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35
135
결정적인 단서 (2)
* * *
왕궁에 있는 국왕의 개인 응접실.
그곳은 명예의 훈장 수여식 때 엘런이 이용했던 곳이기도 했다.
비공식적인 회의를 가지는 장소인 이곳에는 지금 네 명의 사내가 있었다.
“왕실 특무대에서도 갖은 노력은 다 기울이고 있지만, 체들턴 녀석들은 이미 모든 꼬리를 잘라 두었다.”
국왕 알베르토는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혀를 쯧하고 찼다.
“베라타티 경의 아르곤과도 협동 조사를 진행하며 나온 것들도 결정적인 것은 없는 것 같더군. 그자들 치밀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그럼 방법이 아예 없는 것입니까?”
로미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알베르토에게 물었다.
쉽지 않은 싸움을 예상하였지만, 프로드 양대 정보기관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우리가 조사를 하는 중에도 그들은 자신의 세력을 늘려나가고 있더구나.”
절그럭.
국왕의 뒤에 서 있던 아카드는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검을 쓸어내렸다.
그는 검을 들고 체들턴 가문을 쓸어버리는 상상을 몇 번이고 했었다.
물론 그것은 상상에만 그쳤지만, 그만큼 그는 지금의 이 상황이 막막했다.
“저도 조금 전까지는 결정적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있습니다.”
모두의 답답함을 한 번에 뚫어버린 것은 바로 엘런이었다.
“베리타티 경, 무엇이라도 발견한 게 있는가?”
“예, 폐하. 저도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 발견한 것이라 따로 보고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신의 불충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의 말에 알베르토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다. 얼른 그 증거부터 보여다오.”
척.
엘런은 세리가 가지고 왔던 유리병을 꺼냈다.
이제는 보존 마법이 걸려 있던 터라 표본이 더는 부패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역병 환자의 상처를 채집해온 것입니다.”
로미우는 지금까지 그림으로만 받아보던 역병을 이렇게라도 직접 보게 되니, 그 심각성을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발견한 것인가?”
알베르토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공주가 정신 마법에 걸려 풀었던 병이라고는 하나, 그 병을 만든 자들은 체들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뚜렷한 증거가 없어 비장의 수로 사용하지 못했다.
엘런이라도 누군가 병원病原에 마법적 처리를 했다는 것만 발견했을 뿐, 이미 사라지다시피한 마나의 흔적을 좇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엘런이 저 병을 꺼내 들었다는 것은 확실한 증거를 잡았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 병에 들어 있는 상처는 지금까지의 역병 환자의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병에 들어 있는 상처 부위를 유심히 보았다.
겉보기에는 지금까지 보고받은 그림과 전혀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이 환자는 저희가 제작한 회복제에 거부 반응을 보였습니다.”
“엘런, 네가 만든 회복제는 부작용까지 실험했던 것이 아니었어?”
로미우의 말에 엘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기에 저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 환자의 상처를 조사했습니다.”
엘런은 세리에게 병을 건네받은 후, 리버와 함께 연구실에 틀어박혀 작성한 실험 결과서도 꺼냈다.
“마법사의 혈통이라 칭하는 가문은 각자 특별한 마법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가문의 특별한 마나 수집법이나 수식 계산법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즉, 이 특징만 잡아낼 수 있다면 이 역병을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마법에 의한 사건·사고를 조사할 때, 자주 쓰는 방법이었기에 그들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이미 흩어져 버린 이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회복제에 거부 반응을 일으킨 환자에게서는 흔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엘런이 병에 든 상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이들도 눈을 크게 뜨고 엘런의 말에 집중했다.
“거부 반응을 일으킨 이유는 병원에 술자의 마나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법을 해제시키려고 하자 그 마나가 방어기제를 작동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흔적에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는 마나의 주인…….”
촤락.
엘런은 복잡한 계산이 쓰여 있는 실험 결과서를 몇 장 넘기더니 마지막 장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바로 마탑주 루이스 체들턴의 것입니다.”
