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54
154
불청객 (1)
* * *
원래 전쟁의 피해는 패배한 쪽에서 모든 책임을 지게 된다.
그것이 전쟁을 하는 이유였다.
상대의 모든 것을 갖겠다는 탐욕스러운 마음. 승자 독식이라는 비인도적인 분배 방식. 모든 전쟁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내전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다. 내전으로 인해 프로드의 북동쪽 국경지대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피해는 바로 인적자원이었다.
애초에 프로드는 천연자원이 풍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동부 대륙의 일인자를 넘볼 정도의 국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뛰어난 인적 자원 덕분이었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프로드는 이 인적 자원에 지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피해를 보상해야 했다.
그것이 승자로서의 권리이자 전후의 현실이었다.
“이번 내란을 주도한 체들턴 가문은 프로드 왕국 공공의 적으로 지정한다. 그리고 이번 내전의 책임성을 인정하고 보상 재원을 마련할 것을 명한다. 이의가 있는가, 릭 체들턴?”
동의를 구하는 질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알베르토의 말은 사실상 명령과도 같았다.
릭 역시 이미 모든 것이 결정이 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체들턴 가문은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뚝 떨군 채 지껄이는 이 말이 지금 자신이 받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가주와 가주가 사망한 이유로 소가주 릭 체들턴의 동의를 받아 이하의 내용을 선포한다.”
이 형식적인 발표문의 내용은 체들턴 가문의 모든 사유재산을 몰수하여 복구 비용으로 쓴다는 내용이었다.
‘엘런, 그놈이 우리 가문의 비밀 창고까지 찾아냈다고 했었나?’
마탑의 왕국을 만든 후, 자금을 동원하기 위해 영지민들을 쥐어짜 모아 놓은 재산이 있었다.
며칠 전, 그 재산을 숨겨 놓은 비밀 창고까지도 엘런이 발견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꼭 살아남을 필요성도 못 느끼겠군.’
반란을 일으킨 자신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나간다고 한들 자신이 그렇게 경멸했던 빈민들과 함께 생활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이 죽고 싶다고 해서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었다.
체들턴이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발표문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이번에 파면된 모든 가문의 영지는 왕실에서 관리하도록 할 것이다. 경들은 영지를 관리할 귀족들의 추천서를 올리도록 하라.”
프로드의 신권을 상징하던 체들턴 가문이 파면당했다.
지금이야말로 개국부터 이어진 왕권과 신권의 균형 싸움에서 확실히 앞설 기회였다.
그리고 알베르토는 그것을 놓칠 자가 아니었다.
이번에 자리가 난 영지들은 하나같이 가치가 높은 영지였다.
비록 관리직이긴 하지만,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꽤 쏠쏠할 것이었다. 그랬기에 군소귀족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냈다.
“마지막으로 보상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유족들의 지원이어야 한다. 이 보조금을 중간에서 빼돌리는 자가 있다면 엄벌로 다스릴 것이다. 경들은 그리 알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체들턴은 근위병들에게 이끌려 다시 감옥으로 돌아갔다. 그가 체포당한 후 몇 번이나 반복한 일이었다.
왕실에서 반란군의 수장인 자신을 살려 두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로써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모든 이유를 잃었다.
그 한 가지 만큼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탑주님!”
그때, 근위병은 복도 끝에 서 있는 엘런을 보고 깜짝 놀라며 경례를 올렸다.
“수고가 많네. 내가 조사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데려가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이제 엘런은 상아탑의 탑주로서 국왕 바로 밑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판단만 있다면 일정한 절차 없이도 죄인을 심문할 수 있었다.
“네놈…….”
엘런을 본 릭의 눈에서 독기가 흘러나왔다.
“탑주님에게 무슨 말버릇인가?”
“탑주라는 말을 저런 놈에게 붙이지 말란 말이다!”
“이놈이!”
근위병은 릭의 오금을 걷어차자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근위병 하나가 엘런에게 무릎을 꿇으며 사과를 했다.
“아닐세. 그대가 고생이 많네.”
엘런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릭을 조사실로 끌고 갔다.
“시종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저분 덕에 다른 귀족들도 우리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예전부터 느꼈지만, 정말 정중하신 분이야.”
죄인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은 근위병의 잘못이니 한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엘런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넘어갔다.
그들은 그런 엘런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근무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조사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털썩.
한편 조사실로 들어간 엘런은 릭을 집어던지다시피 의자에 앉혔다.
“탑주가 되었다고 해서 네놈의 더러운 피가 어디 갈 것 같으냐?”
릭은 내팽개쳐지면서까지도 소리를 질렀다.
엘런이 탑주가 된 것은 죽어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아직도 그놈의 혈통 타령인가?”
“네놈만 아니었어도…….”
엘런은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릭을 내려다보았다.
그 무기질적인 눈빛에 릭의 화는 더 끓어올랐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냐? 나는 너 같은 놈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릭은 엘런을 향해 바락바락 대들었지만, 엘런은 여전히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너한테 알고 싶은 건 딱 하나밖에 없어.”
목소리마저도 눈빛만큼이나 무미건조했다.
“네놈이 나한테 묻고 싶은 게 있다고? 그걸 내가 넙죽 말하기라도 해야 한다 이건가?”
“아니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될 텐데?”
꿀꺽.
릭은 지금 엘런이 하는 말이 전혀 거짓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안 그래도 지금까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고문을 받아 왔다.
거기서 엘런이 추가된다면 자신이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당한 자들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손가락이 한두 개 잘려 나가고 살아 돌아왔다면 기적의 범주에 들어갔다.
