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20
120
평화 그리고 변화 (3)
* * *
마탑의 대도서관.
마탑에 있는 네 개의 층을 모두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방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마법사들의 연구를 위한 수많은 도서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프로드 마법사들이 직접 쓴 책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개중에는 보안을 우려해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마탑의 일원이라면 누구든지 이 책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프로드 마법 지식의 보고였으며, 프로드의 마법사들이 서로의 지식을 계승하고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 신성한 지식의 보고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야, 그거 모르겠어? 안토니가 지은 발화점 책 있잖아. 답답해 죽겠네.”
“그게 그렇게만 말씀하시면 저희도 잘…….”
이곳에 있는 책만 해도 수십만 권이 넘었다. 이런 곳에서 저자의 이름, 그것도 무명 저자의 이름만으로 책을 찾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쾅.
마법사가 책상을 내리쳤다.
“마탑 대도서관의 사서라는 놈들이 그걸 몰라? 멍청한 놈들. 이러니까 너희들이 전부 사서에 머물고 있는 거겠지.”
“죄송합니다.”
모욕적인 말에도 사서는 연신 죄송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죄송하다고 다가 아니란 거 잘 알지 않나? 내 연구를 망치고 싶은 거야? 대도서관을 싹 뒤져서라도 찾아오란 말이다.”
그의 막무가내인 행동에 사서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 갔다.
벌써 며칠째 같은 일을 겪고 있던 그의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왔다.
마법사고 뭐고 상관없이 소리를 지르려는 그때, 그의 뒤에서 구원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크 님, 찾으시는 책이 이게 맞습니까?”
그의 손에는 『발화점 설정의 차이』이라고 적힌 책이 들려있었다.
그 책을 본 마법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바로 이거였어. 이게 딱 기억이 안 나더군.”
다행히 마법사가 찾던 책이 맞았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도 경력이 있다고 신입이랑 다르긴 하나 보군.”
사막에서 바늘을 찾아온 그에게까지 정중한 태도 따위는 없었다.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거로 아는데, 이 책이 진행하고 계시는 연구에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에 비견되게 그의 태도는 매우 정중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일침이 숨겨져 있기도 했다.
“크흠, 알고 있다고. 이만 가 봐야겠군.”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급하게 대도서관을 나갔다.
그가 가 버리고 나자 대도서관은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젠장, 우리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어야 합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매일 저런 놈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대도서관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울분을 토했다.
담당 사서 기간을 채우고 나자마자 온 이곳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알다시피 정기 검정 시험이 얼마 남지 않지 않았는가? 저자도 이제 한 번밖에 남지 않았으니 급하기도 할 걸세.”
“칫, 너도 여기로 한번 떨어지기만 해 봐.”
사서의 울분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그런 생각하지 말게나. 우리도 모두 저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자들이 아닌가?”
반면에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초월한 사람처럼 보였다. 정확하게는 많은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클로이 님!”
그때, 다른 사서들이 그를 부르며 달려왔다.
“담당 사서가 된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 말에 클로이는 웃음을 지었다
“어디에서들 그렇게 듣고 오는 건가?”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입니까?”
사서들은 그를 재촉했다.
“그렇다네. 경쟁률이 치열하다고 들었는데 운이 좋게도 그분이 좋게 봐주셨나 보더군.”
“어째서 다시 담당 사서가 되시는 겁니까? 게다가 하필 엘런 그자입니까? 아무리 그가 대마법사라고 해도 클로이 님 역시 남작의 신분인데, 엘런, 그자의 밑이라니요.”
다른 사서가 소리를 지르다시피 말했다.
사서들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그가 다시 담당 사서로 들어가는 것은 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나도 언제까지고 이곳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걸세.”
그의 표정은 여전히 초월자의 그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서들은 그 표정 아래에서 타오르는 열망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그분께 갈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군.”
클로이가 몸을 돌렸다.
대도서관의 수많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귀족으로서, 비체린 가문의 가주로서 모든 자존심을 버리며 악착같이 붙어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어떤 발전도 이룰 수 없었다. 언제까지고 도전할 테지만, 이왕이면 빠른 길을 택하고 싶었다.
‘대마법사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 어떤 모욕적인 대우를 받더라도 참아야겠지.’
담당 사서의 지원서를 내며 수없이 되뇌던 말이었다.
“그럼 대도서관을 잘 부탁하네. 다들 이 황갈색 로브를 벗고 만나세.”
* * *
사락.
제작 연도를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래되어 보이는 책장이 넘어갔다.
책장에 적힌 글자는 대륙 공용어가 아니었기에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설령 그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군데군데 지워진 부분이 많아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지금 그 책을 읽고 있는 엘런도 바로 그 마음이었다.
