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21
121
평화 그리고 변화 (4)
* * *
‘생각보다 크지는 않네.’
엘런은 해리포드 중심가에서 꽤 떨어진 언덕에 서 있었다. 거기에서는 해리포드 중심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런 그의 앞에는 거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정도의 저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주변에는 나무와 초목밖에 없었다.
‘이 가문과 잘 어울리는 위치이군.’
그는 들고 있던 종이를 다시 말아 품 안에 넣었다.
그 종이는 프로드 왕국에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종이와는 약간 달라 보였다.
“오셨습니까?”
엘런이 저택 앞에 서자, 대문이 열리고 두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인사를 했다.
“이렇게까지 나와 있을 필요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엘런 님께서 가르침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 정도의 준비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이 둘을 보았다면 서로가 서로를 불편해하는 이 상황을 우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아이는 제 아들 녀석인 시스토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프로드의 영웅이자 대마법사 엘런 베리타티 님을 이렇게 직접 뵐 수 있어서 가문의 영광입니다!”
클로이의 옆에 있던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눈빛은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알겠네. 알겠으니 이만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나?”
시스토의 태도는 클로이보다 훨씬 더 부담스러웠다.
“제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엘런이 곤란해하는 것을 눈치채자, 클로이는 얼른 그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곤혹을 느끼고 들어간 저택은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었다.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큼 부유한 상인들보다도 작았다.
‘마법사 집안에서 마탑의 마법사를 배출한 게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니까.’
클로이가 가주로 있는 비체린 가문.
이곳은 프로드의 마법사 가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의 핏줄은 도저히 마법사의 혈통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가문이 할 수 있는 온갖 노력은 다해도 마탑의 시험을 통과한 자는 나오지 않았다.
현재는 클로이 만이 유일하게 마탑 소속의 마법사였다.
마법을 못 쓰는 마법사 가문인 만큼, 그들은 부나 명예를 쌓을 수 없었다.
결국, 이처럼 부유한 상인의 것보다 못한 저택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집안의 장식이며 서재까지 깔끔한 게 그의 성격을 빼다 박았네.’
엘런이 클로이의 서재를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입니까? 제가 아는 한, 뭐든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승낙에도 불구하고 클로이는 잠시 뜸을 들였다.
“보시다시피 집이 많이 누추합니다. 그런데 어찌 이토록 먼 곳에서 가르침을 주신다고 하셨습니까?”
그의 말대로 그의 집은 마탑이 있는 해리포드 시가지에서 멀기도 멀었다. 또 마법을 배우는 것이라면 마탑보다 좋은 곳은 흔하지 않았다.
“그것은 제가 그대에게 말해 줄 방법이 마탑에서 인정하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클로이의 머리 위로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마탑에서 인정하지 않는 방법이라 함은 혹, 흑마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는 강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흑마법에는 손을 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절레절레.
엘런이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서야 클로이의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전에, 제가 잠시 그대의 상태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클로이는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산뜻한 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이내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바람이 지나간 곳은 이상하게도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탁했던 마나가 맑아진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대체…….”
처음 겪는 기분에 클로이가 당황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온 대답에 더욱 놀랐다.
“그대의 집안은 마법사 가문이 아닙니다.”
엘런의 말에 클로이의 미간에 아주 미세하게 주름이 잡혔다.
“아무리 비체린 가문에서 뛰어난 마법사가 없다고 해도 우리는 꾸준히 마법을 연구해 온 가문입니다. 그 전통은 프로드 왕국의 역사보다도 오래되었지요. 그런데 마법사 가문이 아니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클로이는 선조들의 노력까지도 무시해 버리는 발언에 화가 난 것이었다.
“그렇게 들릴 수도 있었군요. 하지만 제 말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런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대의 가문은 마법사가 아니라 정령사의 가문입니다.”
클로이의 눈, 코, 입 모두가 커다랗게 벌어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정령사라니.
현재는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보기 힘든 이들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정령사 가문이라니, 클로이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이걸 보시겠습니까?”
엘런은 클로이의 집 앞에서 품에 넣었던 종이를 꺼냈다. 종이를 받은 클로이는 그것을 펼쳐 보았다.
그곳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휘갈겨 쓰여 있었다.
“이것은 고대어가 아닙니까?”
“비슷합니다만, 정확하게는 엘프들이 사용하는 글자입니다.”
엘런의 입에서 정령사에 이어 엘프까지 나왔다.
클로이는 계속되는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제가 그대를 처음 봤을 때, 그대에게서 정령의 기운을 느끼고 따로 조사를 벌였습니다. 알다시피 정령사는 대륙에서 결코 흔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엘런은 아르곤을 동원해 클로이에 대해 조사를 했다.
그러다 발견한 특이점이 바로 그의 가문인 비체린가였다.
엘런은 확인을 위해 페리스에게 비체린 가문에 대해 물어봤었다.
그는 엘프의 숲을 나온 이후로 벨라에 정보원을 두고는 페리스와 꾸준히 접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받은 답변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세페 비체린. 비체린 가문의 초대 가주인 그가 바로 정령사였다는 내용이지요.”
엘프의 기억 속에서도 멀어질 정도로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들과 교류하던 인간 정령사들 중 가장 뛰어났던 이가 바로 주세페 비체린이었던 것이다.
“그, 그것이 사실입니까?”
클로이는 아직도 엘런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저를 처음 만났을 때, 저에게서 어떤 기운을 느끼지 못했습니까?”
“주변에만 있어도 산뜻해지는 호감과 동시에 냉철한 면모가 느껴졌습니다.”
클로이는 엘런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까?”
화악.
