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07
107
초원의 부족 (1)
* * *
껌뻑껌뻑.
눈을 뜨자마자 하얀 천장이 보였다.
아직은 시야가 흐릿했기 때문에 몇 번을 더 껌뻑거렸다.
‘이렇게 의식을 잃고 이상한 곳에서 깨어나는 게 대체 몇 번째인지.’
주변 풍경이 명확하게 들어왔다.
잘 정리된 책장이며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구, 등에서 느껴지는 푹신한 침대.
이곳이 절대 병원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자가 해 준 건가?’
엘런은 마지막에 노리스에게 부탁했던 것이 떠올랐다.
‘시간은 또 얼마나 흐른 거야?’
시간 개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전에도 고작 하루 흘렀겠거니 생각했었는데 무려 2주나 흘렀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끼익.
엘런이 자신이 의식을 잃은 기간을 추측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오? 일어났군. 몸은 좀 어떻소?”
자연스럽게 위로 쓸어 올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희끗희끗한 흰머리, 하늘색의 눈동자. 그는 바로 엘런을 이곳으로 옮긴 장본인, 노리스였다.
“아, 덕분에 괜찮은 것 같소.”
“그렇다니 다행이오. 일단 이거라도 좀 마시겠소?”
노리스가 엘런에게 물잔을 건넸다.
“고맙소. 혹시 내가 얼마나 잠들었던 것이오?”
“아직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소. 혹시 몰라 개인적으로 의사를 불러서 진료를 받았더니, 그냥 잠이 든 것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따로 병원에 보내지 않고 내 집에 둔 것이오.”
엘런은 속으로 안심했다.
그저 신체 내부의 극심한 고통 때문에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던 것뿐이었다.
“인사가 늦었군. 난 노리스 돌체라고 하오. 바르다이의 마법사이지. 나와 발리체를 구해 주어서 고맙소.”
노리스가 엘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나는 러셀이오. 나 때문에 일어났던 전투인데 괜한 피해만 생긴 꼴이라 미안하게 생각하오.”
급하게 생각한 이름이 엘프의 숲에 있는 그 녀석이라니.
엘런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는 이름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괜히 자신의 본명을 아는 자라면 곤란해질 것이 분명했다.
“쾬튼이 흑마법사일 줄은 상상도 못 했소. 어쩐지 몰골부터가 기분 나쁘더라니. 그것 때문에 지금 왕실에서도 난리가 났소.”
“혹시 나에 대해 이야기했소?”
엘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왕실에 직접 찾아가지는 않았소. 그대의 상태를 확인하고 바로 갈 생각이었소.”
엘런은 아직 늦지 않은 것에 안심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데 나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해 줄 수 있겠소?”
노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오? 지금 왕실에서는 그대에게 포상을 내리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소. 바르다이에서 받는 포상금은 웬만한 왕국에서보다 훨씬 큰 액수일 것이오.”
하루가 채 지나가기도 전에 왕실에서는 노리스를 찾아왔다.
입궁하여 지난밤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고하라는 것이었다.
더불어 쾬튼과 싸웠다는 자를 찾으면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에게 큰 상과 포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마, 왕실의 뜻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오.”
“다른 뜻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엘런은 그동안 귀족들과 충돌하며 왕실의 생리에 대해서 뼈저리게 느꼈다.
“최근 바르다이 왕국은 쾬튼 제품으로 인해 천문학적인 수익을 벌어들였소. 그런데 그게 흑마법사의 소행이었다는 게 밝혀진다면 어떻겠소?”
절대적으로 왕국이 숨기고 싶은 일.
그야말로 바르다이 왕국의 약점.
“하지만 이미 수많은 시민이 그 광경을 목격했고 피해자까지 있소. 왕실도 무작정 덮어 버리지는 못할 것이오.”
노리스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겠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마법사, 그가 흑마법사였고 쾬튼의 물건을 탈취하려다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쾬튼 역시 죽었다.
이런 이야기 정도로 꾸며 내면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쾬튼 제품은 더 이상 공급이 되지 않게 되어 그 희귀성이 더 높아질 수도 있었다.
“듣고 보니 맞는 소리이군.”
평생을 마법 연구에만 바쳤던 노리스는 그들의 생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알겠소. 그대의 뜻은 잘 알겠군. 이번 일은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하겠소.”
“혹시 그대에게 무리가 간다면 그냥 어디론가 도망쳐서 행방이 묘연하다 정도로 보고해도 되오.”
노리스가 슬쩍 웃음을 띠었다.
“이래 봬도, 나는 6서클의 고위 마법사요. 그대의 프로드 왕국과는 달리 바르다이 왕국은 고위 마법사의 수가 매우 적소. 그만큼 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지.”
엘런의 입가에도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알고 있었소?”
“침묵의 마법사, 프로드의 영웅, 엘런 베리타티를 모를 수가 있나.”
이미 피어 산맥 동쪽에서 엘런의 유명세는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영창을 하지 않는 침묵의 마법사라며 추앙받는 정도였다.
“그저 주문을 극도로 단축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정말로 말 한마디 내뱉지 않는 것일 줄이야. 직접 볼 수 있어서 영광이오.”
노리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엘런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아니오. 나도 그대와 같은 마법사를 만나 영광으로 생각하오.”
“듣기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전장의 화신이라고 했는데, 이번 일로 보아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소. 그대에게 많은 것을 배웠소.”
실력 면에서는 어떨지 모르나 나이로 보나 마법사 경력으로 보나 노리스가 엘런보다 한참 선배였다.
