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27
127
역병 (5)
* * *
“이거 잡힐 듯 말 듯 하는 게 사람을 정말 안달 나게 만드는데?”
엘런은 종이에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비슷하게 생긴 종이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걸 알아야 약을 만들 수 있다고. 그 좋은 머리는 뒀다가 어디에 쓰겠다는 거냐?”
“이거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처음 보는 수식이 쓰여 있다고. 지금 풀어 가고 있으니까 좀 기다려 봐.”
엘런과 리버는 며칠째, 역병에 걸린 마법을 분석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았다.
리버의 말대로, 이것만 풀어내면 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미 다른 부분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말이었다.
‘스승님, 이 부분은 아무리 해도 안 풀리는 것 같습니다.’
-흐음.
수식을 분석하는 능력 자체는 엘런이 뛰어났다. 하지만 프로뱅의 경험은 엘런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의 지혜는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엘런은 항상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거 언뜻 보면 플래그 마법의 수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보니 흑마법 중에 있는 수식인 것 같은데.
엘런의 귀가 쫑긋했다. 머리로 듣는 소리였지만, 제대로 듣겠다는 생각에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아무래도 이거 커스 마법을 개량한 마법인 것 같다.
“아!”
엘런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뭐야? 뭐라도 생각난 거냐?”
그는 리버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종이에 수식을 적어나갔다.
탁.
엘런은 경쾌하게 펜을 내려놓았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무엇인가 완성된 것은 분명했다.
“영감, 그러니까 여기에 쓰인 거에 맞춰서 약을 만들어봐.”
“호오, 이렇게 생각했단 말이지? 정말 네놈 머리 돌아가는 건 따라갈 수가 없다니까.”
리버는 바로 종이를 받아 들고는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흐름을 탄 리버는 자신이 가진 재료들을 이것저것 사용하며 약을 만들었다.
‘이 정도 수준의 개량을 할 수 있는 놈들이면 꽤 높은 가문이라는 건데.’
마법을 개량하는 것 자체로도 매우 복잡한 일이었다.
하지만 엘런이 분석하기에도 이토록 힘들 정도의 개량이 가능한 곳이라면, 생각할 수 있는 집단은 한정적이었다.
엘런의 머릿속에는 몇 가지 후보 가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중 가장 유력하게 생각되는 곳이 있었다.
‘체들턴, 네놈들 짓이냐?’
마법식의 베이스가 프로드 왕국에서 쓰는 것이었다.
이 정도 개량을 할 수 있는 가문은 프로드에서도 드물었다. 게다가 결정적인 것은 따로 있었다.
‘나로 인해 가장 이득을 많이 볼 수 있는 놈들.’
굳이 역병에 마법을 걸어 퍼뜨리고 소문을 낼 이유.
그것이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그론리드 가문에서 자신을 해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가문에서도 그렇게까지 무리수를 던질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곳은 없었다.
‘아직은 심증뿐이니, 확실한 걸 찾아내야겠어. 안 그러면 레오날드 때처럼 꼬리를 잘라 버리겠지.’
엘런은 확실한 증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리버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실험작은 완성이다.”
리버는 녹색의 액체가 든 플라스크를 엘런에게 건넸다.
“벌써 완성시킨 거야? 너무 빠르잖아?”
“딱 저것만 필요했거든. 나도 플래그 마법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의 발상에 놀랐다. 거기에 맞게 만드니 역병이 바로 사그라지더구나.”
효과가 있다는 말에 엘런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쨌거나 자신 때문에 일어났던 일. 이로써 그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털어 버릴 수 있었다.
‘일찍부터 리버 영감을 찾은 건 정말 잘한 일이야.’
리버가 없었다면 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을 것이다.
“그거 완제품으로 좀 만들고 있어 줘. 나는 영주에게 다녀올게.”
“알겠다. 행정적인 절차 같은 거는 네가 해결하고 와.”
리버는 그런 것은 딱 질색이라며 돌아섰다.
이제 이 약이 사람의 몸에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확인하는 과정만 남았다. 그 실험은 엘런이 만든 클론이 받아 줄 것이었다.
