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12
112
늑대들 (3)
* * *
“괜찮아?”
바로 뒤에 올 때까지 인기척도 못 느낄 정도로 은밀하게 다가와 말하는 것.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로 쓰러진 낭족의 대전사.
두크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아는 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이었다.
“은인!”
“내가 고대 마법을 배운답시고 너희 족장을 데리고 나가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겼다. 미안해.”
그의 뒤에는 엘런과 바쿤다가 서 있었다.
두크르의 눈에는 천군만마보다 더 듬직해 보이는 존재들이었다.
“저 늑대 새끼가.”
굴트가 저지른 광경을 본 바쿤다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네놈에게는 관심도 없다, 바쿤다.”
동행한 대전사 3명이 모두 죽었음에도 굴트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쪽이 나의 저주를 풀어 버린 자로군.”
그의 시선이 엘런을 향했다.
-저 녀석은 그분의 힘에 잠식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힘을 완벽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시르의 경우에는 네트의 영혼에 잠식당했었다.
쾬튼도 완전히 잠식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외관만 보아도 그의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기 서 있는 늑대 수인족은 전혀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네트의 영혼을 수족처럼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허접스러운 저주는 푼다고 하기도 애매한데?”
“어쭙잖은 도발을 하는군. 그런 것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굴트는 수인족답지 않지 않게 이성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 궁금하군.”
“끼아아아.”
굴트의 주위를 날아다니던 검은 그림자가 쇠 긁는 소리를 내며 엘런에게 달려들었다.
엘런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손만 들어 올렸다.
‘마나 드레인.’
슈우웅.
그리고 그림자는 그대로 엘런의 손에 빨려 들어갔다.
듣는 이를 소름 끼치게 하던 그것의 소리도 점차 멀어졌다.
“이상한 술수를 사용하는구나.”
그가 스태프를 높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스태프에 박혀 있던 검은색 수정이 빛을 내뿜었다.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칠흑이었다.
그리고 마을 전체를 배회하던 검은 그림자들이 모두 굴트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 숫자가 너무 많아서 온 세상이 새까맣게 바뀐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어디, 이런 것도 막을 수 있을까?”
굴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웃음이었다.
‘설마?’
그 모습을 본 엘런은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굴트의 뒤에 모여 있는 수많은 그림자 때문이 아니었다.
‘도트의 스태프?’
굴트가 들고 있는 스태프 때문이었다.
엘런은 그 형상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아무리 다시 봐도 그것은 그가 알고 있는 도트의 스태프가 맞았다.
고대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인류가 다시 마법 체계를 잡을 때, 그들은 이전 시대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수식이라는 것을 이용해 마법을 발현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수식의 계산이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실수한다면, 완전히 다른 위치에 마법이 발현되거나 아예 다른 마법이 발현될 수도 있었다.
도트의 스태프는 사용자의 수식 계산을 보정해 주는 아티팩트였다.
물론 시중에 수식 계산을 보정해 주는 아티팩트가 있긴 했다.
그것을 구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힘든 것도 아니었다.
엘런 정도의 부가 있다면, 몇 개고 사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저건 그 보정 효과 자체가 다르지.’
도트의 스태프는 보정의 수준이 아니라 계산을 안 해도 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걸 왜 트라키아 초원의 원주민이 들고 있는 거야?’
엘런도 책에 그려진 그림으로만 보았던 전설급 아티팩트였다.
그런 마법적 가치가 높은 물건을 어째서 주술사가 들고 있단 말인가.
‘뭐, 상관없으려나?’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 스태프가 자신의 손으로 들어올 좋은 기회였다. 단순히 자신이 착각한 것이라면 그때 가서 실망하면 될 일이었다.
“두렵기도 하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곧 그 두려움 속에서 죽어 가고 있는 너를 보게 될 것이니까.”
굴트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엘런에게 말했다.
“끼아아.”
“끼이이이!”
숫자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그림자가 엘런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쿤다는 분노로 가득 찬 상황에서도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짐승의 생존본능이 저것이 생명에 지대한 위험을 가한다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엘런만큼은 이전과 똑같이 멍한 표정이었다.
스윽.
엘런은 그림자를 향해 양손을 들어 올렸다.
“끼이이?”
그는 그저 양손을 들어 올렸을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고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세 좋게 날아가던 그림자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위험을 감지했다.
이대로 저자에게 달려들었다가는 영원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슈우웅.
그리고 그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늦어도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그림자들은 엘런의 손바닥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그 많은 그림자가 모두 흡수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양이라서 그런가? 약간은 더부룩하긴 하군.”
물론 그것은 그저 느낌일 뿐이었다. 사실 엘런의 마나 하트는 충만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 어떻게?”
굴트는 그런 엘런을 보고 넋이 나가 버렸다.
“무, 무슨 수를 쓴 것이냐?”
그는 말조차 제대로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모두 먹어치운 괴물을 향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팟.
굴트가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뜨는 사이 괴물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디로 간 것이지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굴트의 바로 옆에서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으악!”