그런 그가 엘런 같은 청년에게 배웠다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나는 왕명이 있어서 이제 입궁해 봐야겠소. 뒷일은 나에게 맡기고 가 보시오.”
“정말 감사하오. 그대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 * *
-몸은 괜찮은 것이냐?
프로뱅은 아무 데나 목숨을 거는 이 막무가내의 제자가 걱정되었다.
‘오히려 전보다 마나량이 더 늘어났습니다. 네트, 그놈의 마나가 어마어마하긴 한가 봅니다.’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지만,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거는 녀석은 처음 본다.
엘런은 속으로 가볍게 웃었다.
‘어찌 됐든,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자신의 실력을 모두 드러냈으니 소문은 여기저기로 퍼질 것이다. 엘런은 자신의 무영창이 그토록 유명해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침묵의 마법사라니. 별명이 꽤 마음에 들었다.
‘내가 대륙적으로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해 봤겠어?’
문득 마법보조사 시절이 떠오르자 가슴이 간지러웠다. 당시에는 그토록 바랐던 것들이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소식이 폐하의 귀에도 들어갈 텐데 근심이 크시겠군. 얼른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야 해.’
히이잉.
엘런은 달리고 있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서부 대륙과 동부 대륙의 관문인 올비아 산맥이었다.
피어 산맥이 북에서 남으로 뻗어 있다면 올비아 산맥은 남에서 북으로 뻗어 있었다.
험준하고 몬스터들의 소굴인 피어 산맥과 달리, 올비아 산맥은 상대적으로 낮고 몬스터도 하급 몬스터가 대부분이었다.
그 덕분에 동부 대륙과 서부 대륙을 잇는 관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보이는군.’
엘런은 두 갈래 길에 멈춰 섰다.
이정표 두 개가 방향을 안내하고 있었다.
서쪽을 가리키고 있는 이정표에는 올비아 산맥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엘런은 말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이봐, 자네 어디로 가는 건가?”
한 남자가 깜짝 놀라며 엘런을 불러 세웠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것은 아닐 테고. 그곳은 트라키아 초원으로 가는 길이네.”
“알고 있습니다.”
“일부러 그곳을 간다고?”
트라키아 초원. 일명 야만의 땅.
그곳은 피어 산맥과 올비아 산맥 사이에 자리 잡은 초원으로 대륙의 중심에 해당했다.
사람들이 굳이 올비아 산맥을 넘어 이동하는 이유는 바로 이 트라키아 초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트라키아 초원을 통해서 서부 대륙으로 가려면 지그재그로 가야 하기 때문에 효율적이지 못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곳을 꺼리는 이유는 더 있었다.
지천에 널린 몬스터는 물론이고 가장 문제는 그곳에 거주하는 원주민.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공격할 정도로 호전적이었다. 게다가 식인을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렇다고 트라키아 초원에 토벌대를 보내 그들을 몰아내기에 그곳은 대륙을 관통할 정도로 광활했다.
그렇다고 그곳에 유용한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몬스터만 많고 그 흔한 목재 자원조차 부족한 곳에 굳이 돈과 시간을 들일 국가는 없었다.
덕분에 트라키아 초원은 어떤 국가의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 버려진 땅이었던 것이다.
그런 곳에 제 발로 들어가겠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염려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만.”
엘런은 예정대로 북쪽으로 말을 몰았다.
“에휴, 아까운 목숨이 하나 또 사라지겠군. 쯧쯧.”
그 사내는 멀어져 가는 엘런을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 * *
-어때? 반응이 오는 것 같나?
‘잘 모르겠습니다.’
엘런이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네트의 마지막 조각을 찾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영혼을 흡수하고 나자 그에게는 마지막 영혼이 있는 곳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다.
서부 대륙으로는 아르곤을 파견할 수 없었기에 직접 발로 뛸 생각을 하고 있던 엘런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 신호는 희소식이었다.
문제는 그 신호가 중부 대륙, 트라키아 초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미지의 땅은 밝혀진 것이 거의 없었다. 엘런은 생존을 위한 식량만 챙긴 채 무작정 이 땅에 발을 들인 것이다.
-반응이 사라진 것이냐?
‘그건 아니고 여러 군데서 느껴집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 네트의 기운이 여러 방향에서 느껴졌다.
엘런은 또 쾬튼 때처럼 이곳저곳에 자신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저번처럼 여러 곳에 전이를 하고 있는 거겠지.
‘멈춰선 김에 여기서 조금 쉬다가 가야겠습니다.’
엘런은 그 상태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의 눈에는 광활한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보기에는 그저 평화로워 보이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트라키아 초원은 양옆으로 커다란 산맥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군데군데 언덕이 올라와 전체적으로는 울퉁불퉁한 지형이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라서 그런지, 하늘은 유독 파랗게 보였고 초원의 녹빛은 싱그럽게까지 느껴졌다.
드문드문 모여 있는 나무들이 그 광경의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주변에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나 동물들의 소리. 초원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좋다. 이곳.”
제피로스도 신이 났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스으으.
그때, 갑자기 엘런의 감각에 강한 네트의 기운이 잡혔다.
‘가까운 곳이다.’
엘런은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기운은 끊이지 않고 계속 흘러왔다.
‘저기는?’
원래 미약하게나마 네트의 기운이 느껴지던 곳이었다. 엘런은 조심스럽게 그 방향으로 향했다.
“으으으.”
약 10분을 걸었을 때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엘런은 감각을 바짝 끌어올렸다. 이곳에서는 어떤 일도 확인된 것이 없었다.
대상은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나무 앞에 도착한 그는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는 준비를 했다.
휙.
그리고 엘런은 나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팔 한쪽을 부여잡고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