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49
149
탑주 (1)
* * *
엘런은 전투를 벌이고 있는 병사들 사이를 미끄러지며 통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싸우는 사이에 무엇이 지나갔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전투를 이어 나갔다.
그가 커다란 구체 앞에 도착했을 때, 그 밑에서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 있던 이들도 저 워터 스피어가 떨어지면 손써 볼 틈도 없이 진형이 무너져 버릴 것을 알고 있었다.
베스 남작은 마법을 모으고 있는 탑주와 몇몇 마법사를 저지하기 위해 병력을 진격시켰다.
그러나 반란군의 대항이 만만치 않았다.
강 대 강의 대결.
어느 한쪽도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그사이 흐르는 피의 양은 많아지고 푸른 구체 역시 크기를 더해만 갔다.
‘탑주가 마법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엘런은 뷰 마나 포스를 사용하여 탑주의 위치부터 파악했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병사들 때문에 거기까지 한 번에 도달할 방법이 없었다.
틈을 비집고 돌입할 수는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저들 사이에 고립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일단 탑주부터 끌어낸다.’
마지막 대결을 염두에 두고 온 상황.
그렇다면 그를 이곳으로 불러낼 방법이 필요했다.
엘런은 이제는 햇빛을 가려 어두컴컴하게 보일 정도로 거대해진 구체를 보았다.
그 안에서 출렁거리고 있는 물은 마치 바다를 품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얼린다.’
저 물이 떨어지면 끝이라는 것은 물이 떨어지지만 않으면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이스.’
엘런이 선택한 것은 1서클의 일반적인 결빙 마법이었다.
그러나 같은 마법이라도 그가 사용하는 시점에서부터 이미 일반적이라는 범주를 넘어서게 된다.
쩌적.
7서클의 마나가 들어간 아이스.
그리고 수십 번 중첩되어 동시에 작용하는 마법.
그것만 해도 워터 스피어에 유의미한 충격을 줄 수 있었다.
엘런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아이스를 시전했다.
워터 스피어의 하단에 서리가 맺히더니 표면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저 마법부터 막아.”
“워터 스피어를 지켜라.”
그 모습을 본 반란군들이 방어 마법을 펼쳤으나, 그들은 진즉에 그것이 쓸모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탑주가 물을 채워 넣는 속도보다 엘런이 물을 얼려버리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영창이 빠르다고 한들, 엘런은 아예 영창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마법사 서너 명 정도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마침내 워터 스피어는 완전히 동결되어 버렸다.
쿠웅.
2만 톤 가량에 육박하는 물을 품은 워터 스피어는 이제 얼음이 된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 거대한 구체가 떨어지는 소리는 전장 어느 곳에 있든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 밑에 병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반란군은 물이 모이는 동안 방어의 수월함을 위해 자신들의 머리 위에 띄워 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이토록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끄륵.”
그 육중한 무게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그곳에 있던 병사들은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피떡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든 막아 내긴 했군.’
최악의 상황은 막아 낸 엘런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워터 스피어를 얼리기 위해 꽤 많은 마나를 사용했다.
‘이러다간 마나량이 부족해질 수도 있겠어.’
아직은 마나하트에 무리가 올 만큼은 아니었지만, 탑주와의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마나가 소모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싹.
엘런이 자신의 마나를 가늠하고 있을 때, 갑자기 등골에서부터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떤 마법도 기술도 아닌 본능이라는 것의 알림이었다.
워터 스피어가 일으킨 흙먼지가 가라앉을 때쯤, 그곳에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건장한 노인네 정도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뿜어내는 마나의 파동은 결코 그가 평범한 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길게 뻗은 스태프가 움직일 때마다 풍기는 존재감.
그 주변에 부는 마나의 폭풍을 보고 있노라면 거대한 산을 마주하고 있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그 노인은 바로 프로드 마탑의 탑주, 현 인류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는 루이스 체들턴이었다.
“드디어 나오셨군.”
엘런은 여유가 넘치는 듯 말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금까지 프로드에서 볼 때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트로이보다도 훨씬 강했다.
이것이 바로 프로드가 자랑하는 두 기둥이자 인류 최고의 마법사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자네를 부르고 있었네.”
탑주는 여전히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저렇게 눈에 띄는 마법을 사용한 것 아니겠나?”
그의 시선이 꽁꽁 얼어 있는 워터 스피어를 향했다.
탑주의 말대로 엘런이 어디에 있든지 그의 마법을 볼 수 있을 만큼 커다랗고 느린 마법이긴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받은 것 같은 생각에 엘런의 기분이 안 좋아졌다.
“혼자서는 힘들 텐데, 차라리 제국삼성과 협공이라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엘런도 초조한 기분을 숨긴 채, 평상시처럼 그를 대하려 했다.
자신에게 숨 막히는 위압감을 주려고 일부러 마나를 뿌려 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의 의도에 넘어가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놈과는 호흡도 맞춰 본 적이 없으니 괜히 방해만 되지 않겠나? 내심 그자에게 당하지 않기를 바랐었는데. 잘되었군. 이렇게 전장에서 마주 보고 서 있을 수 있으니 말이야.”
탑주의 입술이 죽 갈라졌다.
인자하게만은 보이지 않는 괴이한 미소였다.
엘런은 자연스럽게 도트의 스태프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네는 자네의 재능이 아깝지 않은가? 자네야말로 신이 내린 재능이 아니던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겁니까? 전투를 하려고 보니 인제 와서 겁이라도 나시는 겁니까?”
“어째서 자네 같은 인물이 능력도 없는 한낱 인간 밑에서 그러고 있는지 안타까워서 그러네. 마탑의 왕국에서 자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리고 살게.”
