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have a cooldown RAW novel - Chapter 157
157
서부 대륙 (2)
* * *
알베르토의 허락이 떨어진 후, 엘런의 서부 원정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상아탑주의 업무는 마법사 중 경험이 가장 많은 라르트 그론리드가 도맡기로 했다.
엘런은 그 외에도 각 분파의 대표들을 불러 그들의 역할에 대해 상세히 말해 주었다.
엘런은 자신이 없는 동안에도 상아탑의 활동만큼은 절대 멈추지 않도록 준비를 마쳤다.
가족들부터 시작해 주변인들에게도 인사를 돌렸다.
그들은 걱정하면서도 엘런을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조그만 상로가 있고 그곳을 통해 문물이 오갔지만, 여전히 동부 대륙인들에게 서부 대륙이라는 곳은 미지의 세계와도 같았다.
자칫하면 생이별이 될 수도 있는 원정이었기에 인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모든 준비를 마친 엘런이 출발하기 직전 로미우가 그를 찾아왔다.
“이제 떠나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왕자님.”
로미우는 옆에 서 있는 엘런을 바라보았다.
엘런은 장기간 여행을 위한 장비를 마지막으로 점검하는 중이었다.
“또 세상을 구하러 가?”
처음 엘런이 네트의 조각을 찾아 떠날 때, 자신에게 해 준 말이었다.
세상을 구하러 간다는 말.
그때의 로미우는 엘런이 그토록 멋있어 보였다. 옛날이야기에서나 보던 용사가 할 법한 대사.
그것을 실제로 들으니 괜히 자신의 가슴이 더 울렁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로미우에게는 엘런의 어깨에 있는 부담의 무게가 보였다.
용사라는 건 생각보다 그리 매력적인 직업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거창한 이유가 아닙니다.”
엘런은 로미우의 말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는 세상이 아니라 그저 제 주변 사람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엘런의 대답에 로미우도 함께 싱긋 웃었다.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 대답이었다.
“언제쯤 돌아올 것 같아?”
“언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가 하메론을 잡는 날이겠지요?”
“그전에 그가 프로드로 돌아오면 어떡하지?”
로미우는 마지막으로나마 엘런을 잡아 보고 싶은 마음에 한마디를 툭 던졌다.
“하메론, 그자는 프로드가 아니라 저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프로드를 함락시키기 위해 저를 해하려 한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저 제가 목표였던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유인책이 될 수 있습니다.”
엘런도 로미우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이곳에 남을 수는 없었다.
강해지지 않으면 언젠가 하메론의 준비가 끝났을 때, 그를 막을 수 없다.
“그렇겠지.”
로미우는 엘런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엘런, 네 덕분에 난 정말 많이 성장할 수 있었어.”
그는 한숨을 한 번 내쉬며 말했다.
자신의 어리광이 약간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 덕분이 아니라 왕자님께서 원래 갖추고 있던 소양이었습니다.”
“지금 같은 자리에서는 겸손을 안 떨면 안 돼?”
“죄송합니다.”
로미우는 풋 하고 웃었다.
“아마 네가 돌아올 때쯤이면, 나도 지금보다 훨씬 더 국왕의 모습에 가까워져 있을 거야.”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다녀와.”
엘런은 로미우에게도 왕실에서 했던 경례를 바치고는 국왕에게 직접 하사받은 말인 레클리스에 올라탔다.
히이잉.
그가 등에 올라타자 레클리스가 힘차게 몸을 들어 올렸다.
윤기가 흐르는 털과 성인 남성의 몸통만 한 허벅지 근육은 이 명마(名馬)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성장을 위해 떠나는 원정이었다.
그저 체술을 배우겠다며 프로드 내를 돌아다니거나, 세상을 구하겠다며 동부 대륙만 돌아다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여정이었다.
‘아직까지 하메론은 나를 피하고 있다. 그러나 그놈이 언제까지고 나를 기다려 주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주어진 시간 안에 그놈이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힘을 얻어야 한다.’
엘런은 자신의 목표를 다시금 되새겼다. 세상을 구한다는 거창한 목표는 아니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목표이기도 했다.
다그닥.
엘런이 박차를 가하자 레클리스는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 * *
확실히 레클리스는 네트 원정 때, 국왕에게 받은 말보다도 훨씬 좋은 말이었다.
보통 같았으면 3주는 걸렸을 만한 거리였음에도 이 말은 단 15일 만에 주파해 버렸다.
