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33
133
죗값 (3)
* * *
“그루트의 연구실에 침입한 정황은 레오나드의 단독 소행이어서 체들턴을 끌어들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또한, 킨버가 알아온 것 역시 결정적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가빈의 보고를 들은 엘런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역시 뒷정리도 철저하게 해 놓은 모양이야.”
그들은 양지에서든 음지에서든 모든 일을 철저하게 처리해 놓았다.
그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를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왕실특무대 쪽은 뭔가 나온 게 있었습니까?”
프로드의 양대 정보기관인 아르곤과 왕실특무대.
평소에는 알게 모르게 서로를 견제했지만, 이번만큼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체들턴 가문의 비리 조사.
공주의 일을 들은 알베르토는 극도로 분노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카드와 엘런을 필두로 한 무력이라면 체들턴 가문 정도는 제압할 수 있다.
일국의 왕족에게 정신 지배 마법을 건 것은 탄압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체들턴의 결정적인 무기는 마법이 아닌 정치였다.
공주가 사라진 시점에서 그녀에게 걸린 마법을 분석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체들턴의 소행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탑과 귀족들이 그들을 두둔하고 나선다면 자칫 내전으로도 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알베르토는 그들의 무기인 정치를 이용하여 그들을 끌어내릴 계획을 세웠다.
결국, 정치라는 것은 명분이다.
공주의 사건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행한 다른 극악한 범죄와 이에 대한 왕실의 심판.
그 명분을 찾아낼 수 있다면 국정의 혼란을 최소화하며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양대 정보기관이 협력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르곤에서 못 찾은 정보를 왕실특무대라고 찾을 수 있겠어?”
자신들을 향한 무한한 신뢰.
가빈은 그런 엘런의 신뢰에 보답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게다가 그쪽도 우리처럼 투입할 수 있는 인원이 제한적이라서 더 힘든 것 같더군.”
체들턴 가문은 후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명실상부 프로드 제1의 귀족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왕실에 자신들의 세력을 심어 놓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왕실특무대라 하여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알베르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특무대 중에서도 소수만을 추려 정보 수집에 투입했다.
“결정적인 증거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밀함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 아르곤에서도 더 이상 인원을 추가로 투입하지는 마.”
엘런은 이미 레오나드의 사례에서 겪은 바가 많았다. 당시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히 체들턴을 엮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들은 보란 듯이 그곳에서 빠져나갔다.
“왕실에서도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이 흘러가면서 물밑에서는 바쁘게 움직일 거야. 그 분위기에 맞게 우리도 움직이면 돼.”
“예, 반드시 은밀하게 움직이며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겠습니다.”
가빈은 엘런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시기가 다 되어 갑니다.”
가빈은 방금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한 엘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도 똥줄이 타고 있겠구나.”
엘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늘 들고 다니던 도트의 스태프도 챙겼다.
“일단 거기부터 갔다 올게. 조금만 더 수고하고 있어 줘.”
“예, 다녀오십시오.”
* * *
고센 제국의 수도 이크랏트.
그곳은 동부 대륙의 패권을 가진 제국의 융성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높은 건물들이 줄을 지어 서 있기 때문에,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이라면 누구나 넋을 놓고 그 위용에 감탄하고는 한다.
최근 들어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이크랏트의 규모만큼은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크랏트의 길거리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딜 가나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그 사람들은 검의 제국이라는 위상에 맞게 하나같이 허리에 칼을 차고 다녔다.
그런 이크랏트에도 인적이 드문 곳은 있었다.
거대한 성벽 근처.
그곳은 이따금 돌아다니는 경비병과 외딴 건물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끼익.
그 외딴 건물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 틈으로 아무렇게나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쓴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벌떡.
“오셨습니까?”
건물 안에 있던 시종이 몸을 일으키며 예를 올렸다.
허름한 차림새였지만, 시종의 깍듯한 모습으로 보아 그 사내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자는 도착했는가?”
“아닙니다.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달려와 이동진을 활성화했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시종의 말에 사내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커다란 후드가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젠장!”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는지, 거칠게 후드를 뒤로 젖혀 버렸다.
“아주 포로가 따로 없구나.”
그러자 후드가 가리고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정체는 바로 고센 제국의 제3황자 알폰스였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황자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했다.
그는 꼭 며칠간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눈 밑이 퀭했다. 피부 또한 푸석푸석하여 윤기가 흐르던 황족의 피부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핏발이 잔뜩 선 눈은 오직 피로감 때문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욱씬.
잔뜩 성을 내던 알폰스는 갑자기 가슴께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일전에 있었던 제2차 프로드 정벌에 참전했다가 얻어 온 저주였다.
‘그 자식이…….’
알폰스는 그날 보았던 엘런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승리를 확신했던 전투를 단신으로 엎어 버린 것도 모자라, 제국의 삼성이라고 불리는 그랜드 마스터까지 쉽게 쓰러뜨린 괴물.
