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24
124
역병 (2)
* * *
탄탄한 근육에 떡 벌어진 어깨, 각진 턱. 자말의 모습은 귀족이라기보다는 잘나가는 용병단의 단장처럼 보였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엘런 베리타티 남작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도 영광이네, 톤턴의 영주 자말 르루엘일세.”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그들은 내성으로 들어갔다.
“이 역병에 대해서 조사하고 치료하기 위해 왔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영웅을 이곳으로 보낼 정도면 왕실에서도 일의 심각성을 인식했다고 봐도 되겠나?”
“왕실은 지금 조사대를 꾸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왕실의 명령으로 온 것은 아닙니다.”
“그렇군.”
자말은 역병에 대해서 몇 번이나 보고를 올렸다. 하지만 왕실에서는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역병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보고를 올렸네. 화가를 불러 환자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첨부하기도 했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군요.”
자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떨리는 주먹으로 봐서는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수도에서는 가벼운 역병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더군. 그 후로 몇 번이나 더 보고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네. 그런데 결국 남서부를 다 집어삼키고 나서야 조사대를 꾸린다니.”
엘런은 그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보낸 보고서는 분명 가벼운 역병이 맞았는데.’
그는 최근 비약 연구와 마탑 업무로 인해 국무 회의에 자주 참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프로드 전역의 정보가 모여드는 국무 회의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시간이 되는대로 회의에 참여했고, 프로드 전역의 영주들이 보내 온 서신들을 보며 국왕이 정책을 정하는 것 역시 볼 수 있었다.
자말의 보고서도 몇 번 언급되었다.
톤턴 지역에 가벼운 역병이 돌고 있다. 그러나 사태가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서 영지 내에서 해결 방안을 찾겠다는 내용이었다.
“국무 회의에 도착한 톤턴의 역병은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건의 보고가 들어오는 국무 회의의 한 편에 쌓일 정도로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엘런조차도 별문제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상한 것을 느꼈다면 곧바로 아르곤을 보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네. 자네도 여기까지 오면서 피해자들을 보았지 않은가?”
엘런은 격리소에 있던 역병 환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첨부했다면, 분명 심각한 역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축소되어 보고되었다는 말은…….’
엘런은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말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거나, 누군가 중간에 보고 서신을 바꿔치기 했다거나.’
어느 쪽이든 꿍꿍이가 있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조사에 앞서 먼저 해야 할 일도 있었다.
“일단은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자네가 어떻게 도움을 주겠다는 건가?”
자말의 눈에서 작지만 확실한 경계심이 보였다. 엘런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혹시 소문 때문입니까?”
“크흠, 알고 있었군. 미안하네.”
엘런이 역병을 옮겨 왔다는 것은 톤턴뿐만 아니라 남서부 지역에서는 파다한 소문이었다. 아직 사실 여부가 확인된 것은 아니었지만, 소문의 당사자가 치료를 하겠다며 찾아오니 의심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그럴듯한 내용의 소문이 시기적절하게 퍼졌다.’
이건 누군가 엘런을 모함하기 위해 세운 계획임이 틀림없었다.
‘또 개수작을 시작하는군.’
이런 종류의 모함이라면 익숙할 지경이었다.
그만큼 모함이라는 것은 정적을 제거하는 데 정석적인 수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게 당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철저히 알아내서 역으로 먹여 주지.’
엘런은 속으로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없는 대상에게 분노를 표출할 때가 아니었다.
자말이나 남서부 지역의 주민들은 악의가 있어서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던 것뿐이다.
“저 때문이든 저 때문이 아니든 조사를 해 봐야 밝혀지지 않겠습니까? 제가 데려온 이자는 이쪽 분야로는 능통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리버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누구에게든 반말을 쓰며 무례한 언사를 내뱉는 그가 웬일로 고분고분했다.
그것은 톤턴에 진입하기 전 엘런이 한 부탁 때문이었다.
“영주에게 무례하게 했다가 소란이라도 나면 사람을 치료하기도 전에 도시 밖으로 쫓겨날 거야.”
그 말에 리버는 못마땅한 듯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의 원래 목적이 치료였던 만큼 그에 협조하기로 했다.
“나도 그 소문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네. 다만 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지 않다는 게 문제라는 거지.”
자말은 합리적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귀족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모함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엘런을 의심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상황을 고려할 수도 있었다.
“자네가 이 역병의 심각성을 가장 먼저 알아봐 주었지 않은가. 그리고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오기까지 한 이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네.”
“병의 치료며 원인을 밝히는 것까지 돕겠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으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엘런의 말에 자말이 힘없이 웃었다.
“그럼 좀 부탁하겠네.”
“최선을 다 해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사람들이 조금 날카로울 수 있네. 자네가 이해하게나.”
엘런은 자말의 말에 공감했다.
시민들은 자말처럼 합리적이지 못할 것이다. 그를 본다면 일단 적대감부터 드러낼 수도 있었다.
‘일단은 따로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어.’
그가 이곳까지 바로 달려온 이유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정의감이었다.
하지만 꼭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노리고 있는 자가 있다.
그자가 퍼트린 소문을 조사하면 분명 범인을 잡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조사를 위해 가장 좋은 장소라고 한다면, 당연히 사건의 발생지였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시민들이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리가 없다.