어느새 엘런은 트라키아 초원과 서부 대륙으로 나누어지는 갈림길을 넘어 올비아 산맥에 들어와 있었다.
이곳에서부터는 좁고 가파른 숲길이 많아 말을 몰기에 부적절한 곳이었다.
‘그래도 피어 산맥보다는 낮은 게 다행인 건가?’
엘런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주어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험한 산길마저도 평지를 걷는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나무가 끝없이 늘어져 있다는 것은 피어 산맥과 다르지 않았고, 그것이 엘런의 전진을 늦추는 요소가 되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하얀색 종이가 들려 있었다.
‘올비아 산맥에서 길을 찾아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곳을 넘나다니는 상인들이라면 모두 방향을 알려 주는 아티팩트를 들고 다닙니다.’
그 종이는 아르곤의 바르다이 왕국 담당 정보원이 작성한 것이었다.
그는 갈림길에서 엘런을 기다리고 있다가 아티팩트와 보고서를 넘겨주었다.
‘어떻게 보면 피어 산맥보다도 더 이상한 곳이구나.’
엘런은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방향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광역 스캔과 제피로스를 통해 방향을 파악한 덕분에 이 정도 속도로나마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시시각각 바뀌는 마나의 흐름 때문에 더 속도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출몰하는 몬스터들이 많아 하나하나 처리하고 가는 것 역시 방해 요소 중 하나였다.
‘더 속도를 올릴 수는 없으니 그전에 서부 정황이나 살펴야겠어.’
엘런은 밑으로 이어지는 글을 읽었다.
거기에는 서부 대륙 정황에 대한 아르곤의 조사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상이 서부 대륙에서 있었던 큰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정보는 신뢰도를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엘런은 수도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아르곤을 통해 서부 대륙에 대해 조사했다.
그러나 그곳은 괜히 신비의 대륙이 아니었다.
상인들을 통해 전해 듣는 소식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정보다 대다수였다.
왕래가 적어서이기도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정보가 통제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모두 가 봐야 안다는 것인가?’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직접 진위를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서부 대륙의 배경 지식 정도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여기선 회귀 전 지식을 사용할 수 없으니 정보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지.’
엘런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서부 대륙과의 교류가 활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그는 서부 대륙에는 갈 일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소식을 찾아볼 필요가 없었던 것도 있었다.
엘런은 동부 대륙에 있는 동안에 알게 모르게 회귀 전 지식을 활용해 왔다.
커다란 역사의 흐름을 알고 있었고, 주변국들의 정보나 큼지막한 사건들도 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그 사실은 엘런이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서부 대륙에서는 자신의 지식을 기본으로 깔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주어진 정보와 순간의 판단력만으로 의사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일단은 부딪혀 보자. 이제 곧 서부 대륙에 발을 들일 것 같으니 말이야.’
엘런은 이미 산의 정상을 넘었다.
고개를 넘느라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고 있었지만, 며칠 내로 서부 대륙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 방향으로 계속 내려가게 되면 토마르 왕국이 나올 예정이었다.
동부 대륙의 바르다이 왕국처럼 서부 대륙과 동부 대륙을 연결하는 관문 국가였다.
그 덕분에 엘런도 토마르 왕국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조금 있었다.
-여기는 희귀한 식물들이 많은 것 같구나.
그때, 프로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거 대마법사였던 그 역시, 서부 대륙으로 넘어올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곳의 풍경은 신기하기만 했다.
‘식생이 완전 다른 것 같기는 합니다.’
산 정상을 중심으로 서부와 동부는 완전히 다른 산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엘런이 엘프의 숲에서만 볼 수 있었던 식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니 멘도사라는 식물도 이곳에 있을 것만 같구나.
‘멘도사는 이쪽 사람들에게도 희귀한 식물이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다.
프로뱅의 위로에, 엘런이 옅은 한숨을 뱉으며 걱정을 떨쳐 버릴 때였다.
“네놈들,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 같은 놈들인데 이런 짓을 저지르는 것이냐?”
목이 쉰 노인의 목소리가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엘런에게 도달했다.
“그런 것까지 친절히 설명할 생각 없으니까 가진 거나 내놓고 가셔. 죽이지는 않을게.”
뒤이어 들려온 것은 전형적인 산적의 초반 대사였다.
“내가 가진 것이 있다면 얼마나 있다고 그러느냐?”
“이 산을 혼자서 멀쩡히 돌아다니는 영감이면 아티팩트든 뭐든 가지고 있단 말이겠지. 그것만 내려놓고 가라.”
