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28
128
이면 (1)
* * *
“베리타티, 자네 덕분에 톤턴을 집어삼켰던 역병의 마수에서 빠져나오고 있네. 톤턴의 모든 사람을 대표해 내가 감사를 표하네.”
자말이 엘런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예의상의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이 가득 담겨 있는 인사였다.
“아닙니다. 이것도 영주님의 허락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허허,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가?”
리버가 회복제를 만든 후, 역병이 퍼지는 것을 극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의 회복제는 몸에 즉시 작용하여 역병으로 썩어 문드러진 곳을 치료했다.
리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금의 약은 아직 시험작이라며 곧 완성품을 보여 주겠다고 선언하고는 연구실에 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금 약을 만드는 비용을 반 이상으로 줄이면서 효능도 더 높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톤턴에 국한되는 내용이었다.
아직 왕실의 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엘런이 얼른 아르곤을 보냈지만, 엘런이 직접 가는 게 아니라면 그들로서도 왕실에 곧바로 서류를 넣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다른 지역에서 톤턴으로 치료받겠다고 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네. 물론 나야 괜찮지만, 역병에 걸린 사람들이 옮겨 다니는 것은 자칫 병의 전염을 촉진할 수 있으니.”
자말의 말이 맞았다. 회복제를 구하기 위해 톤턴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역병에 걸린 사람들도 많았다.
최소한 그들을 간병하던 이들일 것이다.
그런 이들이 무리 지어 움직이면, 역병의 높은 전염성 때문에 다른 지역에도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얼마 후에 왕실 조사대가 도착한다고 하니 그들을 통해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엘런은 엄연히 개인의 신분으로 톤턴에 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국왕의 명을 받고 파견 나온 조사단이었다. 그들에게는 비상시에 행동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었다.
“그리고 영주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엘런의 표정이 진중해지자 그도 따라서 진중해졌다.
“영주님의 보고에 관한 것입니다.”
“보고?”
“영주님께서는 분명 역병 초기부터 이것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보고서를 올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처음 보았을 때는 아주 끔찍했네. 알다시피 시각적으로 증상이 확실하지 않은가?”
자말은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지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런데 그 보고서는 폐하에게까지 무사히 전달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는 분명 보고서를 보냈네!”
그는 책상에서 보고서의 초안을 꺼내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병의 증상과 그 심각성, 그리고 전염 속도까지 자세히 기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가 들었던 영주님의 보고서는 이것과 달랐습니다. 그곳에는 그저 약한 역병이 돌고 있다, 아직까지 특이사항은 없으므로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정도의 내용이었습니다.”
자말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럼 누군가 보고서를 중간에 바꿔치기했다는 말인가?”
“아마 그런 것으로 생각됩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자말은 권력에 욕심이 없는 자였다 톤턴이라는 척박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영지를 노리는 사람도 없었다. 평생 적이라고는 두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제부터 그걸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영주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러도록 하게. 나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네.”
역병의 치료라는 당장 급한 불을 껐다.
이제는 이 끔찍한 일에 대한 응징만이 남았다.
‘체들턴, 너희들이 무덤을 직접 팠구나.’
* * *
일주일 후, 톤턴의 역병이 거의 잡혔을 때쯤 왕실 조사대가 도착했다.
그들은 멀쩡히 걸어 다니는 시민들의 모습에 놀랐다. 말로 전해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고 어떤 이는 이건 휴가와 다름없다며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독 조사대장만은 임무가 사라졌다며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이번 남서부 지역 역병 사건의 조사대장 코레이입니다.”
광택이 나는 갑주와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장식이 많이 들어간 검, 화려한 무늬의 망토.
그 행색만 보아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엘런 베리타티라네.”
그들은 자말이 내준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프로드의 영웅! 직접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코레이의 표정은 동경하던 사람을 만났을 때의 그것이었다.
“반갑네.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이렇게 바로 업무를 시작해도 되는 건가?”
“저는 조사와 의료지원의 임무를 받고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기사된 자로서 명령의 수행이 가장 먼저가 아니겠습니까.”
조사대가 도착한 것은 불과 5시간 전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코레이는 임무 지시에 들어갔다.
덕분에 먼 길을 오느라 지친 조사대는 짐만 풀어놓은 채, 곧바로 자신들의 임무에 들어갔다.
물론 회복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할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격리소와 회복제에 입을 벌리고 감탄만 남발하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코레이 만큼은 달랐다. 당장 치료제를 만든 사람을 찾아야 한다며 이곳저곳 돌아다니더니, 이렇게 엘런의 눈앞에 앉아 있다.
‘기사도와 명예 같은 것으로 똘똘 뭉친 건가?’
엘런이 어려워하는 부류였다. 일말의 융통성도 기대하기 힘든 그런 자들.
“회복제가 만들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자네가 봤던 대로라네.”
“그 약의 효능은 직접 확인했는데, 부작용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엘런의 클론을 이용해 수도 없이 시험했었다. 그 회복제가 가진 부작용은 일반적인 수준의 약들과 비슷한 정도라고 했다.
“그렇습니까?”