그에게서 벗어나려면 최소한 손가락은 네 개 이상 바치고 정신이 나가 정상 생활이 어려울 정도가 되어야 했다.
“너희들이 제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 누구지?”
“모, 모른다.”
릭은 두려움을 떨쳐내고 대답했다.
스걱.
결과는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엘런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 신체 부위 끝부터 하나하나 잘라 나갔다.
그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태도였다. 엘런은 적에게까지 자비를 베풀 정도로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물어볼게.”
“으으.”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릭은 손가락 하나가 잘린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엘런은 상대를 봐가면서 적당히 해 줄 생각이 없었다.
“으아아아악!”
그 후로 조사실은 끔찍한 비명으로 가득 채워졌다.
물론 사전에 조사실 안으로 사일런스 마법을 걸어 두었기에 아무도 그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후우.”
릭이 고통 때문에 기절해 버리자 엘런은 몸을 일으켰다.
‘워터폴.’
쏴아아.
“으헉!”
쏟아지는 물줄기에 기절했던 릭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여전히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어이, 릭, 내가 정말로 너의 지원자를 모를 것 같나?”
그런 릭에게 엘런이 물었다.
“그게 무슨…….”
“하메론.”
엘런은 릭이 하려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들은 릭의 마음속에서는 순간적으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저 녀석 알고 있는 것인가?’
하메론의 이름만큼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꺼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자신을 꺼내 주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줄 이는 그자밖에 없었다.
그런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지금의 고통을 참아 가며 입을 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엘런의 입에서 그렇게 숨기고만 싶던 이의 이름이 나와 버린 것이다.
“하메론이 제국과 너희들을 연결해 주었겠지. 그가 후드를 쓰고 있지 않던가?”
“……!”
릭은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올 뻔한 목소리를 억지로 집어삼켰다.
지금 말을 한다면 자칫 자신의 흔들리는 목소리가 들킬까 봐 입을 닫고 엘런을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너를 고문한 이유는 네가 나한테 저지를 짓을 되갚아 주려고 그랬을 뿐이다. 사실 너의 목숨 값은 조금 전, 대전에서 한 동의로서 모두 결제되었어. 이제는 살려 둘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
“그, 그런…….”
끼익.
엘런은 그대로 돌아 조사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의 등은 애초에 너 같은 놈에게는 관심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브레디, 대충 내가 정신을 흔들어 놓았어요. 아마 이제는 술술 전부 불 겁니다.”
엘런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브레디에게 말했다.
릭이 듣지 못하도록 사일런스 마법을 사용하는 것까지 빼먹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엘런 님께서 의심하고 계신 것들은 제가 알아내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흑마법사들 중에서는 범죄자 심문에 특화된 마법을 알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브레디가 바로 그런 부류였다. 엘런이 의심하고 있는 사실을 릭으로부터 자백을 받아 줄 수도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브레디는 엘런에게 경례를 한 후 조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 녀석…….’
그가 조사실에서 처음 본 릭의 모습은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릭이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그의 상태는 꽤 심각해 보이는 단계였다.
“저놈은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건가?”
릭은 농락당한 것만 같은 이 기분을 떨쳐내 버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목숨 바쳐 잡고 있었던 동아줄이 이미 끊겨 있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나를 가지고 논 것이란 말이군. 하찮은 평민 주제에 이 나를……!”
갑자기 그가 소리를 질렀다.
퍽.
“닥쳐.”
브레디가 그의 입을 주먹으로 때렸다.
입술이 터지면서 피가 튀었지만, 릭은 그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흐흐, 흐흐흐흐.”
그는 오히려 미친 사람처럼 웃기까지도 했다.
“너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네까짓 게 나를 가지고 놀았단 말이냐!”
릭은 눈이 돌아갈 것 같이 외쳤다.
‘일단은 지금 뭘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군.’
브레디는 지금의 릭과 같은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서는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이놈을 지켜보고 있어야겠다.’
그는 릭의 정신이 돌아오는 대로 반란 지원자의 명단을 종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눈을 뜨면 이곳인 것은 변함이 없을 테니 말이야.”
* * *
휘잉.
왕성 내에 불길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그리 강한 바람인 것도 아니었고, 그저 한 줄기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 바람이 누구의 것인 줄 알았다면 경비병들이 그토록 노닥거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저쪽에서 느껴지는구나.”
그 바람 안에서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바람일 뿐, 어떤 형태도 없었기에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바람은 목소리만 남겨 둔 채 왕성을 떠돌았다.
그러던 중 창문 틈을 타고 미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은 바람은 좁은 창문 틈조차도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사내 두 명이 있었다.
“그래서 역도의 지원자가 누구인지 불 생각이 없는 건가?”
“없다고 했지 않았느냐?”
릭은 아무런 힘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브레디가 처음 왔을 때와는 달리 릭은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인 것은 변함없었다.
“하메론. 그자가 범인이라는 것은 기정사실로 되어 있다.”
“글쎄, 모른다고 했다.”
“어쩔 수 없겠군.”
브레디가 릭을 향해 손을 뻗었다.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는 패턴이었다. 이제 릭의 비명이 이곳을 가득 채울 차례였다.
“이런, 이미 늦었잖아.”
브레디의 예상은 갑자기 들려온 소리로 인해서 어긋나 버렸다.
후웅.
지금까지 아무런 형태도 갖추고 있지 않던 바람이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잠시 후, 릭은 그자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끝나지 않을 고통 속에서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아니, 찾아오는 것조차 확신할 수 없는 그자. 자신이 가진 유일한 동아줄.
“하메론.”
그의 입에서는 환희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