엘런은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일단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곳에는 나이는 많이 들어 보였지만, 기운만큼은 펄펄한 것 같은 노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4명의 산적이 둘러싸고 있었다.
통일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군기가 꽤 지켜지는 산적들인 것 같았다.
“없다, 이놈들아. 없어. 너희같이 아티팩트에 의존해서 이곳을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노인의 말에 산적들의 분위기가 험상궂어졌다.
“이거 목숨은 살려서 돌려보내 주려 했는데 말이야. 가진 게 하나도 없는 빈털터리다? 이 산맥을 넘는 사람치고는 준비가 하나도 안 된 사람이 없을 텐데.”
스릉.
그들은 동시에 검을 뽑았다. 검 역시도 하나같이 잘 벼려져 있었다.
“목숨 값이 없으시다면 영감이 살아 돌아갈 방법은 없겠군. 이 검에 다치고 싶지 않으면 지금 가지고 있는 걸 얼른 떠올려야 할 거야.”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엘런은 그냥 지나칠까도 생각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고 괜히 복잡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쯧쯧, 그런 잔재주가 없으면 이곳을 걸어 다니는 것조차 불가능하단 말이냐?”
엘런의 얼굴에 느낌표가 떠오른 것 같았다.
‘여기 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인가?’
아티팩트도 없이 이곳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말은 올비아 산맥을 손바닥 안에 두고 있다는 의미였다.
‘저자의 안내를 받는다면 엘프의 숲에서 엘프의 도움을 받는 것과 같을 수 있다는 거잖아?’
일전에 페리스의 도움을 받아 엘프의 숲을 얼마나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었던가.
결정을 내린 엘런은 곧바로 움직였다.
‘배리어.’
카앙.
노인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산적이 갑작스러운 방해물에 어리둥절했다.
“누구냐?”
뒤쪽 수풀에서 엘런이 걸어 나오자 산적들의 표정이 험상궂어졌다.
노인을 노리던 칼이 이제는 방향을 바꿔 엘런의 목을 노리게 되었다.
“산적질을 하는 놈들에게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엘런은 그들의 실력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규율은 잘 잡혀 있지만, 그것뿐이었다.
개개인의 실력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산적이었다.
“이곳을 혼자 다니는 것을 보니 네놈도 가진 게 많나 보군. 안 그래도 노인네 때문에 답답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조장으로 보이는 산적이 험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왼쪽 눈에 길게 그어진 흉터가 그 웃음을 더 흉악하게 만들었다.
“가진 건 많은데 말이야.”
츠팟.
엘런의 몸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일은 마무리되어 있었다.
산적들은 모두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공격에 어디를 맞은 줄도 모른 채 엘런에게 제압당해 버렸다.
“고, 고맙네.”
노인도 아직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는지 덜떨어진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나는 괜찮네. 어차피 늙은 목숨, 언제 죽어도 아깝지는 않으니. 그래도 하찮은 이 목숨을 조금이나마 연장해 줘서 고맙네. 덕분에 손녀딸을 만날 수도 있겠어.”
엘런의 정중한 질문에 노인은 마음이 안정된 것 같았다.
“보아하니 산맥을 내려가고 있는 길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노인은 엘런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20대에 불과한 나이하며, 간소한 짐을 보니 혼자서 산맥을 건너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혼자서 가고 있는 것인가?”
“어찌어찌 내려가고는 있었는데, 실은 속도를 못 내 답답해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허어. 이곳은 무사히만 나가도 다행인 곳일진대, 엄한 생각을 하는군.”
노인의 말대로 올비아 산맥은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잘 단련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하루도 못 버티고 몬스터들의 밥이 되기에 십상이었다.
게다가 방향을 잡지 못하는 문제 때문에 실력자들도 건너기 꺼리는 곳이기도 했다.
오직 상인들만이 일확천금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이곳을 오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목숨은 소중했다.
당연히 산길을 오가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빨리 내려가고 싶다는 엘런의 말이 우습게 들리는 것도 당연했다.
“어르신께서는 이곳에 대해 잘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혹시 돌아가시는 길이라면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사례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호오, 보는 눈은 있군. 됐어, 목숨을 구해 준 사람에게까지 사례를 받을 일은 없으니.”
헛기침을 한 번 한 노인은 훌쩍 앞으로 가 버렸다.
‘이로써 조금은 빨리 내려갈 수 있겠어.’
엘런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