엘런의 손에서 제피로스와 이시스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클로이는 손뼉을 쳤다.
“그대는 저에게서 정령의 기운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그대에게 같은 기운을 느꼈지요.”
“그렇다면…….”
이미 클로이의 사고회로는 과부하가 되어 버렸다.
더 이상은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비체린 가문의 전통이 이상하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모두들 마법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정령사의 핏줄이 마법을 연구했으니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정령 친화력과 마나는 성질이 매우 다른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중에도 마탑까지 들어간 클로이는 대단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안타까운 점은 그대의 몸은 이미 마나에 너무 물들었단 것입니다.”
클로이가 마법에 대단한 재능을 가졌고 엄청난 노력을 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령 친화력이 지나다녀야 할 길에 마법사가 인공적으로 수집한 마나가 지나다녔다.
그것이 쌓여 이제 그의 혈관은 정령 친화력을 위한 것도 마나를 위한 것도 아닌 통로가 되어 버렸다.
“일단은 조금 전에 제피로스를 통해 혈관을 정령 친화력에 맞게 바꿔 보려 했지만, 개선만 될 뿐 완전히 바꾸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클로이는 탁한 마나가 맑아지는 것 같던 그 기분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지금보다 높은 경지로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하겠군요.”
그가 고개를 떨궜다.
엘런은 그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기에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클로이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죽도록 노력해도 올라갈 수 없던 그곳이 처음부터 자신의 길이 아니었다니.
가야 할 길의 방향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이기도 했다.
“마법을 연마한 기간이 오래되었기 때문이라면 제 아들 녀석은 어떻습니까?”
그의 눈에는 다시금 조그만 희망이 싹틔웠다.
자신은 늦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아들은 달랐다.
“그에게서는 그대보다 훨씬 더 큰 정령 친화력이 느껴지더군요. 아마 아직 늦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실례를 무릅쓰고 그 아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들만큼은 다른 길로 가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은 오히려 그 아이가 더 잘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그 아이는 마법보조사로서 많은 무시를 당하면서도 더 높은 경지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부디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클로이는 엘런의 두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엘런은 자신의 변화를 나누어 줄 대상을 바꾸기로 했다.
* * *
기사 가문과 마법사 가문은 저택 외관의 분위기부터 구조까지 많은 차이점을 보여 준다.
하지만 몇 안 되는 공통점을 찾자면 바로 폐관 수련장을 꼽을 수 있다.
높은 경지일수록 그 위를 향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수련과 깨달음이 중요해진다.
바로 그것을 위해 폐관 수련장이 있는 것이다.
물론 마법사 집안인 비체린 가문에도 폐관 수련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두 명의 청년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 고요를 깬 것은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청년이었다.
“엘런 님,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청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문자 그대로 돌이 된 것 같았다.
“엘런 님께서 주신 책에서 정령 친화력을 키우려면 자연을 느껴야 한다고 읽었습니다. 그러려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째서 폐관 수련장에 틀어박혀 있는 것입니까?”
마법보조사로서 용병들과 함께 다니는 일이 많아지며 성격이 그들과 비슷해진 시스토였다.
“시스토.”
“예.”
그제야 다른 청년이 입을 열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그리고 너의 몸. 바로 너의 몸이 가장 작은 규모의 자연이지. 너는 그것부터 느껴야 한다. 그것이 가장 기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그것을 느꼈습니다.”
시스토는 며칠 전부터 자신의 몸속을 흘러 다니는 정령 친화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엘런은 계속해서 정령 친화력을 느끼라며 명상을 시킬 뿐이었다.
“그것은 너의 마나가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한 것뿐이지, 정령 친화력 그 자체를 느낀 게 아니다.”
엘런은 슬며시 눈을 떴다.
“가장 중요한 건 기본이다. 마법을 배워 봤으니 알 텐데. 기본이 없는 마법사, 보조사들의 한계를 말이야.”
엘런의 좌우명과도 같은 말이었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 쉬운 길을 찾으려고 하면 결국에는 쉽게 떨어지고 만다.
지겨울 만큼 기본을 다지고 또 다져야만 그 위로 높은 경지를 쌓아 올릴 수 있다.
그래서 엘런은 하루도 빠짐없이 책을 읽고 마나 수집법을 하는 등 기초를 빠뜨리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엘런 님께서 며칠 후면 마탑 휴가가 끝난다고 알고 있어서 마음이 급해진 것 같습니다.”
엘런은 그를 위한 개인 교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순한 호의 때문에 무리해서 그를 도울 수도 없었다.
그가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기 전에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기초의 중요성을 놓치고 말았다.
“아니다.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정령은 나도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거의 없어. 정령은 배우는 것보다 직접 느끼는 게 대부분이니까. 이것만 잘해 놓으면 나머지부터는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거다.”
엘런의 말에 그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많이 한 것 같으니 조금 쉬다가 할까?”
그 말에 시스토는 더욱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온몸이 쑤셨는지, 그는 으으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어 댔다.
엘런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폐관 수련장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런 곳이 바로 폐관 수련장이구나.’
엘런은 자신의 폐관 수련장을 만들기 위해, 다른 가문의 것에 대해 책으로 읽은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직접 볼 기회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폐관 수련장은 가문의 선조 때부터 비기를 수련하던 곳이다.
그와 관련한 모든 자료며 흔적이 고스란히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마법 서적이 대부분이군.’
정령사 가문에서 마법 연구를 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쯤, 그의 눈에 한 자료가 들어왔다.
그것은 책 한 페이지 정도의 비석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글자들이 쓰여 있었다.
‘이건…….’
엘런은 이 글자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착한 일을 하고 사는 건가?’
엘런의 입가에는 커다란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