그때부터 심장에 박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흔적. 그는 매일 밤 그 고통과 두려움으로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크헉.”
욱신거리던 심장이 이제는 누군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그 괴물이 준 저주가 가장 무서운 이유는 이것이었다.
일정한 주기로 그의 처치를 받지 않으면, 고통이 점차 깊어져 결국에는 죽게 되는 것이다.
알폰스는 적국의 일개 마법사에게 목숨을 담보로 잡혀버린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기까지 했다.
‘이 저주를 풀지 못하는 한, 내가 고센의 황제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는 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이 저주를 풀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다녔다.
하지만 제국에서 엘런을 능가하는 마법사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태자가 적국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 극비리에 일을 처리했다.
그 때문에 저주를 해결할 실력자를 찾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알폰스는 야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진심으로 제국의 부흥을 꿈꾸는 이였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만 제국이 부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저주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제국은 프로드의 속국이 될 뿐이었다. 차라리 1황자나 2황자가 황제가 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최선이라면 선택해야겠지.’
알폰스는 선택의 시기가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이 저주를 떨쳐 내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최선이 되기 때문이었다.
‘형님들도 차라리 이런 상황을 원하고 있었겠지.’
제1, 2황자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으면서 알폰스의 출세만을 견제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가 엘런의 저주에 걸린 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이때다 싶어 알폰스를 몰아내려고 할 것이다.
‘아니, 그래서는 제국은 영영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쿠당탕.
알폰스는 답답한 마음에 주변에 있던 의자를 걷어찼다.
당황한 시종은 얼른 그 의자를 다시 세웠다.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에게 답을 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울분을 속으로만 삼킬 수가 없어서 내지른 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복잡할 것 없어. 그냥 조용히 살면서 지금처럼 인형놀음이나 잘해 주면 돼.”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 들려오자 알폰스는 급하게 몸을 돌렸다.
“와, 왔는가?”
그는 찌푸리고 있던 표정을 풀고는 엘런에게 말했다.
“그래, 이렇게 너를 살려 주려고 왔지.”
엘런은 여전히 빛나고 있는 이동진에서 벗어나 알폰스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목숨 값은 가지고 왔다.”
알폰스는 품에서 둘둘 말려 있는 종이를 꺼냈다.
황색의 종이와 그 끝에 묶여 있는 붉은 줄.
그것은 제국의 정보부에서 사용하는 종이였다.
엘런은 그 자리에서 종이를 펼쳤다.
그 종이에는 그 동안 있었던 제국의 주요 동향에 대한 정보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바로 밑에는 국정을 맡아 운영하는 알폰스의 의견이 주석으로 달려 있었다.
“흐음…….”
엘런의 눈은 그 종이들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르곤이 조사한 제국의 동향과 이 내용을 대조해 보았다.
이로써 엘런은 제국의 움직임을 완벽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군.”
엘런은 제국의 극비문서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품에 넣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네가 계획한 전쟁과 그 패배의 죗값을 네가 직접 갚는 거니까 아무런 불만도 없겠지?”
“무, 물론이지. 그러니 얼른 이 고통부터 좀 처리해 줘.”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보고 있던 시종은 도무지 이 장면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황태자.
그에게서는 언제나 기품이 흘러넘쳤고, 그의 존재감은 그 일대를 꽉 채우고도 남았다.
하지만 목숨이 담보로 잡히자 그런 황태자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는 비참한 사내였다.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엘런이 손이 알폰스의 가슴을 향했다.
휘잉.
이시스의 힘과 엘런의 마나가 동시에 흘러나왔고, 그것은 곧 알폰스 쪽으로 흡수됐다.
알폰스는 자신의 심장을 쿡쿡 찔러 대던 얼음 조각들이 진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몇 달 정도는 쪽잠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기까지 했다. 그만큼 엘런의 저주는 고통스러웠다.
“고맙다.”
“누누이 말하지만, 소란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있어. 내가 널 살려 놓는 이유를 잊지 말라는 말이다.”
“나도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알폰스는 비굴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긴.”
엘런은 귀족이나 왕족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집착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큰 인질을 잡고 있는 이상 제국에 대해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안 그래도, 프로드도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니까.’
체들턴과의 전쟁을 생각하고 있는 왕실 내부적으로도 국제 정세의 안정은 중요했다.
“그럼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엘런은 몸을 돌려 자신이 타고 왔던 이동진에 올라섰다.
슈웅.
그가 자취를 감추는 것은 일순간이었다.
그 외딴 건물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함을 유지했다.
“으아아아!”
다만, 그 안에서는 분노한 황태자의 포효가 요동치고 있었다.
건물에 걸린 사일런스 마법이 아니었다면, 주변에 있던 경비병들이 달려왔을 것이다.
“두고 봐라. 내가 이대로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황태자는 손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시종은 앞으로 1시간은 이어질 이 광경을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