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26
126
역병 (4)
* * *
엘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톤턴에서 시작된 역병은 남서부 지역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전국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범위가 넓어졌다.
그때쯤 되어서야 왕실의 조사대가 꾸려졌다.
가장 구하기 힘들었던 치료 마법사는 대부분 돈이 급한 마법보조사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미 전국으로 퍼져 나간 역병, 이제야 조사단이 톤턴에 도착한다 한들 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없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베리타티 남작이 중부 대륙을 갔다 오면서 끔찍한 역병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대전에 모인 몇몇 귀족들이 무릎을 꿇고 국왕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알베르토는 마음 같아선 이들을 전부 붙잡아 감옥에 가두어 버리고 싶었다.
엘런을 프로드의 영웅이라며 추앙한 지 얼마 흐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소문이 돌자마자 태세를 완전히 전환해 버렸다.
게다가 그들 중 몇 명은 치료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마법사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역병이 두려워 조사단에 지원하지도 않고 엘런의 잘못만을 외쳤다.
‘역시 다루기 쉬운 족속들이야.’
릭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귀족들은 역시나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그 이익은 잘나가는 사람을 견제하면서 생기는 이익도 포함되었다.
그 부분을 자극하니 그들은 곧바로 릭이 원했던 반응을 보여줬다.
“그건 아직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지 않은가. 지금 조사대를 파견했으니 그들이 결과를 내놓을 때까지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하라.”
알베르토의 근엄한 목소리도 이미 먹이를 물어뜯기 시작한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폐하,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왕실이 베리타티 남작의 잘못을 덮기 위해 일을 축소시키고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조사대가 늦게 꾸려진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라며 백성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폐하, 부디 진실을 밝혀 주십시오.”
알베르토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저들은 조사대가 늦게 꾸려진 이유를 정녕 모르는 것인지 궁금했다.
‘이런 놈들이 귀족이라고 판을 치는데 프로드 왕국이 멸망하려면 몇 년도 전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유례없는 번영의 시기라니. 그게 다 누구 덕인지 생각을 해 보고서 말하란 말이다.’
알베르토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그가 왕자 시절에는 자신이 국왕이 되면 원하는 모든 말을 속 시원하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가 겪어 온 정치는 그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애초에 마도 왕국이라는 것부터가 마법사 출신 귀족이 세력을 잡는 구조다.
자연스럽게 왕은 권력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크흠, 아들과 딸이 있는 곳에서 이런 꼴을 보여 준다는 것이 말이 아니구나.’
그는 양옆에 앉아 있는 로미우와 세르넬을 보았다.
국왕을 떠나서 아비로서 떳떳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엔 나도 지엄한 국왕이 아니라, 한낱 정치인일 뿐이었음을 저 아이들도 알게 되겠지.’
쾅.
알베르토가 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털어놓고 있을 때, 누군가 책상을 크게 내리쳤다.
‘아카드 경!’
알베르토는 자신도 모르게 아카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케니프라 지원군 요청 때가 떠올랐다.
엘런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면서도 다혈질인 그가 또 아무런 논리도 없이 덜컥 화부터 낼까 봐 걱정되었다.
그것은 결국 저들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카드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자신에게서 묘하게 옆으로 벗어나 있었다.
“경들에게 정말 실망스럽다. 경들이 그러고도 프로드 왕국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가?”
일말의 떨림도 없이 위압감마저 느껴지는 그 말은 바로 로미우가 한 것이었다.
“도널드 경, 경은 조사단의 구성이 늦어진 이유를 정녕 모르는 것이오? 역병 조사단에 가장 필요한 치료 마법사! 그들이 모이지 않아서가 아니었소? 나는 오히려 여기서 마탑은 무엇을 했는지가 묻고 싶군.”
요즘 들어 좋은 정책들을 많이 제시했던 로미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타고난 그 우유부단한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정책을 제시할 때도 항상 귀족들의 의견을 신경 쓰는 태도에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귀족을 향해 호통을 쳤다. 다른 귀족들도 그 모습에 놀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솔직히 말해 일부 귀족들을 보며 얼마나 실망한 줄 아시오? 선대의 드높았던 명예는 모두 잊은 채, 그저 자신과 가문의 이익만 쫓아다니는 모습에서 나는 이 나라의 미래를 볼 수 없었소.”
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어 갔다.
그는 지금까지 쌓아 왔던 모든 것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베리타티 경의 등장으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소. 경들이 그렇게 무시하는 평민 출신의 그가 이룩해낸 결과물을 보란 말이오. 그가 이 프로드를 몇 번을 구해냈소? 그리고 프로드의 이 번영은 누구의 덕이오?”
알베르토도 아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도 되었다.
“그리고 그대들은 그런 베리타티 경에게 어떻게 하였소? 프로드의 영웅이니, 최연소 대마법사이니 하며 그와 연을 맺으려고 몸부림을 쳤지 않소? 도날드 경, 말씀해 보시오. 그대는 개인적으로 그를 찾아갔다고도 알고 있소.”
방금까지 엘런에 대해 가장 심하게 반발하던 도날드였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행적이 밝혀지자 얼굴이 붉어졌다.
“베리타티 경은 역병의 소식을 듣자마자 직접 그곳으로 갔소. 그곳의 환자들을 돕기 위함이지. 어떤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말이오. 경들은 그 점을 명심해 주었으면 하오.”