‘몇 번을 읽어도 내용의 절반 정도까지가 한계치인가 보네.’
텁.
엘런은 『정령 교감에 대한 다각적 접근』이라고 적힌 책을 덮었다.
그러고는 팔을 머리 위로 쭉 펴며 굳어 있던 몸을 풀었다.
‘이거 정말 탑주의 자리까지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탑주가 관리하는 특별 재료실이라면 재료가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름조차 모르는 재료를 어떻게 찾을 거냐?
그의 말에 엘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네트 놈이 연구한 지식 덕분에 이 정도까지는 했지만, 더는 무리예요.’
-너라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라.
똑똑똑.
엘런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됐을 때쯤, 누군가 그의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엘런 베리타티 님, 사서 클로이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가 사서를 선발한 지 며칠이 흘렀다.
애초에 사서가 없어도 그는 혼자서 일을 처리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덕분에 사서에 관한 일을 머릿속 저편에 묻어 두었다.
그리고 그 노크 소리 덕분에 기억이 떠올랐다.
“들어오세요.”
엘런의 허락에도 문은 아주 조심스럽게 열렸다.
딱 한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 문틈으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데브와 같이 황갈색의 로브를 착용하고 있었다.
눈가는 밑으로 축 처져 있었고 곱실거리는 머리는 어깨까지 늘어뜨려져 있었다.
“휴식 중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대가 나의 담당 사서인가요?”
그를 본 엘런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건?’
하지만 엘런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비체린 가문의 클로이라고 합니다. 대마법사 베리타티 님의 사서가 될 수 있어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그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극존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면 됩니다. 항상 제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이 봤다면 태도가 잘되어 있다며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비체린 가문의 가주였다. 즉 그도 엘런과 같은 남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담당 사서와 고위 마법사라고 해도 엘런은 그것이 불편하기만 했다.
“그렇게 부담스럽게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아마 제가 따로 부탁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저 저와 대화 상대나 돼 주면 됩니다.”
그 말에 차분하던 클로이가 몸을 움찔거렸다.
대마법사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그의 지혜를 전수받을 기회였다.
담당 사서는 안 해도 될 경력을 가지고 있는 그가 기어코 엘런의 사서에 지원한 계기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높은 자리에 오르면 하나같이 성격이 이상한 녀석들이 많았는데.’
엘런도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엘런의 뒤치다꺼리를 해 주고 간간이 흘려 주는 지혜라도 얻어먹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괜찮은 성품의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단 여기에 앉으시겠습니까? 그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
그러자 클로이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탓에 얼이 빠진 소리를 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대의 일정을 물어보지 않았군요.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가도 괜찮습니다. 대화할 시간이야 이후로도 얼마든지 있겠지요.”
“아, 아닙니다. 저는 베리타티 님의 담당 사서이기 때문에 따로 할 일은 없습니다.”
그 정갈했던 클로이도 다급했는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럼 저와 차라도 한잔하시지요.”
“감사합니다.”
클로이는 엘런이 내준 찻잔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마법사에게 정중한 대우를 받으니 정신이 없기도 했다.
“제가 알기로 그대같이 경력이 높은 사서들은 담당 사서를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그의 말에 클로이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미 그런 질문에 대한 답변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 마탑에 있는 누구라도 베리타티 님께 배우고 싶어 할 겁니다. 베리타티 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자리에 있다면 지혜를 나누어 받을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엘런을 띄워 주면서도 자신의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사서로서 다른 마법사들의 비위를 맞춰 온 경력이 빛을 발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감사합니다.”
엘런은 그 모습에서도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해졌다.
“사실, 저는 그대를 비롯해 저의 가르침을 원하는 자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떤 획기적인 계기를 전해 줄 수는 없습니다.”
엘런이 성장한 방법은 비정상적인 계기가 대부분이었다.
평범한 마법사들이 한 번을 겪을까 말까 한 일들.
그런 방법들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그나마 네트에게서 얻은 지식들이 그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닙니다. 저의 본분은 베리타티 님을 보좌하는 것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제가 베리타티 님의 옆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로이는 일말의 아쉬움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그 획기적인 계기라는 걸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클로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그대를 가로막고 있는 그 벽을 깰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대체 무슨 방법이기에 20여 년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깰 수 있다는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제가 기회를 봐서 그대를 찾도록 하겠습니다.”
“가, 가, 감사합니다.”
클로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엘런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었지만, 그는 이상하리만큼 엘런에게 신뢰가 갔다.
그에게서 동시에 뿜어져 나오는 냉철함과 산뜻함. 어쩐지 동질감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일단 오늘은 마탑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클로이는 나이도 잊은 채,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