“그럼 갔다 올게.”
* * *
격리소를 나온 엘런은 곧바로 영주가 있는 내성으로 들어왔다.
‘사람들 분위기가 이상하던데.’
영주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엘런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연구실은 격리소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밖에 나가자마자 환자와 간병인들을 볼 수 있었다.
엘런은 늘 하듯이 웃으면서 인사했다.
그들의 반응도 항상 똑같았다. 병을 고쳐 줘서 고맙다고 하며 연신 고개를 숙여 대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그들은 엘런을 그냥 지나쳐 갔다.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나오는 분위기는 분명 적대감이었다.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 거지?’
그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죽을병에 걸린 환자가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한 분위기는 엘런이 내성에 들어갈 때까지 따라다녔다.
왜 그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모두들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자말이 그의 저택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필립스도 서 있었다.
“영주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오, 자네 왔는가?”
자말은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회복제의 실험작이 완성되었습니다. 역병에 효과가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에 대한 행정적 처리를 부탁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필립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토록 기다리던 회복제가 만들어졌다니, 이토록 기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문득 엘런을 보니 곤란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엘런, 너에게 해 줄 말이 있다.”
필립스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들에게 제 이름이 알려졌나 보군요.”
필립스보다 선수를 친 것은 엘런이었다.
“알고 있었나?”
“저도 오는 길에 그들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도 한 일이기도 합니다.”
자말이 곤란한 듯 땀을 삐질 흘렸다.
“자네에게 정말 미안하네. 최대한 자네의 신원을 보호하고자 했는데, 어디서부터 소문이 새어 나간 것인지.”
엘런이 이곳에서 의료 지원을 하는 동안 그의 신원은 자말이 책임져 주기로 했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터질 문제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래도, 약이 만들어진 후에 터져서 다행입니다. 제가 할 말이라도 있겠군요.”
자말은 아직 말할 것이 남았는지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 말고도 더 있네. 자네에 대한 소문이 톤턴에 퍼지자마자 용병을 비롯하여 시민들이 성으로 몰려오고 있네. 필립스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온 것이었지.”
소문이 퍼지고 만 하루도 안 돼서 조직이 구성되고 행동이 시행된다. 누군가 개입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체들턴, 이놈들, 제대로 작정하고 나오는군.’
아직 심증밖에 없었기에 엘런은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디쯤까지 왔습니까?”
“지금 성문 앞에 있네.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미 성안에도 다 퍼진 것 같더군.”
“상관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리 말해 봤자 듣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직접 보여 주는 것이 제일 효과적이겠지요.”
필립스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엘런을 바라보았다.
“영주님, 하나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말해 보게나. 내가 미안한 입장이니 웬만한 걸 들어주겠네.”
자말도 엘런의 신원을 책임지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약의 사용에 대한 행정 절차. 바로 통과시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새로 개발한 약을 사용하려면 국왕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무분별한 엘릭서 제작이 이루어지면서 불량 엘릭서로 인한 피해가 커지는 바람에 생긴 법이었다.
이 허락을 받으려면 복잡한 절차를 통해 왕실까지 서류가 전달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 절차를 통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폐하의 허락이 없으면 약을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톤턴에서만 사용하는 거라면 또 다르지.’
비상시이며 톤턴에만 한정되는 조건으로 영주인 자말의 말을 곧 승인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
“알겠네. 그대의 능력은 익히 알고 있으니 내가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엘런은 그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곧바로 진료소로 달려갔다.
* * *
“그놈이 애초에 이 재앙의 주범이었던 거야.”
“그런데 그런 놈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다니.”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성문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분노의 대상은 바로 죽음의 역병의 원인인 엘런을 향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행한 재앙의 결과물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오.”
“그는 사람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 같은 놈이오.”
어디선가 들려온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이 동의를 외쳤다. 그러자 그 의견은 순식간에 집단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를 이곳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왜 온 것이냐?”
잔뜩 성이 난 사람들은 고작 경비병 2명이 막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톤턴은 용병 도시. 일반적인 민중이라고 해도 힘든데 우락부락한 용병들이 자신의 무기를 들고 찾아온 것이다.
