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22
122
왕의 길
* * *
정령과의 교감력은 계약자와 정령이 서로의 정신을 얼마나 공유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척도였다.
교감 능력이 좋을수록 정령은 계약자의 의도를 더욱 완벽하게 실현시킬 수 있다.
정령은 마법처럼 구현하는 방법을 직접 계산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고대어와 같이 아주 직관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빠르고 효율적인 기술이었다.
지금껏 엘런은 마법과 정령을 연계한 기술을 많이 사용해왔다. 그리고 아주 강한 위력을 보여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교감력이 좋을 때의 이야기지.’
제피로스와는 여전히 간단한 의사소통만이 가능했고, 이시스와는 어떤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엘런은 제피로스, 이시스와의 교감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그가 발견한 것이 바로 『정령 교감에 대한 다각적 접근』이라는 책이었다.
거기에는 교감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많은 내용이 나와 있었다.
하지만 세월의 풍파로 훼손된 정도가 심했기에 내용을 유추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엘런이 가장 아쉬워했던 부분이 바로 친화의 비약 제작 방법에 관한 곳이었다.
어떤 약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으나, 저자는 교감 능력을 확실히 끌어올릴 방법이라고만 설명했다.
하지만 자세한 제작 방법은 모두 지워져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이거면 만들 수 있겠다.’
엘런은 그 작은 비석에 적힌 내용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친화력의 비약 제작’이라는 글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밑에는 제작 방법에 대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엘런의 책에서 지워진 바로 그 페이지를 그대로 본뜬 것 같았다.
‘지워진 글자가 이런 것들이었구나.’
이에 대해 리버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모르는 글자에다가 지워진 제작 방법을 해석할 수는 없었다.
‘글자를 알아도 모르는 내용이 많지만…….’
이제 책에 쓰여 있던 친화의 비약을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이 재료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재료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연구에 큰 진척을 가져올 수 있었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엘런이 한 비석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자 시스토도 그 옆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내가 너를 도우니 너의 조상님이 나를 돕는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뜻입니까?”
“덕분에 연구에 진척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시스토는 영문도 모른 채, 엘런의 시선을 따라 그 비석을 보았다.
‘알아볼 수가 없네.’
여기에 사용된 글자는 고대어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도 알기 힘든 종류였으니 시스토가 알아볼 리 만무했다.
그래도 자신의 가문을 칭찬해 주니,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연구는 미래의 일이니, 일단 수련부터 다시 시작하자.”
“예.”
* * *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엘런 님의 가르침을 새기고 살겠습니다.”
“다시는 나와 만날 일이 없는 것 같은데?”
“폐관 수련장의 수련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시스토는 장난스럽게 엘런의 말을 되받아쳤다.
“종종 들르도록 할게. 그때마다 얼마나 달라졌는지 볼 것이다.”
“예, 언제 어떻게 방문하시든지 달라진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옆에 서 있던 클로이는 두 청년의 대화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수련장에서 나온 시스토는 이미 정령사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저토록 열성적인 아들의 표정을 본 것이 오랜만이었다.
‘마법보조사가 된 후로는 보기 힘들었지.’
이게 전부 시스토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저 청년, 바로 엘런 덕분이었다.
정령사의 길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저 아이가 저토록 즐거워하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클로이 님은 마탑에서 계속 뵐 수 있을 테니, 거기서 다시 뵙겠습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지금까지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엘런이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긴 이별도 아니었기 때문에 작별인사가 길 필요도 없었다.
‘또 얼른 가 봐야 할 곳도 있고 말이야.’
엘런은 폐관 수련장에서 알아낸 친화의 비약 제작법을 얼른 리버에게 가져다주고 싶었다.
파앗.
그들의 눈앞에서 엘런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곳에는 엘런의 흐릿한 잔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가 전투 때나 사용하던 활주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파앗.
해리포드 시가지 밖에 있던 클로이의 집에서 엘런의 저택까지는 1분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후우.”
엘런은 문자 그대로 저택 앞에 나타났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가슴은 산소를 받아들이느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냐?”