곧바로 쫓겨나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일단, 바로 격리소부터 내려가 보겠습니다. 환자들의 상태부터 자세히 보고 싶습니다.”
“안내인을 붙여 주겠네.”
“아닙니다. 오는 길에 보았으니 저희가 직접 가 보겠습니다.”
리버를 위해서라도 동행이 붙는 것은 막아 줘야 했다. 지금 틀어막고 있는 저 입을 당장이라도 떼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것마저 막아 버리면 언제 폭발할지 몰랐다.
“알겠네, 그럼 자네가 머물 방을 준비해 두겠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잘 부탁하겠네.”
* * *
진료소와 격리소 내부는 생각보다 더 잘 관리되고 있었다. 위생상태도 양호한 편이었으며 관계자들의 감염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도 시행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역병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 보군.”
대게 백성들은 의학은 물론이고 글자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역병이 돌면 과학적인 대책보다는 민간요법을 사용한다.
그것이 역병이 퍼지는 데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곳의 격리소는 역병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은 주민들보다 용병들이 더 많거든. 그들 덕분일 거야.”
용병들은 어떤 유형의 임무이든 그것을 수행한다.
그 모든 것의 목적은 단 하나, 바로 돈이었다. 다시 말해 몸은 그들의 전 재산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임무는 언제 어디서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살아남기 위한 지식을 터득해 갔다.
“나도 용병 놈들이 제 몸을 무척 아낀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어. 하지만 이건 그런 어설픈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리버의 말에 엘런은 다시 한 번 격리소 내부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체계적인 격리소였다.
엘런도 과거 유능한 용병이었지만, 용병 일을 하며 이런 지식은 배운 적이 없었다.
자신도 의학 마법과 관련된 서적을 보며 배운 지식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이를 운영하는 책임자가 따로 있다는 말이었다.
‘나도 의학을 배우기 전이었다면 몰랐을 지식인데, 담당자가 누구지?’
엘런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파바밧!
그의 귀에 옷깃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자신을 향하는 주먹의 소리였다.
빠각.
엘런은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았다.
그 순간, 팔을 따라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런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반대쪽 주먹을 그의 복부로 꽂아 넣었다.
빡.
뼈와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절대 배를 때려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났다.
리버를 비롯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소란에 당황하고 있었다.
“전혀 새로운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너야말로 성장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구나.”
엘런의 말에 상대방이 맞받아쳤다. 그의 입꼬리가 위쪽으로 향했다.
“아는 사람이냐? 아니, 아는 사람인 건 좋은데 만나자마자 뭐 하는 짓거리야?”
리버는 바로 옆에서 일어난 격투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알다마다. 저분에게는 이런 게 인사법이거든. 필립스 님, 오랜만입니다.”
그는 필립스 권법의 창시자, 필립스 레이건이었다.
눈만 남기고 나머지는 천으로 모두 가리고 있었음에도, 엘런은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평범한 사람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웬일이냐?”
그도 엘런이 반가웠는지 눈이 반달 모양이 되었다.
“남서 지역에 역병이 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뭔가 도울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왔죠. 그런데 필립스 님이야 말로 아직 여기에 계실 줄은 몰랐네요.”
필립스는 한 지역에 잘 정착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엘런이 수련을 마치고 톤턴을 떠날 때도 어디론가 떠날 것처럼 이야기했었다.
“어쩌다 보니 남게 되었다. 그런데 역병이라니. 역시 빨리 떠났어야 했어. 졸지에 이곳을 관리하고 앉았으니.”
필립스의 말에 더 크게 반응한 것은 엘런이 아니라 리버였다.
“네놈이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고? 그럼 네가 이곳을 만든 거냐?”
“이자는?”
엘런은 곤란한 듯 한쪽 뺨을 긁었다.
“리버라고 하는데, 의학 쪽으로 지식이 풍부한 자입니다. 보시다시피 약간 괴짜이긴 하지만 능력은 있는 자입니다.”
필립스는 예전에 귀족이긴 했어도 지금은 용병 생활을 한 지 오래되었다.
그랬기에 리버가 자신에게 반말을 해서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더군.”
“호오, 원래부터 역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나?”
“어릴 적에 책에서 본 적이 있었지.”
그가 아무리 무예에만 미친 듯이 흥미가 있었다고 해도 그는 귀족 가문의 차기 가주이기도 했다. 그동안 그는 여러 방면에서 지식을 쌓았고 덕분에 이처럼 체계적인 격리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 있는 환자들이 전부입니까? 소문보다는 심한 것 같지 않습니다.”
엘런의 말대로 그곳의 환자들은 이곳저곳이 썩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잘 관리되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남서부 지역 전체를 휩쓸고 있는 죽음의 역병을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모르는 소리. 이자들은 가장 약한 단계야. 진짜 환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저기 안에 있네.”
필립스가 가리킨 곳은 천으로 가려져 있어 안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엘런은 격리고 전체를 채우고 있는 악취의 근원이 어딘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비위가 상할 수도 있으니 각오하고 따라 들어와.”
스윽.
필립스가 천막을 걷었다.
그 안에는 밖에 있는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환자들이 모여 있었다.
“이게 죽음의 역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