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31
131
죗값 (1)
* * *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아닙니다. 안 그래도 왕자님을 뵈러 갈 참이었습니다.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로미우의 표정은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그는 계속 뭔가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기를 반복했다.
“엘런, 네가 조금 전에 공주를 만나고 갔다는 소리를 들었어.”
그러다 그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예,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와의 알현을 마치고 공주님을 찾아갔었습니다.”
“나는 그 직후에 세르넬을 찾아갔었어.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나가 있는 것 같았어.”
그의 표정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공주가 이번 역병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니지?”
항상 생각해 오던 것이었다.
의심스러운 정황이 너무나 많았다.
애써 무시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늘 보았던 그녀의 표정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맞습니다.”
엘런의 말은 그에게 결정타였다. 그는 애써 외면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아이가 정말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단 말이야?”
로미우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금색의 머리칼이 쥐어뜯기며 헝클어졌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아, 이건 다 나의 책임이다. 내가 그 아이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인 거야.”
엘런을 만나면서부터 로미우는 자신감을 찾고 정책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평소 쌓은 지식 덕분에 능력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자 여론도 정통성이 있는 자신에게로 움직이려 했다.
그녀는 그것을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예전부터 인정받는 것에 사활을 걸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귀족들의 여론은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다 손을 대서는 안 될 곳까지 손을 뻗어 버렸다.
“그 아이에게 숨 쉴 구멍이라도 줬어야 했는데.”
그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자책하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엘런, 너라면 가능하지 않아?”
거기에는 일말의 희망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 나왔다.
“무엇을 말입니까?”
“물론 그 아이가 저지른 죄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거야. 하지만 아바마마가 이 일을 계기로 그 아이를 완전히 내칠 수도 있어. 이런 일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철저한 분이신 거 너도 알잖아.”
로미우의 표정은 엘런이 그를 처음 만났을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우유부단함과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가득 차 있었다.
“제발 부탁할게. 내 동생을 어떻게 좀 해 줘. 엘런, 너라면 할 수 있잖아.”
엘런은 지금까지 쌓아 왔던 것이 한 번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저보고 공주님을 살려 달라는 뜻입니까?”
“맞아! 엘런이잖아. 이런 것쯤은 거뜬히 해낼 수 있는 프로드의 영웅!”
“후우.”
저 밑에서부터 올라온 깊은 한숨이 엘런의 입으로 빠져나왔다.
“왕자님, 지금 그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한겨울의 눈보라보다도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로미우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던 그의 눈에서 눈물이 순식간에 메말라 버렸다.
“엘런…….”
“공주님이 저지른 죄는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죄입니다. 만약 회복제가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공주님이 풀어놓은 역병은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는 어떠한 흥분도 없었다.
말의 높낮이마저도 무섭도록 일정했다. 너무나 일정해서 살아 있는 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왕실특무대가 이미 조사를 나갔습니다. 그들이 조사를 시작했으니 아마 답이 금방 나올 겁니다. 그건 왕자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왕실특무대의 정보력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이 투입돼서 찾아내지 못한 진실은 거의 없었다.
“이 일은 국왕 폐하께서 두 손 걷고 나서도 덮기에는 모자랍니다. 그런데 폐하의 태도까지도 확신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렇지.”
로미우도 점점 이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제가 공주님의 이야기를 전부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판단은 왕자님께서 다시 해 주십시오.”
엘런은 그녀가 겪었던 일을 그에게 모두 말해 주었다.
총명했던 그녀가 대체 왜 이상하게 바뀌게 되었는지,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엘런이 추측한 그들의 목적까지도 전부 말해 주었다.
“…….”
사람의 머리는 많은 정보를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인간의 머리도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할 진실이 있다.
로미우가 지금 바로 그 상태였다.
“어떻게 사람 가죽을 쓴 자가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단 말이지?”
그에게서는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분노가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프로드 왕국의 신하라는 자들이, 프로드 왕국의 두 기둥이라는 자가!”
쾅.
로미우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야!”
로미우의 눈이 엘런을 향했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그의 모습이었다.
“그 아이는 나 때문에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던 아이였어.”
그 속에 가득 찬 눈물도 아까와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무섭다는 핑계로 그 아이에게 다가가지 않았어. 그리고 그게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어.”
그가 엘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런,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나는 꼭 그 아이를 살리고 싶어.”
마냥 도와 달라며 징징거리는 애가 아니었다.
이제 그의 눈에는 어떤 의지가 서려 있었다. 엘런은 그런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엘런은 사실 공주의 방에서 나올 때부터 그녀를 살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녀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었지만, 그건 그녀가 아닌 체들턴의 잘못이 훨씬 컸다.
그녀가 치를 죗값은 딱 그녀의 잘못 만큼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엘런은 왕실을 나와 저택까지 오는 내내 그녀를 구출할 방법에 대해서 생각했다.
“진짜 그런 방법이 있어? 그게 뭔데? 나도 도울 수 있으면 적극적으로 도울게.”
“그 방법은…….”