성문도 격리소 물자 보급을 위해 열려 있는 상태였다.
그 때문에 경비병들은 그들이 성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저곳에 있소!”
한 남자가 격리소를 가리켰다.
“어차피 역병에 걸려 뒈질 거 마법 맞고 일찍 뒈지는 것도 괜찮을 거요.”
그들은 이미 죽음의 역병에 걸린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병은 손 쓸 시간도 없이 죽음에 이르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마법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잊어버릴 수 있었다.
“악마는 여기 톤턴에서 떠나라.”
“무슨 양심이 있어 이곳을 찾아왔는가.”
그들이 도착하자 이미 소문을 들은 격리소 내 환자들도 무리에 동참했다.
누가 보면 반란이 일어났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촤악.
맨앞에 서 있던 이가 격리소의 천막을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중증 환자들과 그에게 녹색 액체를 먹이고 있는 엘런이 있었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이오? 당신의 결과물이 어떤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온 것이오?”
그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쪼르륵.
하지만 엘런은 그의 말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알 수 없는 녹색 액체만을 환자에게 먹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그들의 기운과 대비되는 무섭도록 차분한 기운이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 보시오.”
분위기 싸움에서 진 것은 선두에 서 있던 사내였다.
“…….”
엘런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자가 또 이상한 약을 먹이고 있다.”
“이번에는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것이냐?”
성 밖에서부터 자극적인 말을 쏟아내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잠시 가라앉았던 시민들이 다시 끓어오르려 했다.
“이걸 보겠나?”
드디어 엘런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시민들은 그의 손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엘런이 녹색 액체를 먹이던 그 환자가 있었다.
“저, 저건……?”
선두에 서 있던 사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된 것이지?”
그건 시민들의 반응도 똑같았다.
“여, 역병이 낫고 있다.”
그의 몸은 온몸이 검게 물들었으며, 물집이 없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물집은 가라앉았고, 검게 죽어 버린 피부는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시민들은 마치 기적이라도 본 것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쪼르르.
엘런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 녹색 액체를 흘려 넣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과 똑같았다.
“아아…….”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감탄이었다.
“내가 병을 옮겼다는 소문을 들었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럴듯한 이야기였으니까. 나라도 그랬을 것 같군.”
엘런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모든 시민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선동을 하던 시민마저도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대들을 치료한 자는 누구인가? 나를 욕하려면 마음껏 해도 좋다. 그러다가 역병이 돋으면, 삶의 희망을 찾을 수 없게 되면, 그때 이곳으로 오면 된다. 나는 항상 이곳에서 치료제를 들고 기다리고 있겠다.”
엘런의 말에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격리소는 숨 막힐 정도로 차분했다.
쪼르륵.
그 상황에서 엘런은 옆에 있는 환자에게로 자리를 옮겨 녹색 액체를 흘려 넣었다.
적막함 사이로 퍼져 나가는 작은 소리. 그리고 그 소리가 일으키는 기적은 모두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죄, 죄송합니다.”
선두에 서 있던 사내였다.
그는 이번 역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탓에, 엘런에 대해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이던 자이기도 했다.
그가 사과하자 시민들의 분위기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앞에 일어나는 기적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자, 보다시피 회복제가 만들어졌다. 그건 다 이 베리타티 남작님 덕분이지.”
혼란스러워하던 그들을 휘어잡은 것은 필립스였다.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이분을 돕든가 아니면 이분의 도움을 받든가 둘 중의 하나를 해.”
그것이 기폭제가 되었다. 잔뜩 화가 났던 시민들은 엘런을 돕겠다며 나섰다.
그러니 자신에게도 약을 달라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툭.
필립스가 엘런의 어깨를 툭 쳤다. 그들이 자주 하던 인사법이었다.
“이게 보여 준다는 거였나?”
“이성을 잃은 군중들에게는 결과를 보여 줘야 하더군요.”
엘런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어쨌든 회복제도 만들어졌으니 이 망할 역병도 이제 끝이겠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놈들까지 전부 엮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