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29
129
이면 (2)
* * *
“뭐라고? 엘런, 그자가 왔다고?”
자신의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세르넬이 깜짝 놀랐다.
“얼른 들어오라고 해라.”
텁.
그녀는 방금까지 읽고 있던 『통치의 역사』를 덮었다. 그러고는 곧장 거울로 달려갔다.
‘어째서 온 걸까?’
세르넬은 머리를 정돈하며 생각했다. 어쩐지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케니프라에서 돌아온 이후로 엘런이라는 말만 들으면 이런 상태였다.
연회장에서 그를 보았을 때도 혹시 자신의 이런 상태가 들키지 않을까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왕이 되는 꿈을 꿀 때도 자신의 옆에는 항상 엘런이 있었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르넬은 얼른 자리로 돌아가 읽고 있던 책을 펼쳤다.
“세르넬 공주님, 엘런 베리타티 남작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엘런의 목소리가 들리자 콩콩거리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 열기는 온몸을 타고 돌았다.
끼익.
“프로드의 꽃을 뵙습니다.”
“반가워요, 베리타티 경.”
세르넬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붉어진 얼굴이 가라앉질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내 방까지 찾아왔나요?”
세르넬은 무심한 듯 말했지만,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너무 무심하게 말했나? 조금 더 발랄하게 말했어야 했나? 아, 그가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많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지금까지 왕위에 오르겠다며 책과 검만을 가까이하고 살았다.
그런 그녀에게 이런 건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걸 고민하는 것이지?’
고민에 빠진 세르넬과는 달리 엘런은 그녀의 반응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공주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쿵쾅쿵쾅.
심장 소리가 엘런에게 들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소녀의 방에 개인적으로 찾아와 긴히 드릴 말씀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어린 시절 호기심에 잠깐 읽어 보았던 소설이 생각났다.
한 장면을 떠올린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잠깐만. 일단 여기에 앉아서 이야기하세요.”
세르넬은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그에게 의자를 건넸다.
“공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자, 그럼 이제 말해 보세요. 그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이지요?”
그녀는 침을 꼴딱 삼키고는 그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다 문뜩 자신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인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어 얼른 시선을 돌렸다.
“어째서 그런 짓을 저지르셨습니까?”
“…….”
세르넬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그녀는 겨우 입을 떼서 엘런의 말에 대답했다. 하지만 밖으로 표출된 그녀의 말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공주님. 어째서 역병을 푸신 겁니까? 그것도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세르넬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설마 누군가 그걸 알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엘런의 입에서 그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증거는 있나요? 설마 증거도 없이 왕족을 능멸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왕위는 영원히 멀어지게 될 것이다. 아니, 왕위는 둘째 치고 자신의 목숨마저 보장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욱신.
엘런의 경멸스러운 눈빛을 보자 그녀의 가슴이 아려왔다.
“빈스. 그가 저에게 모두 말했습니다.”
“빈스라……. 저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군요.”
세르넬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눈을 보면 절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은 눈이었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엘런의 눈에는 오히려 그녀의 눈빛이 더 가증스러웠다.
“이걸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꺄악!”
결국, 그녀는 속에만 맴돌던 비명을 입 밖으로 꺼내 버렸다.
“그대가 어떻게 그것을…….”
그것은 일종의 지령서였다.
거기에는 중간에 보고 내용을 바꿔치기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물론 자신의 인장이 찍힌 것도 아니었다.
글씨체야 조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당장은 시치미를 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결국에 이 종이를 조금만 조사해 보면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라는 걸 밝혀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마법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 지령서를 읽는 즉시 태우라고 말했던 것이다.
“공주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원래 뒷거래를 하는 놈들은 다들 자신만의 보험을 들어 둡니다. 공주님은 그 종이를 태워 버릴 것을 지시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걸 곧이곧대로 듣지는 않습니다.”
엘런은 뒷거래를 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까운 사례만 떠올려 보더라도 제5군의 사베가 있다.
그는 분명 공주의 지령을 받은 자들도 만약을 위해 남겨놓은 것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말의 전령들을 하나하나 직접 찾아갔다.
예상대로 그들 중 하나가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독박 쓰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의 지령서를 모으고 있었다.
그런 자들의 생리를 알 턱이 없는 세르넬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왕족인 자신의 명령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충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모든 것을 알았겠네요.”
미친 듯이 뛰던 세르넬의 심장이 이제는 차갑게 식었다.
“그렇습니다.”
엘런의 말에 그녀의 고개가 축 처졌다.
“그럼 이제 그대는 나를 어떻게 할 건가요? 역시 아바마마께 모두 말씀드릴 건가요?”
그녀의 너털웃음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긴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대는 오라버니의 최측근이니. 내가 없어진다면 오라버니는 당연히 왕이 될 수 있겠지요. 나 같아도 그럴 거예요.”