엘런은 시답잖은 소리라고 생각하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올란도나 탑주나 마법사가 신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자의 성품을 지니고 있어야 할 마법사가 권력에 취해 있는 모습은 지켜보고 있기에 너무나도 흉측했다.
“저는 마법사, 그러니까 당신네들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런지 도통 이해할 수 없군. 그러나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알겠네. 내가 장담하지 자네는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일은 없을 걸세.”
기잉.
엘런은 지금까지 느껴지던 불안함의 정체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소환되어라, 라그나 블라스트.”
발밑에 있던 역 오망성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미리 그려진 소환진으로만 불러낼 수 있는 다른 차원의 불꽃. 7서클의 마법이면서도 8서클의 헬 파이어와 같은 화력을 자랑하는 불꽃.
그것이 소환진을 타고 이 땅에서 솟구쳐 올랐다.
엘런은 반사적으로 안티매직 쉘을 치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여전히 라그나 블라스트의 범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비록 안티매직 쉘이 있다고는 하나, 저 불꽃을 막아 낼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이시스를 이용해 온도를 낮출 수 있을까? 기각. 아무리 이시스라도 저 온도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지금 움직인다 해도 피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엘런은 점점 다가오는 불꽃을 보며 자신의 바로 앞에 소닉 버스터를 터뜨렸다.
퍼엉.
그 반발력으로 엘런의 몸은 멀리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 방금까지 엘런이 있던 자리를 종말의 불꽃이 휩쓸어 버렸다.
“크으.
소닉 버스터와 동시에 방어를 한다고 했지만, 가슴팍에서 얼얼한 고통이 전해졌다.
다행인 점은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용케 피했구나.”
엘런이 트로이와 싸우는 사이, 탑주는 소환진을 그려놓고 워터 스피어라는 나름의 유인책까지 사용했다.
그리고 완전히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했지만, 엘런은 순간적인 임기응변으로 그곳에서 빠져나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은 사실인가 봅니다. 그런데 비장의 수가 이렇게 끝났는데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엘런이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으며 말했다.
라그나 블라스트는 강력하지만, 사전에 소환진을 그려 놓아야만 했다.
그것마저 자신이 피했으니, 이제는 공수가 바뀔 차례였다.
“자네라면 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지. 그럼 이제 전면전밖에 남지 않은 것이겠군.”
탑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스태프를 고쳐 잡았다.
그의 표정만 봐서는 참혹한 전장에 나와 있는 모습이 전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일대일 마법전(魔法戰)에서 내가 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엘런에게도 자신은 있었다.
마법전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는 바로 영창의 길이.
그 부분에 있어서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속도를 가진 것이 엘런이었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마법전에서 고전했던 적은 손에 꼽을 수 있었다.
“탑주라고 예우 같은 건 없을 겁니다.”
“시작해도 좋네.”
쿠쿠쿠.
현 인류 최고의 마법사라 할 수 있는 두 명이 마나를 내뿜었다.
짙은 마나가 서로의 기세에 밀리지 않기 위해 엎치락뒤치락했다.
마나 간의 싸움만으로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진동했다.
“징벌하라, 스톤 크래쉬.”
운석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커다란 돌덩이가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콰가가강.
그 거대한 돌은 그저 지면과 충돌하는 것만 해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그 여파는 돌덩이의 존재감을 더 과시했다.
돌덩이를 중심으로 땅은 쩍쩍 갈라졌다. 발판을 잃어버린 병사들은 끝을 알 수 없는 시커먼 구멍 안으로 빠져버렸다. 순식간에 반경 30미터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무식하게 나오는군.”
엘런만큼은 그 초토화에서 예외였다. 포스 필드를 몇 겹이나 두르고 있었고 레비테이션까지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런이 놀란 것은 탑주가 사용한 마법의 위력이 아니었다.
‘라그나 블라스트도 그렇고, 스톤 크러쉬도 그렇고.’
아무리 마법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동서클의 마법을 저토록 짧게 하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7서클 마법을 사용하는 그의 주문은 고작 한 단어였다.
‘체들턴 놈들이 말하는 혈통이 있긴 있는 걸까?’
마법 아카데미 시절에 릭이 보여 주었던 짧은 길이의 영창.
노라드를 따라간 자리에서 보았던 올란도의 짧은 영창과 부드러운 연계 공격까지.
엘런은 체들턴 가문과 이미 겨뤄 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가 항상 느꼈던 것이 있었다. 체들턴 가문 놈들은 하나같이 영창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이스 체들턴은 빠른 것이 다가 아니었다.
사용하려는 마법의 서클이 높아질수록 당연히 영창도 길어진다.
사용자의 실력에 따라 영창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지만, 영창이 짧아질수록 마법이 빠를지언정 상대적으로 위력이 감소한다.
그런데 그는 7서클의 마법을 위력 하나 손실하지 않은 채 몇 음절로 구현했다.
일반적인 마법전에서 탑주가 이 정도로 속도로 마법을 날리면 상대는 엘런처럼 멀쩡하게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점들로 본다면 정말로 그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재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보다는 힘들어지겠는걸.’
시전 속도에서는 엘런이 앞선다고는 하나, 마법 자체만 놓고 본다면 훨씬 오래전에 7서클에 도달한 탑주가 더 앞설 수 있었다.
전투 마법사가 가져야 할 모든 소양을 가진 그를 보며 엘런은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스톤 크러쉬로 인한 여파가 진정되면서 둘의 모습이 드러났다.
츠츠츠.
무성한 흙먼지 뒤에서 나타난 탑주는 이미 다음 마법을 완성시킨 후였다.
붉은색과 푸른색. 두 가지의 7서클 마법이 엘런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