자신의 흥분을 못 이기고 몸을 일으켰던 로미우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숨이 거친 것이 화가 덜 풀린 것 같았다.
그가 앉았음에도 대전의 분위기는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크흠, 왕자의 표현이 다소 과격할 수는 있으나 옳은 내용도 있다고 생각된다.”
결국, 그곳의 분위기를 정리하는 것은 알베르토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아들인 로미우가 대신해 주어서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베리타티 경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 두도록 하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역병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지부터 정하는 것으로 하겠다.”
그 후의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만큼은 로미우가 귀족들의 분위기를 뒤집은 덕에 알베르토는 회의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 * *
그날, 세르넬의 방 안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물건 깨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녀들은 혹시라도 자신들에게 괜한 불똥이 튈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공주의 기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처음에는 물건을 부수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하녀들의 옷을 모두 찢어 버리고는 문밖으로 쫓아내는 일까지 있었다.
“공주님이 계시는가?”
그리고 그럴 때면 항상 릭이 나타나 그녀의 폭주를 막아 주었다.
“예, 도련님. 방 안에 계십니다. 다만…….”
“괜찮다. 내가 해결할 테니 너희들은 그만 일을 보러 가거라.”
“감사합니다.”
하녀들은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다.
그녀들에게 릭은 구원자 같은 존재였다. 거기다 반반한 얼굴까지 가졌으니, 공주의 하녀들 중에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똑똑.
“공주님, 릭 체들턴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끼익,
릭이 문을 열자마자 본 것은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보석 상자였다.
텁.
“어째, 올 때마다 던지는 물건이 비싸지는 것 같습니다.”
릭은 그것을 가볍게 잡고는 다시 그녀의 화장대에 올려놓았다.
딱.
그는 손가락을 튀기며 사일런스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이곳에서 하는 말은 철저한 보안이 필요한 것들이었다.
“또 여기는 왜 온 것인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낮 시간의 그녀는 똑 부러지는 영애의 모습이라면 밤 시간의 그녀는 징징거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공주님이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온 겁니다.”
체들턴은 허락도 받지 않고 공주의 의자에 앉았다. 그 동작이 매우 익숙해 보였다.
“당신들은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저희는 항상 보여 주었지 않습니까? 지금 그 평민 놈을 이까지 몰아넣은 것도 저희 덕이 아닙니까?”
릭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세르넬도 릭의 반대편에 앉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발을 빼려고 하더군요. 오늘만 해도 그래요.”
릭은 올 때마다 쀼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이것저것 지적해 대는 세르넬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 마음대로 쓰려면 어쩔 수 없는 과정이니 참기는 한다만…….’
이렇게 그가 매번 찾아오는 것도 마법에 대한 부작용으로 그녀가 폭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마탑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총명했던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감정적으로 변해 갔다.
누구보다 국왕의 재목이었던 그녀는 점점 국왕으로서의 자질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래야 꼭두각시 왕이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왕족으로서의 품격 따위는 개나 줘 버린 여자애를 달래 주는 것도 일이야.’
그렇다고 탑주와 가주가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공주를 주기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은 릭밖에 없었다.
“우리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잖아요. 거기서 엘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어야 했던 거 아닌가요? 그런데 당신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더군요.”
“거기서 왕자가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릭의 말에 세르넬은 고개를 돌렸다.
“그래 봤자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세르넬이 눈만 슬쩍 돌려서 물었다.
“폐하라고 그 말을 안 하고 싶었겠습니까? 분명 귀족들의 행태가 눈꼴 시렸을 겁니다.”
“하긴, 내가 보기에도 그들은 간신배 같더군요. 내가 국왕이 되면 그런 자들부터 치워 버릴 거예요.”
이제는 몸을 완전히 릭 쪽으로 돌린 세르넬이었다.
“폐하가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정치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시기를 아는 것과 적절하게 타협하는 것. 그것이 정치입니다. 그리고 왕자는 그것을 놓친 겁니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는 알베르토의 주도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대전을 나오고 나서부터 그들의 태도는 확실해졌다.
“왕자는 그때의 발언으로 중립에 서 있던 귀족들까지 적으로 둔 것입니다.”
완전한 왕정파 귀족이 아니고서야 자신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겸허히 받아들일 귀족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거군요.”
“오히려 한 단계를 건너뛰었으니 한 단계 빨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런과 왕자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을 이끌어 내는 것. 계획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게다가 그놈이 톤턴까지 달려간 것은 우리에게 아주 좋은 상황입니다. 그곳은 지금 그놈에 대한 분노가 들끓고 있는 곳입니다.”
그의 말에 세르넬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릭은 자신의 계획을 떠올리느라 그 변화를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별말이 없는 걸 보니, 가명을 쓰고 있나 봅니다. 하지만 우리 쪽에서 그 사실을 퍼뜨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연 무지한 민중들이 그를 가만히 둘 것 같습니까?”
그는 엘런이 무너지는 상상만 해도 속이 시원해졌다.
“이대로만 해도 충분하지 않나요?”
세르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루라도 빨리 국왕이 되고 싶지 않은 겁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우리의 계획은 순풍에 돛을 단 격일 겁니다. 으하하하.”
세르넬은 어쩐지 릭의 웃음소리가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알겠어요. 그대들만 믿겠어요.”
“이제 공주님은 국왕이 되는 것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릭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밤이 늦었으니, 저는 가 보겠습니다. 오늘은 진정하시고 얼른 주무십시오.”
그는 끝까지 비릿한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세르넬의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