“영감, 내가 친화의 비약 제작법을 알아왔어.”
“호오, 안 그래도 그걸 연구하려고 재료를 사 오는 길이었는데 말이야.”
리버도 정령학이라는 흔하지 않은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썩 즐거운 일이었다.
특히, 내용이 지워진 부분이 많아 어딘가 찝찝하기도 했었던 터라 엘런의 소식이 반가웠다.
“그 제작법이라는 거 어디 한번 보자.”
“여기.”
엘런은 비석에 쓰여 있던 내용을 대륙 공용어로 바꿔 쓴 종이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흐음…….”
찬찬히 그 내용을 읽어 가던 리버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내용이 다 있어도 지랄 맞은 건 똑같군.”
리버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들어가는 재료의 이름이 하나 같이 살면서 처음 보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
“그래, 오늘부터 다시 도서관을 싹 뒤지고 다녀야겠군.”
리버의 눈에서 열정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엘런도 마찬가지였다.
* * *
그들이 연구를 시작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마탑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뒤져 보아도 친화의 비약 재료에 관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이 연구실에서 시간을 쏟고 있는 사이 프로드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었다.
그동안 프로드 왕국에는 유례없는 번영의 시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숙적이었던 고센 제국의 견제가 완전히 없어졌다.
그들은 제국 내부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며 침략에 대한 의사가 없음을 표방했다.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있던 귀족 사회와 마탑에서도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원인은 바로 비약 연구로 정신없는 엘런이었다.
그는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자신이 마탑에 들어간 이유를 망각하지 않았다.
그의 활약으로 마법보조사들의 마탑 합류가 통과되었다.
물론 점진적으로 시행이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마탑의 폐쇄성을 생각하면 이 일이 얼마나 파격적인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평민 출신이자 마법보조사를 지지하는 엘런 앞에서 그들을 업신여기는 행동은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 교보재로 뽑히는 것이 바로 레오나드였다.
그가 하인에게 괜한 시비를 걸었다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분위기는 견고한 신분제 사이로 점차 스며들어 그것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었다.
“폐하, 평민들이 열심히 일해서 세금을 내고 나면 그들에게는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돈만 남습니다. 그에 비해 귀족이나 부자들이 내는 돈은 그들에게 없어도 그만인 정도의 액수입니다. 세금 제도의 개편이 필요합니다.”
로미우도 따뜻한 군주로 성장하며 프로드의 태평성대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폐하, 평민들이 내는 돈을 전부 합쳐도 귀족과 부자들이 내는 돈보다 적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더 많은 부담을 지우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됩니다.”
그에게 반대 의견을 제시한 사람은 세르넬이었다.
이들은 서로의 방식대로 왕국을 위한 정책을 제시하며 논쟁을 벌이고는 했다.
알베르토 프로드는 역사에 남을 성군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한없이 우유부단하다는 것이었다.
전생에서도 그는 능력 있는 공주와 왕위를 물려주고 싶은 왕자 사이에서 고민했다.
그렇게 얼렁뚱땅 왕위를 받은 로미우는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능한 왕이 되었다.
이번 생에서도 그는 능력 있는 왕자와 왕이 되고 싶어 하는 공주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국무 회의에 참가하겠다고 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돋보이는 능력을 보여 주며 자신의 입지를 만들어 갔다.
“왕자님의 의견이 백번 옳다고 생각됩니다. 무릇 성군이라면 백성들의 고충까지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견은 천부당만부당합니다. 국고를 채워 주는 것은 바로 저희 귀족과 부자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칭찬은 못 할망정 더 높은 세금이라니요.”
그리고 그것은 좋게 말하면 활발한 의견의 교류, 나쁘게 말하면 정국의 혼란을 가지고 왔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파가 나뉘었다.
왕자를 지지하는 파와 공주를 지지하는 파였다.
둘 중에 누구도 부족하지 않았기에 균형은 쉽게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두 의견은 판단을 보류하도록 하겠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하지.”
