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30
130
이면 (3)
* * *
“이, 이게 무슨 짓인가요?”
세르넬은 깜짝 놀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에서 더 이상의 광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반응을 보니 정신이 드신 것 같습니다.”
“정신이 들었다는 게.”
그녀는 벽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의 바로 앞에 있던 엘런의 얼굴이 생각나 그를 쳐다보고 있을 수 없었다.
“체들턴 가문. 그들과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체들턴. 그 이름을 듣자 갑자기 셀 수 없이 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먹구름 뒤편에 있던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아아.”
그 기억에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도 있었다.
밤만 되면 치밀어 오르는 짜증 때문에 화를 냈던 모습, 그때마다 했던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 하녀들에게 행한 몹쓸 짓, 그리고 자신이 풀어놓은 역병.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그것은 엘런에게 묻는 것이 아니었다. 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순간 했던 말까지 모두 기억났다.
“저희가 공주님을 프로드의 국왕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고센과의 첫 번째 전쟁이 끝나고 전후 복구가 한창일 때, 올란도가 자신을 찾아와 무릎을 꿇었다.
“당신들 지금까지 내가 서자라며 왕실의 전통을 깨뜨렸다고 하지 않았나요? 왜 인제 와서 이러는 거죠?”
당연히 의심했었다. 자신의 자질을 인정받고 있을 때도 끝까지 로미우의 정통성을 지지하던 자들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의 손이 자신의 눈을 가려 버렸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의식, 어디론가 옮겨지는 느낌, 언뜻 보였던 탑주의 모습, 그리고 그의 손에서 번뜩였던 빛, 그때부터는 쭉 먹구름에 갇혀 있었다.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면서도 통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였다.
그들이 시키지 않을 때라면 자율권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도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졌다.
‘그것은 나의 본심이었을까?’
자신은 분명 아버지인 알베르토를 원망했다.
좋은 혈통을 타고나 능력이 없음에도 왕위를 잇게 되는 로미우가 원망스러웠다.
서자라는 이유로 차별받던 이 왕실을 원망했다. 하지만 원망스러웠을 뿐 그들을 파멸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인정받고 싶었다.
‘그게 아니었던 건가.’
단 한 번도 로미우에게 뒤처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마저도 로미우의 혈통 덕분이었다. 정통성이 있는 그에게 왕위를 주고 싶었던 아버지가 그에게 엘런을 붙여 주면서부터이다.
그가 이룬 것 중 단 하나도 그가 정통성이 있는 왕족이라는 이유가 아니었던 것이 없었다.
오히려 아무런 지원도 없이 독학으로 대신들과 정사를 논할 수준이 된 자신이 더 왕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그들에게 저질러서는 안 될 일을 저질러 버렸어.’
주룩.
눈가를 타고 뜨거운 액체가 흘렀다. 처음엔 한 방울, 두 방울, 그것이 한 줄을 이루었다.
국왕의 자격 3페이지, 국왕은 남들 앞에서 쉬이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275페이지, 국왕이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다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국격을 떨어뜨리는 행위이다.
그녀가 수없이 읽어 왔던 책 내용이 떠올랐다.
자신의 모든 행동거지를 관장하던 책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내용은 아무런 제약도 발휘하지 못했다.
“어흑.”
자신의 눈물은 지금의 감정을 모두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엘런은 그런 그녀의 주위로 사일런스 마법을 걸어 주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섰다.
얼마나 더 울었는지는 엘런도 알지 못했다.
마음이 진정된 그녀가 사일런스의 범위 밖으로 나올 때까지 엘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베리타티 경.”
여전히 목소리는 먹먹했지만, 감정은 추스른 듯한 그녀였다.
“말씀하십시오.”
“저는 그 후의 상황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곳은…… 끔찍했겠지요?”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끔찍했습니다. 모든 피부가 괴사하여 온몸이 썩어 문드러져 있었습니다. 흉측한 물집에 뒤덮인 사람들의 앓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진물은 바닥에 고일 정도였습니다.”
“흡.”
엘런의 묘사를 들은 세르넬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더는 울 수 없었다. 아니, 울 자격이 없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누군가의 욕심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것도 왕이 되기 위해 나와 왕실을 견제하겠다는 하찮은 이유이지요.”
세르넬은 고개를 떨궜다. 엘런의 말이 모두 맞았다.
“그리고 그 욕심은 한 소녀의 꿈마저 처참하게 짓밟았습니다.”
“네?”
그녀의 눈이 엘런의 눈을 향했다. 그의 갈색 눈동자에서는 금방이라도 분노가 흘러내릴 것 같았다.
“공주님, 당신은 분명 역병을 푼 장본인입니다. 당신에게 고통받은 하녀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입니다.”
분명 엘런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그 화는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신은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그 하찮은 욕심의 피해자. 그놈들은 제가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체들턴, 프로드의 암적인 존재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가장 먼저 사용했어야 했던 놈들. 이미 늦었지만, 그렇다고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공주님, 그놈들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를 저에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어요.”
세르넬은 자신이 아는 모든 이야기를 그에게 털어놓았다.
* * *
콰아앙.
“오셨습니까?”
“왔어?”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이야?”