엘런이 그 사실을 말해 주자 코레이는 그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그 후로도 비슷한 조사가 계속되었다. 대부분 회복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회복제를 남서부 지역 전체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엘런 님에 대한 왕실 조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이곳까지 오시면서 소문은 몇 번 들으셨을 겁니다. 거기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는 게 저희의 의견입니다. 왕실의 의견이기도 하고요.”
발 벗고 나서서 역병의 소굴까지 들어온 엘런이었다.
그런 그에게 피의자로서 조사를 논하려면 태도가 조심스러워질 만도 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그의 파란색 눈은 왕의 명령이니 잔말 말고 따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알겠네.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엘런도 별말 없이 그의 의견에 따랐다.
사실 회복제가 만들어지고 시민들을 진정시킨 이후로, 이곳에서 당장 엘런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가빈을 통해 정보를 모으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무엇보다 당장에 왕실로 돌아가 봐야 할 이유가 있었다.
회복제가 만들어지자 엘런은 곧바로 가빈을 톤턴으로 불렀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그보다 더 적합한 인물은 없었다.
엘런과 가빈은 자말에게서 들은 말을 토대로 정보를 수집했다. 그저 전령의 행적만 따라가면 되는 작업이라 난이도가 높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게 아니지.’
조사의 결과물이 믿을 수 없게 나왔다. 엘런으로서는 예상도 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공주님께서 이 일에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증거가 너무 많습니다. 아직 확실한 물증을 잡은 것은 아니지만, 정황 증거만으로도 충분히 의심을 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틀 전 보고에서 가빈이 엘런에게 했던 말이다.
세르넬 공주가 이런 일을 벌일 것이라고는 정말이지 생각도 못 했다.
그녀가 왕위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서자임에도 로미우 대신 왕에 오를 재목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능력도 인정받았다.
게다가 그녀가 국무 회의에서 내는 정책.
그것들은 친귀족적이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백성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총명했던 그녀가 이런 짓을 벌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믿을 수가 없었다.
‘왕위가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건가?’
엘런은 공식적으로 로미우의 세력이었다.
로미우보다 프로드의 영웅인 엘런을 보고 로미우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기도 했다.
세르넬은 그런 엘런을 견제하기 위해 죽음의 역병을 퍼뜨렸다. 어떤 이유가 있든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확실한 물증이 필요하다.’
일국의 공주가 저지른 끔찍한 일이었다.
이것을 문제 삼으면 비단 공주의 과오로 끝나지 않고 왕실 전체의 문제로 커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 그녀를 잡기 위한 확실한 물증이 필요하다.
“당장 마차를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엘런은 코레이의 말에 현재로 돌아왔다.
“당장?”
“바로 출발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코레이는 문제가 있을 정도로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자였다.
“나도 짐을 챙길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출발하시기 전에 따로 말씀해 주십시오.”
엘런으로서는 도무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성격이었다.
“조사가 끝났으면 난 격리소로 가 보겠네. 거기서 바로 출발하도록 할 테니 마차를 부탁하네.”
* * *
격리소에서 모두와 인사를 나눈 엘런은 곧바로 해리 포드로 출발했다.
조사대에서는 의외로 좋은 마차를 준비해 주었다. 그 덕에 엘런과 리버는 금방 해리포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의 행보는 실로 믿을 수가 없다.”
엘런을 바라보는 알베르토의 눈은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남서 지역의 역병이 갑자기 심해질 것을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인가? 경의 선견지명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군.”
알베르토는 원래 심하지 않았던 역병이 갑자기 세력을 넓힌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로채기 한 보고서의 내용이 그럴듯하게 끼워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소신은 그저 역병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여 갔던 것뿐입니다. 병의 확산을 막은 것은 그저 시기가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엘런은 공주가 끼어 있는 사건인 만큼 신중해지기로 했다.
“남서 지역은 조사대가 알아서 할 것이고, 얼른 경이 만든 회복제를 전국에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
이미 역병이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는 상황.
근심이 크던 알베르토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엘런이 나타나 모든 일을 해결해 주었다.
어느 누가 그를 보고 프로드의 축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성은이 망극합니다.”
“그래, 그리고 소문에 대한 진상 조사는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어느 시대나 잘난 자를 깎아내리려 하는 자들은 있는 법이니. 아마도 왕실과 경을 모함하려는 자들의 짓이겠지.”
그것은 형식적인 조사만 몇 번 하다가 끝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오히려 엘런을 위한 축하 파티를 계획하고 있었다.
“회복제도 있으니 역병이 끝나는 대로 경을 위한 축하 파티라도 열겠다.”
“저는 신하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폐하의 마음만으로도 망극합니다.”
엘런의 말에 알베르토는 허허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래, 그건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경도 여독이 쌓였을 텐데 도착하자마자 고생이다. 돌아가 보아도 좋다.”
“예.”
알베르토와의 알현을 마친 엘런은 대전에서 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곳은 세르넬의 방이 있는 방향이었다.
공주의 방은 대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원래 왕궁의 가장 왼쪽에 있었는데 세르넬이 고집을 피워 대전과 가까운 곳으로 옮긴 것이었다.
“공주님께 용무가 있으십니까?”
세르넬의 방문을 지키고 있던 하녀가 말했다.
“엘런 베리타티가 찾아왔다고 전해 주겠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