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19
119
평화 그리고 변화 (2)
* * *
레바가 떠나고 일주일쯤 흘렀을 때였다.
마탑에서 보낸 초대장이 엘런의 저택에 도착했다.
이번에 받은 초대장은 자신이 막 수도에 왔을 때 받은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일전에 그들은 엘런의 저택에 걸려 있던 경계 마법을 전부 해제시켰다.
그렇게 저택을 헤집은 후에 통지서 형식의 초대장을 던져 놓고 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중한 초대장이 도착했다.
그것도 종이만 덜렁 온 것도 아니었다.
마탑에서 보낸 마법사가 직접 초대장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들이 보낸 선물이 잔뜩 실려 있는 마차가 있었다.
엘런은 지금 그들이 보낸 초대장을 들고서 마탑 앞에 서 있었다.
“엘런 베리타티 님.”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마법사가 딱딱하게 굳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은?’
엘런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사서들이 입고 다니는 황갈색의 로브와 모자. 그리고 툭 튀어나온 광대와 움푹 들어간 눈.
그는 자신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자신을 안내했던 데브였다.
“베리타티 님을 안내하게 된 데브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불과 몇 년도 흐르지 않았지만, 그의 태도는 완전히 변해있었다.
자신을 못마땅하게 보았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탑주라도 보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아, 기억나는군.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반갑네.”
“저 같은 놈을 기억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데브는 엘런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자 불안했다.
혹시나 자신이 행했던 그 무례한 태도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면, 앞으로 자신의 앞길은 깜깜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럼 잘 부탁하네.”
엘런은 데브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데브가 얼떨떨해하며 그의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다행히, 앙금은 남아 있지 않은 건가?’
엘런과 같은 천재가 그것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의 일 때문에 자신을 괴롭게 할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직 내게도 기회가 있다는 말이군. 앞으로는 더 잘 보여야겠어.’
데브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엘런을 안내했다.
엘런도 굳이 그런 자잘한 것까지 앙갚음할 마음은 없었기에 옅은 미소를 띤 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막 마탑으로 들어가 최상층으로 향하는 승강기 앞에 다다랐을 때, 데브의 안도는 곧바로 깨져 버리고 말았다.
“이게 누구신가? 프로드의 영웅, 대마법사 또 뭐가 있었나? 자네의 별명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하기도 어렵군.”
비아냥이란 비아냥은 잔뜩 끌어다 모은 것 같은 말투. 그 주인공은 바로 릭 체들턴이었다.
“릭 체들턴 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기 임무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오늘 복귀하신 겁니까?”
데브는 엘런의 기분이 상하기 전에 릭의 이목을 자신에게 끌려 했다.
“아, 그렇지. 지금 막 임무를 마치고 오는 길이라네. 강대한 힘을 가진 자라면 그에 따르는 막중한 의무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릭은 결코 데브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점수를 따도 모자랄 판국에 왜 이렇게 시비를 거는 거야?’
그는 노골적으로 엘런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엘런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마음먹었던 데브는 그의 태도가 불만이었다.
“그나저나 자네와는 결국에 이렇게 마탑에서 보게 되는군.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건가? 비마탑 출신이라고 말하고 다니더니 결국 마음을 바꾸었나 보군.”
승강기는 프로드 고위 마법사의 절반이 한 번에 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엘런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이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건가?’
엘런의 합류와 함께 현재 마탑의 가장 큰 논쟁거리인 마법보조사의 합류.
하지만 릭은 그것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체들턴 님의 말씀대로 결국 이렇게 됐습니다.”
엘런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조만간 알게 될 텐데. 그때가 더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후웅.
승강기가 최상층의 바로 밑에 멈추었다.
그곳은 고위 마법사들의 연구실이 있는 곳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사전에 탑주를 만나 신고 절차를 밟은 엘런은 곧장 자신의 연구실로 갔다.
후웅.
릭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승강기가 다시 움직였다.
“건방진 놈. 결국 이렇게 마탑에 굴복하게 된 놈이 끝까지 턱을 치켜들고 있군. 이참에 마탑의 선배로서 규율을 잡아 주겠다.”
릭은 그를 향해 한바탕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탑주에게 복귀 신고를 하러 간 그는 엘런의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얼굴이 시뻘게졌다.
한편, 연구실로 간 엘런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레바를 만났다.
“허허허, 그 녀석의 시뻘게진 얼굴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 같구나.”
릭의 이야기를 들은 레바는 체면도 잊은 채, 깔깔거리며 웃었다.
“언젠가 버릇을 고쳐 줘야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자네가 한 방 먹여 주었군.”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의도가 있었든 아니든, 자네 덕분에 한참 웃을 수 있었네.”
조금은 진정한 레바가 연구실에 대한 소개를 시작했다.
연구실의 모습은 고위 마법사의 것답게 희귀한 서적부터 실험 재료들까지 잘 갖추어져 있었다.
물론 엘런의 개인 연구실과 비교해서는 떨어지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마법사가 보았다면 눈이 돌아갔을 정도였다.
“그리고 마법보조사의 합류에 관한 회의는 며칠 후, 고위 마법사 회의의 안건으로 올리기로 했네. 거기에 참석해서 의견을 펼쳐 주면 되네.”
“이렇게 힘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런의 인사에 레바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날, 자네의 활약을 기대하겠네. 난 이만 가 보지. 아, 그리고 자네의 담당 사서 말인데. 경쟁이 매우 치열했네.”
사서란 원래 마탑에 있는 수많은 책을 관리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역할이 점점 넓어져 지금은 마탑의 궂은일을 담당하는 직책이 되었다.