집으로 돌아온 엘런은 여태까지 화가 잔뜩 나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저택 식구들은 하나같이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저 자식 왜 저러는 거야?”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여자한테 차이기라도 한 건가?”
“그런 분노로 보기에는 상태가 다른 것 같네.”
그들은 쭈뼛쭈뼛 엘런에게 다가갔다. 어쨌거나 이 저택의 주인은 엘런이었고, 그의 기분은 저택의 중요 요소 중 하나였다.
성질이 더러운 리버마저도 이번에는 몸을 사리고 있었다.
“야, 엘런 괜찮은 거야? 무슨 일이야?”
킨버의 물음에 엘런이 몸을 홱 돌렸다.
“가빈, 카빈 어디 있어? 아니, 저택 식구들 다 모여 봐. 상의할 게 있어.”
“알겠어. 야야, 카빈! 너희 형 좀 불러와.”
그때부터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후, 엘런의 때 아닌 소집으로 저택의 모든 사람이 식탁에 모이게 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침묵을 깬 것은 가빈이었다.
모두 엘런을 바라보았다. 원래, 한 번도 화낸 적이 없는 사람이 진심으로 화를 낼 때가 가장 무서운 법이다.
그리고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미안해,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잠시 흥분했었어.”
엘런이 한숨을 한번 내쉰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체들턴 가문 놈들 이야기인데, 내가 이놈들에게 쌓인 게 한둘이 아니거든.”
엘런과 체들턴가의 이야기는 꽤 역사가 길었다.
40여 년 전 있었던 회귀 전부터 이어져 왔다. 자신을 ‘노력충’이라 부르며 무시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까지 이들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나에게 누명을 씌워 에니스로 보내 버린 것, 내 부모님으로 나를 협박한 것, 역병을 퍼뜨려 많은 사람을 죽게 한 것, 왕녀에게 최면을 건 것까지 아주 많아.”
그들은 나열된 것들에 치를 떨었다. 악연도 저런 악연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놈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보내 버리려고 해.”
엘런의 분노에 반응한 제피로스가 열풍을 불어 댔다.
그 덕분에 식당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가빈, 카빈.”
“예.”
“아르곤을 총동원해서 그놈들이 한 짓의 증거를 끌어모아 줘. 내가 말한 것들 말고도 뭐든지 좋아. 그놈들 비리와 관련된 거라면 가리지 말고 전부 부탁해.”
“예.”
가빈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벌써 머릿속으로 모을 정보를 구상하고 있었다.
“킨버, 요즘 마정석 거래하면서 마탑과도 거래를 텄지?”
“그렇지?”
“거기에 체들턴 놈들이 수를 쓰고 있는 게 있을 거야. 그쪽 관계자들에게 이야기를 들어 줘. 아무래도 마탑 내부 정보는 아르곤에서도 구하기 힘드니까.”
“알겠어.”
킨버가 맡겨만 두라며 가슴을 두드렸다.
그의 최대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친화력이었다.
마탑과 거래를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그와 친해진 관계자들이 꽤 많았다.
“그루트. 자네는 자네의 연구실에 무단으로 침입한 자들이 있다고 했었지?”
“한창, 마나 소드의 시험작을 만들 때였습니다.”
침입한 자가 누구인지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소문이 나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그 녀석들을 잡지 않았다. 그루트의 검은 설계도를 본다고 해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럴 때 쓰려고 아껴둔 거 아니겠나? 지금 터뜨릴 걸세. 그때 정리해 둔 피해자료 있나? 그것 좀 보내 주게.”
“예,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루트는 곧바로 연구실로 걸어갔다. 엘런의 눈은 마지막 한 사람을 향했다.
“영감님.”
“나한테도 시키려고? 나는 네 복수극 같은 거 관심 없다.”
리버는 복잡한 일을 딱 질색이라며 두 손을 저었다.
“알겠어, 영감님에게까지 시킬 수는 없지.”
엘런이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리버가 그의 손을 잡았다.
“잠깐, 너는 어떻게 젊은 놈이 인내심이 그렇게 없냐? 적어도 세 번은 잡아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아니, 굳이 영감님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리버가 그의 손등을 때렸다.
“나도 그놈들 하는 짓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러니까 도와줄게. 말해 봐.”
“그런 거야? 그럼 역병 조사하면서 나왔던 정보 좀 정리해 줘. 그놈들이 개입한 흔적이 있는 곳 위주로 해서 말이야.”
“알겠다. 내가 확실하게 해서 보내 주지.”
연구실로 달려가는 리버는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엘런의 복수보다는 자신의 즐거움이 더 큰 이유인 듯했다.
‘이것들만 모이면 네놈들 세상도 이제 끝일 거다.’
식당에 혼자 남은 엘런은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지긋지긋했던 체들턴과의 인연을 끊어 버릴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엘런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다시 식당으로 들어왔다.
“엘런 님.”
“왜 그래?”
가빈과 함께 식당을 나갔던 카빈이 돌아와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그게…….”
카빈의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나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창밖을 가리켰다. 엘런의 눈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저건?”
해리포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한 마차였다.
하지만 엘런은 그 마차가 누구의 것인 줄 알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왕자님?”
그것은 로미우가 잠행을 나올 때 타고 다니던 마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