“아!”
알베르토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책상에 놓여 있는 병, 그리고 엘런이 계산해 놓은 저 식.
저것들은 모두 체들턴 가문이 계획적으로 역병을 퍼뜨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체들턴 가문이 자신들의 목표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역병을 풀었다.
그것은 명분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마땅히 처벌해야 할 일이었다.
드디어 그들이 저지른 극악한 행동 중 하나의 증거를 찾아낸 것이다.
“프로드의 두 기둥이라는 놈이 어떻게 그런 일을!”
아카드는 명령만 떨어진다면 곧바로 체들턴 저택을 찢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의 정치력을 빼앗기 위해서는 모든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만천하에 드러나야겠지.”
체들턴은 분명 어떻게든 지지자를 모아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할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세력을 끌어들일 여유조차 주어서는 안 됐다.
“나는 얼마 후에 있을 정기 국정 회의에서 이 사실을 말하도록 하겠다. 그 전까지, 이 사실은 여기 있는 인원 외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예.”
그때, 엘런이 손을 들어 올렸다.
“폐하,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인가?”
“페링턴이라는 지역에는 이 환자 말고도 다른 거부 반응자가 있다고 합니다. 당장 회복제를 만들 수가 없기에 제가 직접 찾아가 그들을 치료해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엘런이 작성한 실험 결과서와 상처 표본이 있다면, 어떤 마법사라도 루이스의 마나라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토는 오히려 직접 발 벗고 나서서 백성들을 도우려는 엘런이 고맙기까지 했다.
“백성에 대한 경의 생각은 나까지 배울 점을 보게 하는구나. 그러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합니다.”
무릎을 꿇으며 예를 올리는 엘런을 보며 알베르토는 웃음을 지었다.
로미우가 이끌 프로드 왕국은 이런 신하들만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럼 이만 해산하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각기 다른 출구를 통해 개인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누가 있기라도 했냐는 듯 침묵이 감돌았다.
* * *
엘런의 앞에는 페링턴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런 외진 곳까지 갔던 거예요?”
이동진이야 프로드 내에서도 몇 개 없다 보니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이렇게 길도 제대로 없는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제 정보원이 이곳까지 따라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예요.”
“이런 곳까지는 오히려 도움의 손길이 닿지 않더군요. 수도로 돌아간다면 오라버니께 여기서 느낀 점을 잘 말씀드렸으면 좋겠어요.”
며칠 동안이나 노숙을 한 그녀의 몰골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그녀는 결코 마을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 있는 환자를 돌보아야 한다며 말을 달렸다.
‘이게 원래 공주님이었나?’
체들턴 가문에게 정신 지배를 받기 전의 그녀.
그때의 그녀도 이토록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과거의 그녀는 총명하고 결단력 있기는 했으나, 냉철하고 분석적인 사람이었다.
‘백성 하나하나의 생활보다는 국익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치던 사람이 언제 이렇게 변한 거지?’
세리로 있었던 지난 기간은 자신에게 남은 평생을 바꿀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세리,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마을로 진입하려고 할 때, 누군가 그녀를 애타게 찾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요. 최대한 빨리 온다고 온 건데. 환자들은 어떤가요?”
“거부 반응을 보이는 환자가 하나 더 늘어서 스크롤이 부족하겠다 싶은 참이었어요. 그래도 당신이 이렇게 와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그제야 보일은 옆에 서 있던 엘런을 볼 수 있었다.
잘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훈훈하다고 할 수 있는 외모, 탄탄한 체격과 깊은 눈동자, 무엇보다 척 보기에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 옷차림새.
“이분은 누구시죠?”
보일은 경계의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아, 이분은 환자들을 치료해주실 마법사님이에요.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수도에서 이곳까지 직접 와 주셨어요.”
“그러시군요. 마법사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렇게까지 외진 곳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말의 내용과는 달리 그의 태도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보통의 평민이었다면 마법사라는 소리에 금방 몸을 낮추고 절이라도 했을 것이다.
