를 받았다.
“뭡니까.”
빛의 속도로 받은 데에 비해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 형, 아까 인사를 안 했잖아.
“네?”
– 작별 인사를 깜빡해서 전화했어. 잘 들어가.
“…권지한 헌터도요.”
전화를 끊은 윤서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인사는 하고 싶었나 보지?
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소리까지 내 가며 웃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다시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번에도 권지한이었다. 웃음소리를 억누른 채 수신을 터치했다.
“또 뭡니까.”
– 내일 뭐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