엘런의 말을 들은 로미우는 도무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을까? 그렇게 해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아, 일의 성공 확률은 믿어 주셔도 됩니다. 제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어차피 로미우는 이 무모한 도전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먼저 왕자님께서 공주님의 의사를 물어 주시겠습니까?”
아무리 그녀를 구한다는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본인의 동의가 없이는 시행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알겠어, 준비되면 내가 왕실에 있는 아르곤에게 신호를 보내도록 할게.”
그의 말에 엘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정보수집론이라는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어.”
엘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자가 전부는 아닐 겁니다.”
“하아, 그건 몰랐는데. 아무튼, 알겠어. 난 지금 바로 출발해 볼게.”
* * *
프로드 왕궁.
그곳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적의 침입을 허용한 적이 없는 철옹성이었다.
높은 성벽과 마법 감지 결계가 사방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성벽 위까지도 경비병들에 의해 24시간 감시되는 곳.
그랬기에, 허가받은 자가 아니고서야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곳에 올라와 있는 게 가장 의미 없는 일이라니까? 어차피 마법을 쓰면 경보가 울릴 거고, 아니면 뛰어 올라와야 하는데, 상식적으로 여기를 누가 뛰어넘을 수 있냐?”
성벽의 위를 지키고 있던 병사 하나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 같은 이들은 성벽을 훌쩍 넘어 다닌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키는 덕에 왕궁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선임병은 후임병을 아니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이건 그냥 우리가 노는 게 꼴 보기 싫어서 세우는 거라고. 내가 지금까지 여기서 몇 년을 있었는데 개미 새끼 하나도 못 봤다.”
철퍼덕.
선임병은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았다. 후임병은 그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차피 우리 시간 동안 순찰도 안 오고, 적당히 여기 앉아서 눈 붙이고 있으면 다음 근무자 올 거다.”
그는 말과 동시에 눈을 붙였다.
쩌저적.
그리고 그들은 갑자기 어디선가 불어온 냉기에, 통째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 성벽 일대에 서 있는 모두가 똑같은 상태였다.
휘이잉.
그곳에 한 그림자가 보였다. 달빛이 어두워서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놀라운 건 그가 성벽 높이만큼 떠올라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자가 마법사라면 현실성이 있는 광경이었다.
레비테이션이라는 마법이 있기 때문에 그걸 이용한다면 누구든지 공중부양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실시간으로 마법 반응에 경보하는 결계가 있는 곳.
결계가 아무런 특이반응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높이 점프를 했다고도 볼 수 없었다.
그는 계속 공중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탁.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벽에 안착했다.
그곳은 경비병들이 24시간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림자를 보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마법 결계가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법이 아니었다.
만약, 이것이 마법이었다면 왕궁 전체가 떠나갈 만큼 큰소리의 경보음이 울렸을 것이다.
‘이쪽인가?’
그는 궁의 내부를 한 번 살피고는 곧바로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그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에도 그의 몸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딱.
성벽 중간 정도까지 떨어졌을 때, 그림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영문도 모른 채 얼어 있던 그들의 몸이 녹아내렸다.
“으으, 오늘은 왜 이렇게 으슬으슬한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아직 여름인데. 밤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이놈의 경비대 나가든가 해야지. 넌 거기 계속 서 있을 거냐? 너도 옆에 앉아. 이런 거 열심히 하는 놈들만 손해인 거야.”
그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잡담을 이어 나갔다.
그사이 그림자는 왕궁 내부로 숨어들었다.
경비가 외부에 집중되어 있는 탓에 내부는 비교적 수월했다. 경비병의 수도 적었고 무엇보다 은폐물이 많았다.
그림자는 왕궁을 아주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도착했군.’
그는 한 창문 앞에 섰다. 창문 안에서는 세르넬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릭 체들턴이 보였다.
그녀는 마법이 풀린 후로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눈만 감으면 그들의 절규가 들렸다.
하지만 체들턴이 찾아올 때면, 여전히 마법에 걸려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알겠어요.”
릭은 세르넬에게 인사를 한 후 문밖으로 나섰다.
“후우.”
그가 나가자 세르넬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놈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 자체도 그녀에게는 고역이었다.
똑똑.
그때 창밖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놀란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왔군요.”
오히려 그 창문을 열어 주기까지 했다.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요, 베리타티 경.”
그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엘런이었다.
그는 공주에게 격식을 차려 인사를 했다.
“왕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시러 왔습니다.”
“네, 이미 이야기는 다 들었어요.”
세르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의 준비는 다 하셨습니까?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네, 나는 평생 그들에게 죗값을 치르면서 살고 싶어요. 그런 나에게 이런 것들은 사치에 지나지 않아요.”
그녀는 미리 챙겨 놓은 짐을 꺼냈다.
옷 몇 벌과 생필품 몇 개가 전부인 간소한 짐이었다.
“그럼 가시겠습니까?”
“아, 잠시만요.”
그녀는 다시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거기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그 책에는 국왕의 자격이라고 쓰여 있었다.
몇 번을 읽었는지 책에는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엘런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이것도 미련이겠지요?”
툭.
그녀는 그 책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제 됐어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를 들어 올린 엘런은 창밖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리고 공주의 방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