굴트는 깜짝 놀라서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떻게 했긴.”
엘런이 그의 어깨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댔다.
굴트는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건 네가 알 필요 없어.”
씨익.
엘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굴트의 눈에는 그 미소가 사신의 조소로 보였다.
‘쇼크 웨이브.’
콰앙.
굴트의 오른쪽 어깨에서 시작된 충격파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 충격파는 그의 장기 하나하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주륵.
내상을 입은 그의 입에서는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어깨는 여전히 엘런에게 붙잡혀 있었다. 그 때문에 마음대로 쓰러질 수도 없었다.
“사, 살려만 주세요.”
전사의 긍지 따위는 없었다.
굴트는 그저 엘런이 무서웠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호족의 마을로 쳐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라르가 보았던 것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라르의 심정을 진심으로 이해했다.
처형식에서 보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표정.
자신과 낭족의 대전사들을 하찮게 쳐다보던 그의 눈빛.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안 죽일 거야. 그러니까 긴장 풀어.”
“저, 저, 정말입니까?”
그렇게만 해 준다면 굴트는 두 무릎을 꿇고 그의 가랑이 사이라도 통과할 수도 있었다.
“묻는 말에만 잘 대답하면 말이야. 아, 그리고 충분한 목숨 값까지 있어야겠지?”
“시키는 대로 전부 하겠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누구보다 왜소하고 털이 숭숭 빠져 있어 볼품없어 보이던 그였다. 그런 그가 애원하니 어쩐지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 선공을 날렸으니 쉽게 보내 줄 수는 없지.’
* * *
올비아 산맥과 트라키아 초원의 갈림길에는 서부에서 동부로 가는 사람, 동부에서 서부로 가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올비아 산맥과 바르다이 왕국으로 이어진 길만 사용했다.
트라키아 초원 쪽으로 향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이정표 앞에 두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올비아 산맥 쪽으로 지나갔다는 말은 없었다고?”
“예, 바르다이에서 출발한 것은 확실하니,
아무래도 트라키아 초원으로 가신 것 같습니다.”
“저 광활한 곳에서 엘런 님을 찾을 수도 없고 이거 난감하군.”
뒤통수를 벅벅 긁고 있는 남자는 바로 아르곤의 수장 가빈이었다.
“아르곤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을 쫓아다녔지만, 엘런 님만큼 추적하기 힘든 분은 없단 말이야.”
반년 전에는 벨라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리더니 2개월 후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곳에 정보원을 상주시키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엘프의 숲에 들어갔다 왔을 거라는 것이 가빈의 추측이었다.
그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이제는 트라키아 초원까지 들어갔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행보에 가빈은 두 손을 들었다.
“그럼 이 정보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매우 급한 사항이지 않습니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빈에게 말을 걸고 있는 소년은 엘런이 벨라에서 만났던 그 소년이었다.
“그러게 말이다. 이건 좀 급한데.”
최근 들어 고센 제국과의 국경 쪽 움직임이 수상했다.
아직 아르곤의 규모가 크지 않아서 외국의 정보까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엘런의 요청에 따라 정보원들을 남부 대륙으로 파견하는 바람에 인원도 부족했다.
아르곤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인식하게 된 것은 고센의 군사들이 프로드의 국경 쪽으로 모이고 있을 때쯤이었다.
이전에 고센 제국과의 전쟁에서 엘런의 제5군이 점령했던 제국의 도시 로슈.
그뿐만 아니라 프로드가 점령했던 제국의 모든 도시 근처에 그들의 병사가 조금씩 모여들고 있었다.
‘이건 전쟁 준비다.’
아직은 눈에 띄게 병사를 운용하는 것이 아니라서 왕국에서는 모르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빈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이 적기이긴 하다.’
침묵의 마법사 엘런 베리타티.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동부 대륙에서 그의 명성은 자자했다.
특히, 고센 제국은 그에게 베르무트라는 걸출한 전략가를 잃었다.
또한, 전장의 선봉에 서서 아군을 도륙하던 그의 모습은 제국의 머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가 자취를 감춘 지 반년이 넘었다. 그걸 제국이 알아냈다면 전쟁을 준비할 최고의 시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안 거지?’
엘런의 신변은 프로드 왕실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그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왕실 특무대에서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가빈도 엘런이 직접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가 자취를 감추었는지 전혀 모를 정도로 치밀했다. 그런데 그것을 고센 제국에서 알아냈다.
‘깊은 곳까지 들어온 첩자가 있거나, 배신자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인가?’
일단은 그들이 어떻게 알아 냈는지보다도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가빈은 그렇게 정리한 보고서를 엘런에게 전해 주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하지만 놓쳐 버렸으니 이제는 엘런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는데. 제발 늦지 않으시기를.’
가빈은 이정표 근처에 작은 흔적을 남겨 놓았다.
엘런이 늦지 않게 돌아온다면 이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자.”
“예.”
그들은 행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