오랜 시간 정사를 다스려 온 알베르토조차도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이처럼 국무 회의를 끝내 버렸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회의를 해산한 후, 세르넬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덜컹.
콰앙.
세르넬의 방문이 신경질적으로 닫혔다.
“그놈은 뭐가 불만이어서 사사건건 시비인 거야?”
국무 회의 때마다 자신의 말에 사족을 달던 로미우가 떠올랐다.
‘근본 없는 서자 따위가 나에게 상대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거울 속에 있는 로미우가 말했다.
‘아바마마를 꾀어낸 첩의 자식.’
거울 속의 로미우는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르넬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
“닥쳐!”
‘첩의 자식이면 첩의 자식답게 조용히 틀어박혀 살아라. 그래야 목숨이라도 붙이고 살 수 있지.’
그녀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유리잔을 거울을 향해 냅다 던져 버렸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똑똑.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소리를 들은 하녀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공주의 몸에 상처라도 났다면 자신은 끝이었다.
“되었다. 돌아가 보아라.”
안에서 세르넬의 구슬픈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제가 가서 유리잔을 치워 드리겠습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끼익.
하녀의 말에 방문이 열렸다.
“꺄악.”
문틈 사이로 보인 세르넬의 모습에 하녀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 버렸다.
하녀의 팔뚝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그녀는 아픔도 잊은 채, 일단 몸을 엎드리고 사과부터 했다.
“내가 가 보라고 했지 않았느냐?”
그녀가 들고 있는 레이피어 끝에는 방금 전에 묻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도 내가 우습게 보이느냐? 그래서 내게 기다리라고 명령한 것이냐?”
“아닙니다, 공주님. 절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녀의 어젯밤 손톱이 다 뜯긴 채로 울며 잠이 든 자신의 동료를 떠올렸다.
공주가 밤만 되면 미쳐 버린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공주가 자신을 죽인다 한들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공주님, 릭 체들턴 경이 찾아왔습니다.”
그녀를 살린 것은 외부인의 안내를 맡고 있는 하녀였다.
릭 체들턴이라는 소리에 그녀는 검을 거두어들였다.
“들라 하여라.”
그녀는 문을 쾅 닫고는 들어가 버렸다.
“하아.”
하녀는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난 것이 안심되었는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는 순간까지도 혹시나 세르넬에게 들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 * *
“조급하십니까?”
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체들턴 경 같으면 안 조급하겠어요? 나는 제왕학과 관련된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모릅니다. 많은 정책도 만들어 오고 있지요. 그런데 오라버니를 따라잡을 수가 없군요.”
그녀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입가를 가렸다.
“도와주겠다던 당신들도 별다른 행동이 없더군요. 이 상황에서 내가 안 조급할 수 있겠나요?”
그녀의 말에 체들턴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계속 공부하시며 기다리면 때가 찾아온다고 몇 번을 더 말해 드려야 합니까?”
“그러다 오라버니가 왕이 되겠지!”
감정을 참을 수 없었던 그녀가 빽 소리를 질렀다.
“왜냐면 오라버니의 뒤에는 프로드의 영웅 엘런이 있으니까.”
그게 문제였다.
소심한 그가 이토록 달라질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엘런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프로드의 영웅이 된 그가 로미우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 엘런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공주님에게도 탑주님의 지지가 있지 않습니까?”
세르넬의 반응에도 릭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비공식적인 지지 따위로 뭘 어쩌겠다는 거죠?”
“탑주님께서 공주님을 위하여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점차 낮춰졌다. 동시에 그로부터 마나의 파동이 시작되었다.
이제 세르넬의 방 안의 소리는 절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드디어 실질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건가요? 무엇이죠?”
“공주님이 활약할 시기를 훨씬 앞당기는 일입니다.”
릭의 이야기를 들은 세르넬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나는 못 들은 걸로 하겠어요.”
세르넬이 일어서며 돌아섰다.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공주님께서는 ‘국왕’이 되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뚝.
세르넬은 머릿속의 어떤 끈이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어버렸다.
“하겠어요. 나는 반드시 이 땅의 국왕이 될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