마법사 정기 검정에서 떨어진 자들 중 마탑에 남는 이들이 사서의 로브를 입게 된다.
권위주의의 집합체인 마탑에서 그런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뻔했다.
그들도 외부에서는 마법사로서의 대우를 받지만, 마탑 내에서는 보조사와 마법사 사이 정도의 취급을 받는 것이다.
엘런은 처음 사서의 존재를 알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었다.
같은 마법사끼리도 계급을 두어 배척하고 있는 것이 우습기까지 했다.
물론 고위 마법사의 비서 역할도 사서들이 했다.
하지만 천재는 괴짜라고 하였던가. 고위 마법사의 성질머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만큼 사서들이 가장 피하는 것이 바로 비서였고 그 일은 자연스럽게 신입 사서들에게로 내려갔다.
물론 예외의 경우가 있었다.
바로 유명세를 치른 이들에게는 사서가 되고 싶은 자들이 줄을 서곤 했다.
그중에서도 엘런은 특히 사람이 몰렸다.
그토록 이른 시일 안에 대마법사에 오른 비법을 알고 싶은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가 흔한 건 아니네만, 마탑에서는 이럴 경우 고위 마법사가 직접 선발하도록 하네.”
그는 한 뭉텅이의 종이를 엘런의 책상에 올려 놓았다.
거기에는 글자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그게 다 지원자들이네. 거기서 자네가 원하는 자를 선발하게나.”
그는 다시 한 번 지원자의 수에 놀랐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결정되는 대로 나에게 말해 주게. 이제 진짜 가 보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자네도 편히 쉬게.”
덜컹.
레바가 문을 닫고 나간 후, 엘런은 자신의 의자에 몸을 앉혔다.
그의 앞에는 레바가 주고 간 종이가 한 뭉텅이 놓여 있었다.
-양이 어마어마하군. 내가 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 수에 놀란 것은 레바뿐만이 아니었다.
‘이걸 언제 다 봅니까?’
-대마법사들끼리는 그 수 가지고 내기도 하고 했으니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지 말거라.
프로뱅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휴, 저는 마탑 놈들이 만들어 놓은 사서 계급이나 이용하자고 이곳에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알고 있지. 그런데 어떡해? 내 제자의 사서가 되고 싶은 자들이 저토록 많은 것을. 그리고 읽다 보면 은근히 재미있기도 할 것이다.
프로뱅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엘런은 종이를 들어 올렸다.
그냥 눈에 보이는 사람 한 명 데려다 쓰고 끝내 버리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 종이에는 지원자의 인적사항, 서클, 심지어 자신을 소개하는 글까지도 기재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정성을 들인 그들의 지원서를 보니 대충 뽑는 것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그때부터 엘런은 조금은 진정성 있게 그들의 글을 읽어 보았다.
‘다양하게 힘들게들 살았군.’
그것이 지금까지 읽은 지원서에서 느낀 점이었다.
엘런은 지금까지 마법보조사의 억울함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사서인 이자들도 그리 쉽지만은 않은 삶을 살아왔다.
대부분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나이에 걸쳐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정기 검정 시험에서 떨어진 자들이었다.
더는 마탑에서 마법사라고 인정하지 않는 마법사.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마탑에 남아 자신의 발전을 이루려고 하는 자들이었다.
‘생각이 많아지는군.’
마탑을 변화시키기 위해 직접 들어온 곳이었지만, 이렇게 특권을 받고 누군가를 선발하고 있으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탑의 맨위는커녕, 그 맨밑도 바라보지 못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마탑과 마법사에 대한 열등감을 떨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30여 년간 쌓였던 울분은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수십 번이고 떨어진 마탑의 시험은 뼛속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마탑의 꼭대기에 생긴 자신의 방, 창밖으로 보이는 해리포드의 정경, 깨알만 한 크기의 마법사들, 자신을 뽑아 달라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현실감이 없게 다가왔다.
‘이래서 특권을 부르짖는 거겠지.’
저 밑에 있는 마법사들은 재능이 있고 능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남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회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자신은 회귀라는 특별한 방법이자 기적으로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평생을 저 깨알 같은 사람들을 우러러보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런 기적적인 기회조차 없다.
그들은 이 구조에 가로막혀 평생을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마탑이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공유하며 그 위에서 새로운 발전이 이룰 때, 그들은 분명 한계의 벽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보안이라는 이름 하에 독점되고 있는 지식과 정보.
그럴수록 마법사와 보조사 사이의 간극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엘런이 깨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응?’
그런 생각을 하며 지원서를 넘기고 있을 때, 엘런의 눈에 띄는 내용이 보였다.
‘40대?’
클로이 비체린이라는 이름의 사서였다.
그는 유일하게 엘런의 사서를 지원한 자 중에 40대의 나이였다.
20여 년간 같은 수준에 머물렀다면 인제 그만 발전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할 만도 했다.
마탑에서 무시받는다고 해도 밖에서는 얼마든지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봉급도 넉넉하게 나왔다.
‘그런 것 따위는 필요 없다는 건가?’
엘런은 그의 모습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름을 날리는 용병이 되어 많은 돈을 벌었음에도 30여 년 동안 마탑 시험에 응시한 자.
바로 과거의 자신이었다.
‘결코 그때의 나보다 낫다고 할 수 없는 자.’
엘런은 그의 종이 뭉치에서 그의 지원서를 뽑아 들었다.
‘당신에게도 나의 변화를 조금이나마 나누어 줄 수 있었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