또 보통의 마법사였다면 보일의 건방진 태도를 보고 호통을 치거나 심하면 죽이기까지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둘 다 보통의 평민과 마법사는 아니었다.
“일단 환자부터 보여 주겠나?”
“이쪽으로 오십시오.”
보일은 환자에게까지 가는 내내 그를 흘겨보았다.
‘세리가 귀한 분일 것 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마법사도 말을 높일 정도라니. 대체 어느 정도로 귀한 분이셨기에…….’
그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져 가기만 했다.
“이곳이에요.”
보일이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에 그들은 환자들이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스크롤 가져와!”
그중 몇 명의 관리인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부 반응인가 봐요.”
세리가 그들을 따라 뛰어갔고 엘런과 보일이 그녀를 따랐다.
“일단 팔다리부터 잡아.”
“저항이 너무 격합니다.”
그곳에는 남자 여섯 명이 붙어 환자의 사지를 간신히 누르고 있었다.
스크롤을 정확하게 그에게만 쓰기 위해서는 그의 움직임을 봉쇄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목표를 고정하지 못하자 스크롤을 들고 있는 관리인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저자가 세 번째 거부 반응자입니다.”
타닷.
엘런은 보일의 말을 전부 듣기도 전에 달려 나갔다.
‘슬립.’
“…….”
엘런이 스태프를 휘두르자 환자는 원래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들어 버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아…….”
관리인 하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정리되어 버린 상황을 보고는 탄성을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눈치가 빠른 다른 관리인은 엘런의 차림새를 보고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일단 진정시켜 뒀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예.”
관리인들은 급히 제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환자에 비해 일손이 부족한 탓에 조금이라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혹시 다른 거부 반응자들이 어디 있는지 말해 주겠나? 그들을 위한 회복제를 따로 만들어 주도록 하겠네.”
엘런은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보일에게 말했다.
“이, 이쪽입니다.”
보일은 엘런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실력까지도 미워할 수는 없었다.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던 보일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음 환자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 * *
한편 엘런이 페링턴으로 출발했을 무렵, 알베르토는 임시 회의를 소집했다.
현재 해리 포드 내에 있는 귀족들을 모은 것이다.
정기 회의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임시 회의를 소집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때문에 귀족들은 하나같이 서둘러 대전으로 달려왔다.
“경들은 들으라.”
“예, 폐하.”
알베르토의 근엄한 목소리에 귀족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이 주 후에 예정되어 있던 정기 회의의 규모를 격상하도록 하겠다.”
그러자 당황한 귀족들이 서로에게 눈치를 보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국왕의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 그 말씀은 혹 고위 귀족 회의를 소집한다는 것으로 풀이해도 되겠습니까?”
고위 귀족 회의는 프로드의 전 고위귀족들이 국무 회의에 참가하는 매우 이례적인 행사였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고위귀족 회의는 케니프라에 수도군을 지원하는 것을 논하는 것이었다.
“고위 귀족 회의가 아니다. 과인은 지금 전 귀족 회의를 말하는 바이다.”
귀족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전 귀족 회의는 국경 수비와 같이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모든 귀족이 참가해야 하는 회의다.
이것은 프로드가 건국된 이래 다섯 번도 채 열리지 않았다.
“과인은 프로드의 모든 귀족 앞에서 전하고자 하는 말이 있다. 그런 이유로 하여, 다가오는 정기 국무 회의를 전 귀족 회의로 격상한다.”
서기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왕의 뜻이 담긴 지령서를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서기는 지령서를 작성하여 모든 귀족에게 전달하도록 하라. 또한 마탑은 가지고 있는 모든 통신 수단을 이용해 이 사실을 전파하라.”
“뜻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귀족들의 대답을 들은 알베르토는 슬쩍 체들턴을 보았다.
그의 표정 역시 자신의 의중을 전혀 모르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얼른 그날이 오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