엘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아니지. 차라리 나한테 오는 게 어떤가요? 그런 우유부단한 오라버니 따위는 내쳐 버리세요. 과연 프로드에 필요한 왕이 누굴까요? 네?”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내가 국왕이 된다면 그대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걸 해 줄게요. 그대 역시 이 나라에 꼭 필요한 재목이잖아요. 그러니까 정식으로 제의할게요. 지금이라도 나와 함께 가요.”
그런 말을 하는 세르넬의 모습은 추하기 그지없었다.
일국의 공주가 무릎을 꿇은 채 귀족의 바짓단을 붙잡고 애원하고 있었다. 엘런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다! 그냥 여기서 죽을래요. 차라리 나를 죽여 주세요. 나는 도저히 내가 저지른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억울한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녀로 역사책에 남을래요.”
그녀의 눈동자는 반쯤 뒤집혔다.
“으히히히히!”
그녀의 입에서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보아도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었다.
-이거 상태가 심각한 것 같은데.
비정상적인 존재인 리치마저도 그녀의 상태를 정상으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제가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놈들이 뭔가 장난을 친 듯합니다.’
사락.
그는 무릎을 굽혀 헝클어진 세르넬의 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그러자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뚝 멈추었다.
“공주님.”
“응?”
세르넬은 넋이 나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탁.
그의 손이 그녀의 이마를 덮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샤클, 스캔.’
엘런의 마나가 그녀의 몸을 옭아맸다.
그제야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그녀가 몸을 움직였지만, 이미 속박당한 뒤였다.
‘이건가?’
그의 감각에 감지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꽤 깊은 심상 속에 있어서 한 번에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중첩된 스캔 마법은 그렇게 깊은 곳에 숨겨진 마법마저 찾아낼 수 있었다.
거기엔 두 개의 마법이 걸려 있었다. 하나는 정신력을 무너뜨리는 마법이었고 또 하나는 최면 마법이었다.
‘대충 견적이 나오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체들턴 놈들의 계획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거 놓으세요! 감히 왕족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경비병을 부르겠어요.”
그녀가 발버둥을 치며 저항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달려오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엘런은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사일런스 마법을 걸어 두었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스륵.
툭.
엘런이 마법을 풀자 세르넬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하아. 하아.”
그녀는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요즘 체들턴가와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 아닙니까? 그자들은 가까이하기에 너무 위험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나의 재목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어요. 아바마마의 서자에 불과한 나를 인정해 준 이들은 그들밖에 없었어요. 그런 그들과 친해지지 않을 수가 있나요?”
그녀는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엘런의 말에 또박또박 반박했다.
“그대도 결국에는 혈통에 따라 오라버니를 선택한 것이잖아요. 그런 사람이 나의 지지자들에게 나쁜 소리를 하다니요. 그들은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엘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마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공주님, 언제부터 체들턴이 공주님을 지지했습니까?”
아주 쉬운 질문이었다. 세르넬은 그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답변하려 했다.
“그, 그건…….”
하지만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그들이 언제부터 자신을 지지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처음부터였는지 아니면 최근부터였는지 또렷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그들은 언제부터 공주님을 지지했습니까?”
체들턴 가문은 혈통에 대한 병적인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다.
애초에 그런 가문에서 혈통의 정통성 따위는 없는 세르넬을 인정할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그들은 공주님을 철저히 무시했을 텐데요.”
세르넬은 머리가 아파졌다. 누군가 수천 개의 바늘로 그녀의 머리를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녀가 잊고 싶었던 몇 개의 장면들을 떠오르게 했다.
‘그녀는 왕실의 위상을 뒤흔드는 존재입니다. 프로드 왕실에서는 단 한 번도 정통성에 어긋나는 혈통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외국으로 보내 버려야 합니다.’
탑주인 루이스 체들턴이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악!”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니야, 그들은, 그들은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녀는 충돌하는 기억을 잠재우기 위해 계속해서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이미 저렇게 깊이까지 걸려 있는 최면은 캔슬레이션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네가 탑주보다 월등히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니.
프로뱅의 말대로 캔슬레이션은 자신보다 낮거나 비슷한 수준의 마법을 해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법이 저토록 깊이 침투해있다면 비슷한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마도왕국 프로드의 탑주가 건 것으로 예상되는 마법.
즉 프로드뿐만 아니라 대륙에서 이 마법을 해제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히는 수준이었다.
‘저에게는 캔슬레이션이 말고 다른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엘런은 그 손에 꼽히는 마법사였다.
엘런은 자신의 손을 그녀의 머리에 얹었다.
‘마나 드레인.’
그의 개량된 마나 드레인. 이미 네트의 혈마법까지도 빨아들인 이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르넬의 심상 깊숙이 박혀 있는 마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마법들은 어떻게든 버티려 했지만, 무지막지한 흡입력 앞에 힘없이 빨려 들어왔다.
“내가 지금 무엇을…….”
세르넬은 갑자기 머리가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방에 잔뜩 껴 있던 먹구름이 사라지고 햇빛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같았다.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엘런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